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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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성탄절 아침 9시,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지만 공기는 영하 8도의 칼바람을 품고 있었다. 두꺼운 방한복과 털모자, 마스크로 중무장한 채 눈만 내놓고 풍덕천 산책에 나섰다.
2년 전, 85세의 나이에 위암 수술로 80%의 위를 떼어 내고 83kg이었던 몸무게가 63kg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산책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이자 삶을 되새기는 의례가 되었다.
퇴원 한 달 후, 홀로 방에서 자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사지가 뒤틀리고 근육이 뜯겨 나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던 그날을 기억한다. 42년생 아내 역시 평생 병치레를 하며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살고 있기에 내 비명은 안방에는 닿지 않는 메아리였다.
겨우 화장실로 기어가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이고 대기하던 큰딸의 도움으로 중앙보훈병원 응급실에 도착해 입원, 하지정맥 수술을 받았다. 그 고통의 시간들이 풍덕천의 차가운 물줄기 위에 겹쳐진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풍덕천의 평화로
내 고향은 경주역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안강역에서 다시 2km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6·25전쟁의 포성이 멈추기 직전인 1953년 봄, 안강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중학교에 들어갔다. 3년 후에 대구로 가서 고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진학하여 법관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아버지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였기에 고학생이 되었다. 그때 4·19 학생 의거가 일어났다. 나는 법전 대신 총을 든 보병 장교가 되었다.
1970년, 서른한 살의 나이에 두 딸을 두고 베트남 전장으로 떠났다. 백마사단 30연대 11중대장으로서 생사를 넘나들며 무공포장과 인헌무공, 월남금성, 화랑무공 훈장을 받고 소령으로 진급, 귀국했다. 함께 갑종간부장교 157기로 임관했던 동기생 황정택 대위는 작전 중에 산화했으나, 나는 살아남아 임진강변에서 휴전선을 지키는 참모 장교로 군인의 길을 계속 걸었다.
그 후 중령으로 진급했으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22년 만에 푸른 제복을 벗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 아내의 말로는 서른아홉 번의 이사 끝에 여기 용인 수지 풍덕천변에 도착하여 마지막 정착지로 삼았다. ‘생거진천(生居鎭川) 사후용인(死後龍仁)’이라 했던가. 청계천을 닮은 풍덕천은 이제 나의 가장 친밀한 벗이 되었다. 공존의 풍경, 살아 있는 생태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모기가 들끓고 오염된 개천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광교산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성복천을 거쳐 풍덕천이 되고 양재천을 지나 한강으로 흐르는 이 길은 생명의 보고다.
강추위에도 얼지 않고 흐르는 물줄기 속에서 백로와 왜가리, 청둥오리들이 합동 작전을 펼치며 피라미 사냥에 여념이 없다. 예전에는 인기척만 나도 날아가던 보초병 청둥오리들이 이제는 산책객의 카메라 앞에서도 의연하다. 인간이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도 아는 것이다. 이곳은 인간과 동물이 평화롭게 오고 가는 작은 천국이다.
몇 해 전 홍수 때, 새끼들을 이끌고 산책로로 피난 왔던 청둥오리 어미, 광교산에서 내려와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너구리 가족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비록 최근 몇 년간 그 모습이 뜸해졌을지라도 이 천변의 생명력은 여전히 강인하다.
다시 올 봄을 기다리며
지난 22일 동지가 지나며 밤은 정점을 찍고 이제 다시 낮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내 몸의 고통과 노년의 고독 역시 이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 섞여 흐른다. 위를 잃고 식사 때마다 구토와 설사로 고생하는 육신이지만 풍덕천의 사냥꾼들이 봄을 기다리듯 나 또한 이 길 위에서 다시 피어날 생명의 계절을 기다린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부지런히 자갈을 차며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살아 있으라” 하는 준엄한 명령처럼 들리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