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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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진 물길 따라 여기까지 왔건만
돌아보니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수면이다
달구어진 청춘의 열망은 저녁노을에 식고
거울 속엔 낯선 사내 하나, 고독을 씹고 있다
그토록 움켜쥐려 했던 세상의 보석들은
손을 펴니 한 줌 모래보다 가벼운 것을,
지나온 길은 안개에 잠겨 아득하고
남은 길은 마른 잎사귀처럼 바스락거려
저물어 가는 해를 차마 마주 볼 수조차 없다
고개를 드니 세상엔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높은 담 안의 이들은 그들만의 성을 쌓고
금관의 무게에 눈이 멀어 민초들의 하루는 막막하기만 하다
공정은 굽은 잣대가 되고 정의는 칼날 밑에 숨어
가련한 이들의 시린 가슴을 후벼 파는데
차라리 이 소란한 이름들을 다 지우고 싶다.
뿌리 내리지 못한 인생이라 슬퍼했으나
이제는 그 가벼움으로 흐르는 물이 되려 한다.
권력의 독도, 욕망의 찌꺼기도 없는 곳으로
한 잎 부평초 되어 유유히 떠나가리라.
산그늘 깊어지는 골짜기 물소리를 벗 삼아
철 따라 피고 지는 들꽃의 순리에 몸을 맡기니
무거운 관직도, 서글픈 내일도 다 꿈이로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그렇게 고요히, 살다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