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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놀기

한국문인협회 로고 오세윤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4월 6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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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을 사과하며 맺는 김씨 전화가 얄궂다. 형님도 이젠 혼자 노는 법을 익혀야 하신다며 서먹하게 충언한다. 뭔 말이지? 게임 중간에 걸려온 친구 전화에 얼씨구나 내빼더니 뚱딴지같이 혼자 놀라니. 게임에 져서 기분이 상한 건가? 그래도 그렇지 형님 아우 하는 사이에 그깟 승부가 뭐라고. 2년 세월이 허수하다.
70 중반 들어 등산이 힘들어진 뒤로 나는 대신 당구를 하며 건강을 챙겼다. 산지사방 흩어져 사는 친구들이 모이기 쉽게 주로 종로의 당구장을 단골 하여 다녔다. 한 달 두 차례 정기 모임은 물론 불시에 만나는 번개 모임에도 빠지지 않았다. 대체로 여덟에서 열 명이 세넷씩 팀을 나누어 왁자지껄 공을 쳤다.
나이 들어 서울 나들이가 벅차지자 나는 모임 참석을 줄이고 동네 당구장을 전전하며 공을 쳤다. 하지만 모여 놀기에 익숙해 혼자는 별반 재미가 없었다. 언뜻 모르게 이 다이〔臺, 대〕 저 다이를 기웃거리며 빌붙어 치기 일쑤였다.
동네 당구장은 노인들로 늘 만원이었다. 열 중 아홉이 노인으로 거의 모두 혼자서 공을 쳤다. 종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따악 딱, 공 치는 소리뿐 말들이 없는 데다 TV마저도 볼륨을 낮춰 마치 선수 전용 연습장이기나 한 것처럼 숙연했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어쩌다 젊은이들이 들어와도 몇 게임 안 치고 바로 나갔다. 코로나 역병 유행 때의 저 ‘2m 거리두기’ 탓이라고만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서투른 풍조였다.
빌붙는 것도 갈수록 눈치가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들처럼 혼자 공을 치게 됐다. 2년 전 그날도 집 근처 당구장에 자리가 없어 한 블록 떨어진 시내로 갔다. 모퉁이 G당구장, 역시 만원이었다. 돌아서 나오려다 기왕 온 김에 구경이나 하자 하고 대기 의자에 앉아 장내를 둘러봤다. 다이 10개, 하나같이 70대고 모두가 혼자였다. 80대도 없었다. 바로 앞에서 치는 청바지 사내가 그나마 지긋했다. 자세가 바른 데다 인상이 온후했다. 함께 칠만하다 싶어 다가가 귀를 빌렸다. 같이 칠 수 있겠느냐고. 뜨악한 표정으로 흘낏 날 스쳐본 남자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몇 치시느냐 되물었다. 250, 우연하게도 수*가 같았다. 그렇게 나는 김씨와 한 주 한두 차례 게임을 즐기며 간격을 좁혔다.
70 초반인 김씨는 첫 보기답게 감정 표현이 정제되고 예의가 발랐다. 다만 건강이 좋지 않았다. 고혈압에 당뇨를 앓는 데다 만성 기관지 폐쇄증까지 있어 자주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도 줄담배를 피웠다. 딱해 지적하면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자기는 유일한 위안이 담배고 취미가 여행이라고. 고등학교 때부터도 방학만 되면 국내 곳곳을 여행했다며, 특히 강원도와 경상도는 가보지 않은 읍면이 없을 정도로 뒤지듯 다녔다고 했다. 성질머리가 괴팍해 여행도 남과 함께는 못한다며, 오죽하면 결혼하고도 그 버릇 못 고쳐 집에서는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튀각 남편’으로 낙인찍혀 내놓은 자식 취급받기 오래라고 했다.
어제도 두 게임을 이기고 세 번째에 들어 역전하던 참에 김씨의 전화기가 귀 따갑게 울렸다. 기다린 듯 받으며 목청을 돋워 대꾸하는 말투가 듣기 면구하게 거칠었다.
“짜샤, 왔냐? 뭐? 어디라고? 버스 정류장? 알았다 임마. 곧 갈게.” 
걸쭉 미끈둥히 하대하는 얼굴이 득의만면했다.
전화를 끝낸 김씨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휑하니 나갔다. 뭐라 말할 겨를도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선 나를 사람들이 흘낏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던지럽게 야속했다. 김씨 맞나? 그의 이면이 생경했다. 신중하게 공을 치는 평소의 성향으로 보아 어쩌면 의도된 행동처럼 생각됐지만 딱히 짚이는 건 없었다.
김씨의 말을 곱씹는 중에 퍼뜩 어릴 때의 옆집 은지가 떠올랐다. 여섯 살 동갑내기, 병치레가 잦던 은지는 늘 혼자 소꿉을 놀았다. 흙 담벼락 아래 백합조개껍데기를 늘어놓고 “오마이 어쩌구…” 하며 종알종알 노는 은지가 궁금해 다가설라치면, “또 개개가이? 절루 안 가가이?” 하고 눈을 흡떠 야멸차게 야단쳤다. 은지에게 나는 다만 소꿉장을 어질러 놓는 개구쟁이일 뿐이었다.
은지에게처럼 나도 김씨에게는 은근히 신경 쓰이는 성가신 훼방꾼이었는지 모른다. 자의에 반하여 예의를 지켜야 하는 연상, 이등병들이 모여 건빵 봉지를 뜯어 놓고 낄낄거리는 자리에 비틀비틀 끼어드는 고참 상병처럼 거북한.
아침참의 김씨 전화는 내게 당구로 보낸 저간의 순간들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됐다. 친구들과 어울려 공 치고 웃고 떠들고 밥 먹고 술 먹고, 그러다 혼자 치게 되면서 느꼈던 소외감과 임의로움. 어쩌면 김씨도 나처럼 공기 맑고 한갓진 근교에서 여생을 보내겠다며 이곳으로 내려왔을 것이고, 연고 없는 곳에서의 고립감으로 조금쯤은 외로웠을 것이다. 그간 바쁘게 사느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느라 밖으로 나돌던 시선이 안으로 굽으며 자신을 새롭게 발견했을 테고, 힘든 세상 대과 없이 살아 낸 스스로가 대견했을 것이다. 느긋하게 가족과 지내며 누리는 평온과 마음이 이는 대로 보내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리저리 궁리하며 거듭 시도하는 당구가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실감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침을 끝내고 집 뒤 공원 산책에 나섰다. 햇살이 맑다. 날씨도 걷기 마침하게 풀렸다. 담장 곁 모감주나무 사이로 물까치 한 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울려 쫓는다. 뒤처져 따라오는 아내를 본다. 걸음이 힘겹다. 그러구러 지내는 이웃 백 명이 어찌 아내 한 사람만 할까. 기다려 손을 잡는다.

 

*수: 당구의 실력 지표. 핸디. 수, 지수 또는 수지(數指)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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