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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아수, 비움의 노래

한국문인협회 로고 황정희(파주)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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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갈증이 땅의 심장으로 쏟아지는 찬란한 낙화(落花)
악마의 목구멍, 그 아득한 나락이 입을 벌리면
은빛 갈기 세운 물줄기들은 제 이름을 버리고 몸을 던집니다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저 하얀 소멸의 골짜기는
무너짐이 아니라, 온몸을 부수어 하늘로 되돌리는 비상의 길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자 거대한 굉음은 고요한 명상이 되고
자욱한 물안개는 나를 가두었던 단단한 아집을 녹여 냅니다
살결을 파고드는 서늘한 전율은 억겁을 건너온 물의 가르침 
씻어낸 가슴 밑바닥으로 은하의 숨결이 차오를 때
나는 비로소 거대한 전체의 일부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벼랑 끝에서 제 몸을 짓이기는 물방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꽃가루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져야만 무지개다리를 세울 수 있음을 
깃털처럼 가벼워져야만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음을
폭포는 부서지는 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문장을 씁니다

 

눈을 뜨면 다시 중력의 시간이 나를 붙들겠지만
마음의 여울목엔 그 봄날 젖은 북소리가 여태 출렁입니다 
사는 일이 때로 아득한 절벽 앞에 서는 일이라 해도
소멸 끝에 피어날 안개의 눈부신 시작을 믿기에
이제 내 안의 가장 깊은 소용돌이를 사랑하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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