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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진흥, 균형과 소통의 새 길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종회

문학평론가·한국문학관협회 회장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4월 6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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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면 또 세상이 바뀌었다고 놀랄 만큼, 무서운 속도로 문화예술의 환경이 변하고 있다. 글을 쓰는 문인의 창작실에도 자연스럽게 인공지능의 기능과 조력이 동원되어, 과거와 전혀 다른 창작 패턴을 연출한다. 미래학자 버크민스터 풀러 (Buckminster Fuller)는 인류가 가진 지식의 총량이 두 배가 되는 데 고작 13개월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이와 같은 때에 개인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공의 차원에서, 문학 담당 국가 기관이나 문학인 대표 단체에서 ‘문학진흥’을 어떻게 도모하며 그 효용성을 어떻게 진작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이일이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당위적 과제이기에 그렇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진흥법’은 2016년 2월 3일 공포되고 같은 해 8월 4일 시행되었으며, 2018년 10월 16일 일부 개정의 경과를 보였다. 이에 따라 ‘문학진흥’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와 범주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 추진의 방향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지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법의 제정 이유를 보면 “문학은 한 나라 문화예술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보호 및 육성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대학·학회·문학인 등 민간 영역에서의 활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학이 과연 ‘진흥’을 통해 본질적이고 고급한 성과의 추수와 자발적이고 탄력 있는 수용의 확산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라는 회의가 없지 않았다. 문학이 인간 정신의 가장 고양된 수준을 반영하며 그것은 고적(孤寂)한 창작실에서 자신과의 치열한 대결을 통해 산출되는 독자적인 생산이라는, 전통적이고 고색창연한 인식이 여전히 만만찮은 세력을 갖고 있기에 그랬다. 다시 말하면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한 문학진흥이 자칫 양적 증대에 치우치고 질적 평준화의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인 셈이었다. 하지만 ‘일학(一鶴)’이 ‘군계 (群鷄)’ 가운데서 배출될 뿐 아니라, 그 폭넓은 군계의 집단에 문학적 지원을 공여하는 일 자체가 문화복리의 실행임을 간과할 수는 없다.
문학진흥의 실제적인 현장에서는 미학적 가치에 있어 비교 우위 또는 수월성(秀越性)을 가진 문학과 포괄적인 범주에 있어 기초 지원이 필요한 문학 사이의 균형이 있어야 한다. 우월한 예술성을 가진 문학을 지원하는 것은, 두 개의 장벽을 넘는 작품의 발굴을 도모한다. 하나는 시대의 장벽을 넘어 계대(繼代)의 감응을 불러오는 ‘고전’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언어와 지경(地境)의 장벽을 넘어 세계문학의 중심부로 향하게 하는 ‘세계화’의 길이다. 포괄적 범주의 기초 지원은 일반적인 국민의 눈높이와 욕구에 맞추어 문학진흥을 일상생활 속에서 구현한다. 의무교육이나 평생학습의 차원으로 복리의 마당을 확장하는 한편, 최소한 과거의 어떤 사례처럼 문학 아사자(餓死者)가 출현하는 비극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진흥 정책의 다면적인 균형은, 그것이 가진 상징성으로 인하여 전반적인 국민 정서의 안정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실질적인 문학진흥의 공감대 형성에도 기여하게 된다. 다만 여기서 미리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은, 그 균형이 서로 상반된 양자의 입장을 중간에서 물리적으로 반분한다는 뜻이 아니다. 양 방향을 향한 청각을 동시에 열어두고 진정성 있는 의견 청취와 민활하고 설득력 있는 조정의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동양문화권의 중용이 단순히 중간적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인 양방의 통합을 발전적으로 주창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문화와 문학을 향유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편만(遍滿)하고 그로 인해 국민이 행복하며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충일하면, 또 그로 인해 문화적 생산성이 향상되어 간다면 그 자리가 ‘문화강국’의 자리다. 일찍이 영국이 세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문화강국에의 인식을 언표(言表)한 레토릭이다. 문학진흥법이 공포된 지 10년이 지났건만 성과는 그다지 볼품이 없는 지금에 이르러, 문학인은 물론 문예정책 당국도 모두 심기일전할 필요가 있다. 수용자인 독자의 의식이 공급자인 작가의 수준에 육박하고 보편적 문화복지가 강조되는 시대에 있어서,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새 길을 향한 접근법이 있어야 하고 독자의 시각도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문학의 전문성이 중요한 만큼 대중적 수용이 이를 뒷받침하도록 울타리를 열어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일 것은 문학진흥의 지원이 먼저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항목이 바른 평가와 사후관리에 관한 일이다. 대체로 국고 지원이 지원은 어렵고 그 이후는 덜 어려운 경우가 많다. 평가는 냉정해야 하고 그것이 다음의 지원에 활용되어야 한다. 이때의 ‘냉정’은 냉정하기 위한 냉정이 아니라 다음 단계의 ‘온정’을 위한 냉정이어야 한다. 그렇게 잘 계획되고 또 화해롭게 매설된 문학진흥 시스템은 그것의 진취적이고 발전적인 소망을 따라 빈센트 반 고흐를, 허만 멜빌을, 에밀리 브론테를 돕거나 열악한 창작 환경으로부터 구출하는 데 일익을 감당할지도 모른다. 이는 사뭇 어렵고 또 오래 기다려야 하는 길이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균형과 소통의 선량한 마음으로, 멀지만 참고 견디는 마음으로 함께 가야 할 길이다.
근자에 필자가 한국문학관협회 회장을 맡아 업무를 챙기다 보니, 이제껏 기술한 여러 문제가 참으로 가슴 아프게 와 닿았다. 문체부의 행정 시스템에는 보다 전향적으로 정말 문학인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마음이 먼저’인 접근법이 아쉬웠다. 국립한국문학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가의 문학 행정을 수행하고 전국의 개별 문학관을 부양하는 본분을 다하려면, 먼저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듣기의 마음가짐’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겉보기의 포즈가 아닌, 신실한 진정성을 수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 모든 주장과 세설(細說)은 궁극적으로 좋은 문학작품의 산출을 위한 바탕이요 환경일 뿐이다. 문학진흥의 참된 목표가 거기에 있는 까닭에서다. 위와 아래, 안과 밖, 제도와 사람이 활달하게 소통되고 시너지 효과를 발양하는 균형과 소통의 문학진흥을 꿈꾸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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