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4월 6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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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밖에 나가 노는 아이가 아니었다. 집 안에서 뒹굴며 책 읽기를 좋아했고 체력도 약해서 몸 쓰는 놀이엔 영 소질이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던 고무줄놀이는 젬병이었고, 술래잡기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든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같이 놀던 아이들이 가끔 ‘깍두기’로 끼워줘서 놀이의 맛은 봤지만, 놀이의 정수를 제대로 체험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깍두기’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니까, 걸릴 듯 말 듯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듯한 쾌감을 느끼며 기량을 펼치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술래가 되면 아이들을 찾지 못할까 봐 불안하고, 쉽게 잡히니 시들하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술래가 뒤돌아볼 때면 흔들릴까 봐 긴장하곤 했으니.
그래서였을 거다. 조용필의 <못 찾겠다 꾀꼬리>가 사무치게 들렸던 까닭이. ‘언제나 술래’인 아이라니. 어린 날 친구들을 찾지 못해서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쳤던 아이의 쓸쓸함이 선연하게 그려졌다. 모두가 숨어버려 ‘무서운 생각에’ 그만 울어버린 아이. 날 저물어 다른 아이들은 돌아가 버리고 엄마가 부르기를 기다렸는데 강아지 소리만 들리자 울음이 터지는 아이.
게다가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술래라는 사실이 슬펐다. 이제는 친구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는 술래’다. 이 가사를 들을 때마다 삶이란 이처럼 잃어버린 꿈을 찾아 계속 헤매야 하는 걸까 하는 안타까움이 가슴 한구석을 휩쓸고 지나가곤 했다.
그런데 요즘 손녀와 까꿍 놀이를 하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보여주면서 ‘나 여기 있다!’ 알리고, ‘아, 거기 있구나!’ 하며 놀라는 반응을 하면서 “네가 사라지지 않았구나. 거기 있어서 기쁘고 반가워!’란 뜻을 전하는 놀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서 오는 환희가 오롯하다.
까꿍 놀이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이를 ‘대상영속성’이란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영유아는 아직 대상영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굴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인식해 재미있어 하는 것이라고 한다. 잠시 보이지 않아도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경험을 얻는 것이라고 하니, 아이 정서 발달에 굉장히 중요한 놀이였다.
돌이 지나 걸어 다니게 되자 손녀는 적극적으로 숨는다. 얇은 이불을 자기 얼굴에 덮어 가리거나, 식탁 아래와 벽 모퉁이, 방문 안쪽의 공간에 숨어 내가 찾기를 기다린다. “어디 갔지? 안 보이는데 어디 갔을까?” 하면서 못 찾는 척하다가 찾아내 까꿍 하면 까르르 너무 즐거워 한다.
할머니가 찾으러 온다는 확신이 있기에 재미있고 자꾸 하고 싶은 것이리라. 잠시 없어진 게 아니라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경우를 상상하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엄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어디엔가 존재하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큰 안도가 될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조금 더 크면 또래들과 술래잡기를 하겠지. 아이들끼리 하는 놀이니까 봐주는 게 없을 테고, 잡히면 술래가 되어야 하는 나름 엄혹한 룰이 적용된다. 찾기 어려운 곳에 숨는 기술과 술래일 경우엔 빨리 찾아내야 하는 약빠름과 순발력, 판단력 같은 능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계속 술래를 해야 한다.
놀이의 주인공이 된 적 없던 내게 ‘언제나 술래’라는 말은 서글픈 말이었다. 언제나 지고 이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란 뜻으로 다가왔다. 어른이 되었는데 여전히 ‘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는 술래’라는 사실도 답답해 보였다. 아직도 헤매고 있다니, 안쓰러움이 몰려왔다.
그랬는데, 요즘 다른 측면이 눈에 들어온다. 꿈을 찾는다는 사실은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뜻만이 아니라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도 되지 않을까.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친 것은 이 숨바꼭질을 그만하겠다는 뜻이니, 언제나 술래이던 놀이에서 벗어나겠다는 단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같이 놀던 아이들이 모두 집에 돌아가 혼자가 되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아직 들리지 않아도 씩씩하게 감당하고 다른 놀이를 시작해 보는 아이를 상상해 본다.
내가 걸어온 길에도 모두가 숨어버려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 서 있는 것 같고 나를 찾는 사람이 없어 적막했던 시간이 있었다. 다독여줄 사람이 없다면 내가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졌던 때. 지금은 들리지 않아도 언젠가 나를 부를 거라는 믿음과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으리라는 소망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 않게 주먹을 꽉 쥐던 시간.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뻗어 나온 손길을 만나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이었다. 힘겨울 때 누군가 까꿍 하며 나타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든든한 버팀목임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었다. 현재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나타나리라는 소망으로 사실은 따뜻했던 시간이었다.
그 시절, 내게 나타나 손 내밀어 주던 이들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지금 힘겨운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누군가 나타나기를,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 손을 내밀 수 있음을 잊지 말기를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