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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와 삼 남매

한국문인협회 로고 허철욱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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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파릇파릇 돋아나는 생명의 기운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가슴속 깊이 간직한 그리움이다. 산수(傘壽)를 코앞에 두고 가슴속에 오래 묻어 두었던 고모, 큰아버지, 선친, 삼 남매에 대한 그리움 한 줄기 꺼내 본다.

 

“언제나 철들래?”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고모는 그렇게 말했다. 말썽꾸러기 조카 때문에 마음 상한 남동생의 근심 어린 표정을 보고, 고모는 작정한 듯 나를 불렀다. 연로하신 할머니를 뵈러 친정에 들렀다가, 꼭꼭 숨겨 두었던 말을 꺼내듯 나를 타이르며 말했다.
기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 아빠가 너 때문에 속상해하는 걸 더는 못 보겠다”고 했다. 그 말은 어느새 인정 많던 고모의 유언처럼 가슴에 남아 있다. 먼 옛날의 이야기인데도 유독 가깝게 들리는 것은, 가끔 친정에 와서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던 고모의 정이 그리워서다. 고모는 양말이나 내의를 사 오셨다. 내 발에 양말을 갈아 신기며 “발이 많이 컸네”, “딱 맞다”라고 대견해하셨다. 동기간뿐 아니라 조카들까지 살뜰히 챙기던 고모의 너그럽고 고운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고모는 임실 삼계에서 진안 마령으로 시집가 육 남매를 낳고 일가를 이루어 살았다. 마령은 말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금방이라도 히잉거리며 달려 나올 것 같은 마이산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마을이다.
할머니는 고모부를 늘 ‘최새완’이라 불렀다. 최새완이 우리 집에 오는 날이면 집 안은 왁자지껄 분주해졌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이웃의 친척들까지도 큰 손님이 왔다고 인사차 들렀으니 갑자기 문전성시였다. 씨암탉을 잡고 전을 부치고 마당을 쓸고 청주를 사 왔다. 사위가 백 년손님이라는 말을 그때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고모부는 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어떤 사안이든 재단하듯 말하곤 했는데, 동네 아이들은 그를 ‘수염 할아버지’라 불렀다. 그의 수염은 삼국지의 관운장을 떠올리게 할 만큼 위엄이 있었다. 고모부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전주 남문시장에서 미곡상을 운영하던 수완가였다.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손위 매형을 깍듯이 대했다. 매형이 오는 날이면 큰아버지는 바쁜 농사일을 멈췄고, 아버지는 근무일을 조정해 집에 머물렀다. 이발까지 하며 단정한 차림으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여든넷에 작고하신 할머니의 삼 남매는 소문난 의좋은 형제였고 효심 또한 지극했다. 서른 초반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삼 남매를 키우느라 갖은 고생을 하신 할머니였다. 고모는 두 남동생을 끔찍이 아꼈고, 그 우애는 끝내 흐트러짐이 없었다.
여름방학 때였다. 아흔아홉 고개 곰티재를 넘어 진안고원의 고모댁에 간 적이 있다. 반질반질하게 닦은 통나무 마루에 고종사촌들과 둘러앉아 부채질을 하며 수박과 수밀도를 먹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한여름 더위에 친정집 조카가 왔다고 닭을 잡고 호박전을 부치며 고모는 온 정성을 다했다. 마당 한쪽 우물물로 등을 밀어 주셨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등을 스칠 때마다 간지러워 몸을 비틀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그 인자한 손길을 잊을 수 없다.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빛 아래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그때의 곤한 잠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꿀잠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고모는 전주의 다가동에 살았다. 고종사촌들도 전주에서 학교에 다녔다. 고모댁 인근에 집을 마련한 선친은 숙식을 고모댁에 맡긴 때도 있었다. 100m쯤 떨어진 고모댁으로 아침밥을 먹으러 가 벨을 누르고 고종사촌들과 같이 밥상에 둘러앉으면 대식구였다.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향하던 시절은 식욕이 왕성한 청년 시절이었다. 나뿐만 아니고 나와 방을 같이 쓰며 형제처럼 지내던 큰아버지 아들까지 드나들었다. 고모는 본댁 식구들도 많은데 친정 조카들을 둘이나 거느린 셈이다. 웬만하면 거절했을 법도 했건만 따뜻하게 거둔 고모의 온정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서울에서 직장에 다닐 때 고모와 큰아버지, 선친 삼 남매가 내가 살던 관악산 아래 독산동의 누옥을 찾은 적도 있다. 세 분이 하룻밤을 주무시고 가셨는데 세 살배기 내 아이를 무동 태우고 관악산 중턱까지 손을 잡고 올랐던 추억이 아스라하다. 관악산 밑의 난곡에 빽빽이 들어선 집들을 보고 여기는 무슨 동인가 궁금해하며 사람들도 참 많다고 푸념하시던 분들이었다. 모처럼 조카 집에 왔다가 멀리 한강도 보이고 관악구 일대가 훤히 보이니 가슴이 후련하셨나 보다. 지금도 삼 남매가 거실에 앉아 담소하던 사진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선친은 철도원이었고, 큰아버지는 성실한 농군이었다. 고모와 큰아버지는 학교 문턱에도 가 보지 못했고, 선친은 보통학교를 나왔다. 비록 배움은 짧았으나 이들이 삶으로 행한 인(仁)과 예(禮)는 따뜻하고 웅혼했다. 풍족하지는 않았으나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사는 것을 하늘의 뜻으로 알았고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분들이었다. 고모와 큰아버지, 선친은 모두 일흔아홉에 사 년 간격으로 순차적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삼 남매의 소문난 우애만큼이나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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