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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에 끓여낸 그리움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정분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4월 6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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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라!”
그 한마디에 가마솥 안에서는 오래된 고향이 들끓기 시작한다. 갯벌의 숨을 머금은 망둥이와 우럭이 우리 5남매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주었다. 무와 양파, 대파가 어우러진 갈무리 뒤로 알싸한 청양고추가 정점을 찍는다.
한소끔 끓어오르는 생동감 위로 푸릇한 날배추를 숭덩숭덩 썰어 넣는다. 낡은 가마솥의 무쇠 벽을 뚫고 나올 듯, 고향의 향기가 사방으로 번져 나간다. 이 진한 매운탕 냄새라면, 구만리 저편 하늘에 계신 부모님조차 걸음을 되돌려 찾아오실 것만 같다.
코끝을 스치는 것은 단지 음식의 향기가 아니라 평생을 그리워하던 유년의 기억이다. 얼큰한 국물 속에서 녹진하게 숨이 죽은 배추는 지독했던 그리움을 닮아 더없이 달짝지근하다.

 

부모님이 천국으로 여행 가신 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형제들의 얼굴을 보자는 취지로 환갑이나 생일을 맞아 떠나는 여행이다. 5남매 모두 결혼했으니 짝꿍들까지 딱 열 명이다. 단체 여행이라 의견이 분분하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조차 속을 모르는데, 하물며 머리 큰 동생들 속을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형제들이 건강하기만 하면 멀리 여행 가는 것도 의미 있고 좋겠지만, 얼마 전까지 투석 받은 오빠를 위해서 이번 여행은 고향 근처 태안에 머물기로 했다.
바닷물이 빠지고 갯벌에 있는 바위를 들어보니 늦잠 자던 낙지가 화들짝 놀란다. 장갑 낀 손으로 확 낚아챘다. 낙지는 살짝 데쳐서 숙회로 먹고, 망둥이와 다른 물고기는 셋째넷째가 깔끔하게 손질해서 매운탕을 끓였다. 밀가루를 질게 반죽해서 매운탕에 뚝뚝 떼어 넣었다. 아주 근사한 요리가 되었다.
유년 시절 온 가족이 둥근 오봉상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깔깔대며 함께 먹던 수제비 맛이다. 갓 잡은 바지락의 절반은 탕으로 끓이고, 나머지는 까고 호박이랑 부추, 쪽파와 청양고추를 썰어 넣어서 해물파전을 만들었다. 파전 위에 들깻잎을 고명으로 얹어주니 향긋하고 감칠맛이 나서 훨씬 더 맛있다.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가을비가 운치를 한층 더해 준다. 막걸리에 파전은 한 쌍의 잉꼬부부다. 어느 여름날 감자전을 먹고 가족들이 밤새 해우소를 들락거리던 그날이 생각났다. 그날도 오늘처럼 억수로 비가 쏟아졌었다.
펜션 주인은 우리처럼 손수 잡아서 음식을 만들고, 주위 사람들과 나눠먹는 건 20년 동안 처음 보는 일이라고 좋아하셨다. 어렸을 때 바닷가에서 살던 우리들은 낚시를 좋아했다. 그러니 잡는 것도, 손질하는 것도 두려울 게 없다. 어느새 펜션 주인은 우리와 한 가족이 되어 있다. 펜션에 머무는 사람들과 나눠먹고도 남았다. 옆방에 여행 온 가족들은 잔칫집 분위기라고 우리를 부러워했다.
오전 오후 두 번씩 해루질을 했다. 장갑을 끼고 망둥이를 잡는데 어찌나 힘이 세고, 미끄러운지 요리조리 빠져나가서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 눈앞에서 여러 번 놓쳐버렸다. 망둥이는 나만큼이나 성격이 급한 것 같다. 바위를 뒤집어서 흙탕물을 살짝만 건드려 놓으면, 그 속에 숨어 있던 망둥이가 지레 겁을 먹고 팔딱팔딱 튀어 오른다. 그때 잡으면 된다.
망둥이처럼 낙지도 잡았다. 초보자들은 나처럼 바위를 뒤집어서 망둥이나 낙지를 잡고, 고수들은 낚시로 잡는다. 허리와 고관절협착증을 앓고 있다는 걸 까맣게 잊을 만큼 재미있었다. 물이 빠지고 바위에 붙어 있는 낙지를 잡으려고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바위에 붙은 낙지를 떼는 순간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나보다 낙지가 더 놀랐다. 장갑에 빨판이 붙은 걸 보니, 종아리에 거머리가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먹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낙지는 망둥이보다 머리가 좋고, 갯벌에 훨씬 빨리 숨는다. 갯벌 속으로 들어가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놓칠 때가 허다하다. 50년 전에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호롱불을 밝히고 잡았던 낙지보다 이번에 잡은 낙지가 훨씬 더 크고 행동도 빠르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스마트 시대로 변한 것처럼, 낙지가 많이 똑똑해졌다.

 

검은 재앙이 훑고 지나간 태안의 바다, 그로부터 어느덧 열일곱 해가 흘렀다. 모진 세월을 견디고 기적처럼 살아남은 생명들은 갯벌 아래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모래흙을 살짝 걷어내자, 꼿꼿이 몸을 세운 바지락들이 반가운 얼굴을 내민다.
호미 끝으로 길어 올린 바다의 보석들, 그것을 까서 노릇한 파전을 부쳐 형제와 이웃의 상에 올렸다. 바다의 신선함이 그대로 배어든 고소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함께 나누는 온기 덕에 맛은 더욱 깊어졌다. 향수에 메말라 있던 내 가슴 위로 모처럼 촉촉한 단비가 내린 기분이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가끔은 서로 부딪치며 삐걱대기도 하겠지만, 그것조차 양보와 사랑으로 보듬으며 이 길을 오래도록 함께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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