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천국은 분홍색일 거야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인경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4월 686호

조회수11

좋아요0

분홍색 벚꽃이 바람에 날려 춤을 추듯 바닥으로 떨어진다. 벚꽃 나무 아래에서 두 팔을 벌려 꽃비를 맞는다. 은회색 머리칼 위에도 검정색 코트에도 분홍 벚꽃 잎이 나비처럼 내려앉는다. 순간 천국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꽃잎이 떨어진 도로는 분홍빛 천을 깔아 놓은 것 같다. 비가 후드득 내리자 꽃잎들은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가며 분홍색 강을 이룬다.
분홍색이 좋다. 집 안의 커튼을 비롯하여 그릇과 소파의 색깔도 온통 분홍색으로 바꾼다. 1회 용품을 구입할 때 조금 비싸도 분홍색으로 산다. 컴퓨터 자판 깔개도 벚꽃 무늬가 있는 분홍색이다. 애완견을 키울 때에도 수놈이건만 분홍색 옷을 입혔다. 산책을 나가면 암컷이냐고 주위에서 물어 빙그레 웃음으로 대신했다. 이토록 분홍색을 좋아하게 된 것에는 사연이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되었다. 할머니는 분홍색을 좋아하였다. 늘 고운 한복을 입고 있었다. 색깔도 다양하게 배색하는 멋쟁이였다. 어떤 옷을 입던 어느 한 부분에는 분홍색이 배색되어 있었다. 첫 손녀여서 사랑을 듬뿍 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해가 질 무렵이면 두 다리를 뻗고 울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리웠다. 3년간 그리하였다. 너무 애타게 그리워한 탓이었을까. 어느 날 꿈을 꾸었다.
혼자서 커다란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운전기사만 있고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어딘가 한참을 가니 기사님이 문을 열고 내리라고 하였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 차는 저승으로 가는 버스였던 것 같다. 내린 곳은 온통 분홍색 꽃으로 덮인 아담한 주택이었다. 대문도 울타리도 안이 들여다보이는 철창으로 되어 있었다. 대문 기둥에 달려 있는 초인종을 누르니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묻기에 “인경이에요∼”라고 대답하니 “너 들어오면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고 철창 대문이 옆으로 스르륵 열렸다.
대청마루에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그 옆에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보다 반 년 늦게 간암으로 돌아간 작은아버지가 계셨다. 마을 훈장 딸이었던 할머니는 고운 한복을 입고 무언가를 넣어 싼 분홍색 보자기를 내게 내어 주었다. 받아 가슴에 안으니 꿈속에서도 묵직함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내게 어서 돌아가라고 재촉하였고 나도 서둘러 그 집에서 나왔다. 철창으로 된 대문이 또 스르륵 닫혔다. 집 앞에 서서 보니 넓은 도로가 있었고 도로 건너편에는 살아 있는 식구들이 보였다. 부모님을 비롯한 나의 형제들이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꿈을 꾼 이후로 까닭 없이 분홍색이 좋아졌다. 분홍색을 보면 할머니를 만난 듯하였다. 그 후로는 무엇이든 물건을 살 때는 분홍색으로 골랐다. 그리고 수필을 접할 계기가 생겼다. 서울 아파트 옆집에 살던 친구는 국문학을 전공해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끌었다. 근처에 있는 신문사 사무실에서 『창작수필』의 오창익 교수님이 강의를 하신다고 나를 데리고 갔고 전공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그동안 책 읽기와 일기 쓰기를 계속해와 낯설지는 않았다.
두 해 동안 강의를 듣고 2000년도에 등단하였고, 김학 교수님, 이승하 교수님과도 인연이 이어졌다. 이승하 교수님 강의를 2017년도부터 8년간 들으며 교수님의 지도로 2023년 『은발을 날리는 오드리』란 수필집을 내게 되었다. 정식 책 발간이 늦어진 것은 암 치료 때문이었고 중간에 남편이 ‘라일락꽃 첫사랑’이란 제목으로 간단하게 내 글을 책으로 묶어 주었다.
수필은 살아가는 이야기를 문학화 하는 생활 속의 문학이다.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어 우리 집 사연을 많이 쓰게 되었다. 혹자는 집안 자랑하느냐고 하는데 나는 집안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을 뿐이다. 꿈에 할머니가 주신 분홍색 보따리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내가 이렇듯 수필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할머니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대학을 졸업한 분이다. 군청에 근무하며 취미로 꿀벌을 기르다가 일제의 압박과 핍박에 공직을 그만두고 양봉업을 생업으로 선택했다. 새벽마다 목욕하고 사찰에서 기도하며 인생을 평화롭게 사셨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고 의병 제대한 ‘6·25 참전 용사’로 국가유공자였다. 오랫동안 공직에 계셨다.
동생들은 나보다 더 건강하고 공부도 잘했다. 똘똘한 여동생은 대학에서 의상학을 전공하고 대기업 연구실에서 근무하다가 의사와 결혼한 뒤로는 남편을 차에 태워 출퇴근을 시키고 남편과 간호사들 점심 도시락까지 싸서 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는 손자도 둘을 보아 집안 식구 돌보고 재산 관리하느라 여념이 없다.
남동생은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로 있으며 자신의 전공 분야에 관한 서적만을 만들 뿐 집안 역사의 기록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 이런 역할이 온 것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다. 내 수필집을 읽은 친구들은 ‘예전에 너희 집이 그랬었지’라며 수긍해 준다. 할머니는 집안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보라고 분홍 보따리를 내게 주신 것 같다. 건강이 좋지 않아 앞으로 얼마나 더 글을 써서 책을 만들지는 모르겠다.
분홍 벚꽃이 모두 떨어졌다. 분홍 세상을 보내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나는 저승으로 갈 때 분홍색 수의(壽衣)를 입으려 한다. 그간 내가 만든 책은 관에 함께 넣어 달라고 할 것이다. 삼베에 분홍색 물을 곱게 들여 입고 분홍색 꽃잎이 깔려 있을 저승길을 사뿐히 걸어 할머니가 계시던 분홍 벚꽃으로 덮였던 그 집으로 가고 싶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