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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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 배가 흔들린다.
저녁을 먹다 말고 TV 화면 속에 눈길이 머문다. 속수무책 요동치는 배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평형수’가 떠오른다. 배의 균형과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바닥짐, 평형수. 물건을 실으면 그만큼 덜어 내고 내릴 땐 다시 채워 무게중심을 잡는다. 거친 파도를 만나 역경에 처할수록 평형수의 역할은 지대하다.
나의 평형수, 그것은 가끔 너무나 허술해서 비워야 할 때 차 있고 채워야 할 때 비어 있기 일쑤다. 쓸데없는 아집과 오만이 들앉아 있어 새로운 것들을 채울 공간이 없기에 늘 흔들린다. 편견이라는 짐을 미리 채워 버린 탓으로 내 감정에만 충실해 다른 이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균형 잃은 일엽편주가 되어 하루 버텨 내기에 급급하다가 끝내 난파되고 마는 밤도 있다.
신은 결핍과 나머지를 적절히 맞추기 위해 배우자라는 스승을 보내셨단다. 어쩌다 어른이 된 나는 남편으로 하여 단련되고 자식으로 인해 모가 깎이며 진짜 어른이 되어 간다. 자식은 때론 자부심이 되고 가끔은 아킬레스건이 되기도 하며 사랑을 가르치고 인내와 겸손까지도 알게 한다.
제 한 몸 살아가는 것도 힘이 드는 시대라고 한다. 가족이 힘이 아니라 짐이 되는 세상이라고도 한다. ‘각자 알아서 잘 살자. 늙어서도 절대 짐이 되지 않을 테니 너희도 행여 기댈 생각 말아라.’ 두 아들이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되뇌던 남편의 말에 ‘사람 일 어찌 될 줄 모르는데 너무 인정머리 없다’며 타박하던 나. 흔들리는 집안의 어른들을 보며 요즘 들어 그의 말에 자꾸만 머리를 끄덕이고 있는 내 안의 평형수는 과연 안전한 것일까.
균형감이란 늘채 쌓인 조화로움의 산물일 것이다. 언젠가 어느 초등학교 건물에서 보았던 문구가 떠오른다.
‘밝고 맑고 조화로운 인간.’
교훈인 듯한 그 말은 한동안 뇌리에 남아 떠나질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평생 이루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하늘의 명을 알아차리는 나이, 지천명(知天命)을 넘어서며 내게 가장 부족한 덕목이 바로 ‘조화’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모임이나 단체 생활에서 간혹 조화로운 사람을 만나면 보석처럼 귀하게 여겨진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까지 갖추었다면 말 그대로 군계일학(群鷄一鶴), 낭중지추(囊中之錐)인 존재다. 좌도 우도 아닌 중간 어디쯤의 균형 잡힌 관점과 쉬이 달뜨지 않는 평정심으로 깊은 물처럼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 다만 그와 정반대의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부조화투성이인 나다.
더욱이 요 며칠, 감정에 과부하가 걸리는 일이 잦다. 갱년기인지 멋대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언짢은데 의도치 않게 부모 형제의 마음을 중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탓이다. 진실은 늘 존재하기 마련일진대 가까운 사이일수록 바른말을 한다는 건 세상 가장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진실한 게 늘 답은 아니야’ 하며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다 보면 중재는커녕 내 몸 하나 중심 잡기도 힘들 때가 있다. 마음이란 게 늘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상대가 그리 받아들이지 못함에 화가 나고, 어느 편도 녹록지 않아 스스로 고달프기만 한 걸 보면 난 한참 멀었다는 생각도 든다.
하루에도 열두 번 동요하는 감정의 평형을 맞추어 고요한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올까. 아니, 매일 파도처럼 출렁일지라도 부단히 바닥짐을 덜고 더하며 태연한 척 웃으며 사는 것이 인생인 건가.
인간의 삶에 신은 교묘하고도 시의적절하게 개입해 살 수 있는 만큼의 평형수를 맞춰 놓는다고 믿는다. 정신없이 흔들리다가도 어느새 또 중심을 잡으며 삶이 이어지는 걸 보면. 살다 보면 또 살아지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