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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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활의 터전인 전북 완주군은 곶감이 유명하다. 곶감은 이곳의 겨울철 특산물로 차갑고 신선한 산간의 바람과 자연환경이 곶감을 달콤하고 쫀득하게 만들어내어 인기가 많다.
얼마 전에 완주군 용진읍에 위치한 지인의 카페에 방문했을 때 올해 만들었다며 ‘고종시’ 곶감을 먹어보라 받은 적이 있었다. 한입 베어 물었을 때 입 안에 터지는 은은한 단맛과 씨가 없어 씹기 편한 점이 카페 디저트로서 손색이 없었다.
곶감은 막 따낸 감처럼 싱그럽지도, 이미 완성된 음식처럼 친절하지도 않은 모습이다. 흑곶감이나 분이 많이 올라와 하얗게 되어버린 곶감은 반건시 곶감의 고운 주황빛에 비해 처음 접하는 이가 접하기 쉽지 않게 만든다. 하지만 한입 베어 물면 녹아 나오는 단맛의 매력에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곶감은 시간을 담은 과일이다. 나무에서 갓 따낸 단감은 달콤함을 내어주지만, 곶감은 그렇지 않다. 껍질을 벗기고 줄에 꿰어 바람에 매달리는 순간부터, 감은 스스로를 비워내기 시작한다. 수분은 빠져나가고, 단맛은 안으로 스며든다. 이 과정에는 지름길이 없다. 햇볕이 너무 강해도, 바람이 너무 세도 곶감은 상한다. 그래서 곶감은 자연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만들어진다. 인간의 욕심이 개입할수록 실패하기 쉬운 음식이다.
곶감이 익어 가는 동안 사람의 역할은 생각보다 적다. 하루에 한 번쯤 상태를 살피고,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으로 주물러 주는 정도다. 그 손길마저도 조급하면 안 된다. 너무 자주 만지면 감은 상처를 입는다. 곶감을 만드는 일은 무엇을 더하기보다, 언제 물러서야 하는지를 아는 일에 가깝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이렇게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곶감은 말없이 보여준다.
감시롱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감들을 보면 어딘가 불완전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단정하다. 이슬과 별빛, 바람을 맞으며 시간이 지나갈수록 불완전함은 사라지고 그 속엔 농축된 맛이 가득 차게 된다. 마침내 완성된 곶감을 한입 베어 물면, 기다림의 맛이 느껴진다. 겉은 쫀득하고 속은 말랑하다. 단맛은 즉각적으로 터지지 않고, 천천히 입 안에 퍼진다. 설탕처럼 직선적인 단맛이 아니라, 여러 날의 밤공기와 햇살이 겹쳐 만든 깊은 단맛이다. 씹을수록 씨앗 근처에서 남아 있는 미묘한 떫은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것마저도 곶감의 일부처럼 자연스럽다. 완벽하게 달기만 한 맛보다, 이렇게 과하지 않은 맛이 더 오래 여운을 남긴다.
곶감은 사계절 내내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은 아니다. 냉동 곶감이 있기는 하지만 제철 곶감에 비하면 맛이 떨어진다. 무엇이든 빠르게 만들고, 빠르게 소비하는 시대에서 곶감은 한철에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율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비효율 속에 오히려 곶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즉각적인 결과를 요구받는 세상에서, 곶감은 기다림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음을 조용히 말해준다.
가끔은 삶도 곶감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서둘러 성과를 내려고 할수록 마음이 상하고, 충분히 말릴 시간을 주지 않으면 깊은 맛이 나지 않는다. 누구나 빨리 달아지고 싶어 하지만, 진짜 단맛은 견딘 시간 끝에서 만들어진다. 곶감이 바람 앞에서 흔들리며 익어 가듯, 사람도 흔들리는 시간을 지나야 자기만의 맛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직장에서 신입 때는 언제나 바쁘고 초조한 느낌이었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았다. 매일 새로운 일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것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눌려 있었다. 그때의 나는 마치 빨리 단맛을 내어 인정을 받기 위해 달려왔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숙성’이라는 개념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숙성은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성장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어떻게 나만의 방식으로 소화할 것인지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초반에는 너무 급하게 달려서 중요한 것들을 놓쳤다. 사람들과의 관계, 나만의 리듬, 내 몸과 마음의 건강까지. 그렇게 지나쳐버린 것들이 나중에는 돌아보니 중요한 부분들이었다.
예전처럼 매 순간을 급박하게 여기지 않고, 나만의 페이스를 찾으려 노력했다. 업무의 속도도 중요하지만, 그 속도에 내가 갇히지 않도록 조절하는 법을 연습했다. 하루하루가 급박하고 쏜살같이 지나가지만, 그 속에서 여유를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숙성은 단순히 빠르게 진행되는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어떻게 정리하고, 어떻게 균형을 맞추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곶감 하나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다 보면,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완성시키는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곶감은 달다. 그 달콤함 속에는 겨울 바람과 햇살, 말없이 견뎌낸 시간과 사람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곶감을 먹으며, 조금 느려도 괜찮다는 위로를 함께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