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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의 달밤

한국문인협회 로고 최승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4월 6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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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에 달이 뜨는 밤이면 일부러 걸음을 늦춘다. 서두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아서다. 이 호수의 밤은 빠른 사람에게 좀처럼 얼굴을 내주지 않는다. 가을로 접어든 경포호는 낮보다 밤에 더 많은 것을 품는다. 바람은 얇아지고, 물결은 낮게 숨을 죽인다. 달빛은 물 위에 닿자마자 풀린다. 흔들리지만 흩어지지 않는다.
강릉의 경포호에는 월파정이 있다. 호수 한가운데, 바위 위에 낮게 앉은 정자 하나. 낮에는 또렷하고, 밤에는 오히려 조용해지는 자리다. 난간에 기대어 그 정자를 바라본다. 실제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러나 달이 호수의 중심으로 기울어질 즈음이면, 실루엣처럼 윤곽만 희미하게 보이던 형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월영정. 기록 속에서만 남은 정자, 달의 그림자를 위해 지어졌다는 이름처럼 공간 속에서 달밤의 섬세한 결을 만들어 낸다. 월파정과 달 사이의 거리, 물결이 잠시 멈춘 각도, 술잔 하나를 올려두기에 충분했을 법한 높이, 그런 것들이 호수 위로 자연스럽게 투영된다. 마치 오늘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발밑의 돌, 물가의 풀잎, 바람이 스치는 방향 따라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이 물결처럼 밀려온다. 누군가 이 달밤을 먼저 건너갔다는 것과 그 마음이 아직 물 아래 가라앉지 않았다는 예감이다.
달이 더 높이 오르자, 호수 위에 또 하나의 호수가 열린다. 빛으로 된 호수. 그 순간 공기의 결이 달라진다. 물가의 온도가 미세하게 기울며, 누군가 막 다가온 것처럼 숨결이 변한다. 무심코 고개를 드니 아무도 없다. 그런데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확신처럼 다가온다. 이 밤에는 있어서는 안 될 시간이 함께 와 있다.
월파정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그들이 앉아 있었을 법한 위치를 가늠해 본다. 물과 달 사이의 거리는 술잔 하나를 사이에 두기에 무겁지 않았을 침묵의 간격이다.
황진이. 서경덕….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르는 순간, 장면은 조금 더 또렷해진다. 여인은 술잔을 들고도 마시지 않는다. 먼저 달을 본다. 남자는 잔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술을 마시기에는 달이 너무 밝다는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말이 오가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말이 많을수록 정서가 얇아진다는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술잔이 기울어진다. 그 순간, 달빛이 잔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술이 아니라 달을 마시는 장면. 이것이 상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무 선명해서 의심조차 들지 않는다. 여인은 잔을 입술 가까이 가져가다 멈춘다. 그러나 마시지 않는다. 달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잠시 눈에 어리고 마음으로 머금는 것이라는 듯.

 

“달이 너무 밝군요.”
말은 소리라기보다 물 위의 떨림으로 전해진다. 서경덕은 잠시 침묵하다가 답한다.
“그래서 오늘은 쉬이 취하지 않을 것 같소.”
그 말이 끝나자, 바람이 한 번 호수를 훑고 지나간다. 월파정은 흔들리지 않지만, 달빛은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이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인지, 겪고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분명 현실의 시간에 서 있는데, 이 밤에는 그 구분이 쉽게 무너진다.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관광객의 웃음이다. 주차장에서 자동차 문 닫히는 소리도 이어진다. 현재의 기척이 천천히 겹쳐온다. 그럼에도 달빛은 물 위에 그대로 남아 있고, 월파정의 그림자 또한 흐트러지지 않는다. 두 시대는 섞이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달이 구름에 잠시 가려진 순간, 장면은 서서히 옅어진다. 술잔은 다시 빈 잔이 되고, 월영정은 물결 속으로 스며든다. 호수는 다시 빛에 물든 호수로 돌아오고, 바람은 원래의 방향을 찾는다. 그제야 숨이 내려앉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가슴 한켠이 묘하게 젖어 있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취한 밤처럼. 이곳에 오래 머물렀던 마음 하나가 조용히 안쪽으로 옮겨온 느낌이다.
다시 달을 본다. 호수 위에 남아 있던 달빛은 이미 멀어졌고, 이제는 경포호 앞 숙소의 야외 풀장 물 위에서 푸르게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이 물 또한 경포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달은 여전히 물 위에 있고, 빛은 여전히 흔들리며, 몸은 여전히 물 위에 맡겨진 채 잠시 눈을 감는다. 몸은 분명 이 감각적인 현실에 닿아 있는데, 마음은 아직 달빛에서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채로 묵직한 그림자에 눌린다.
월파정은 현실의 풍경이다. 그리고 월영정은, 그 풍경 위에 겹쳐지는 시간의 이름이다. 달밤 아래 두 공간이 서로 공존하는 듯한 날에는 술잔을 들지 않아도, 이 밤은 이미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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