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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식물 제라늄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희근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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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시들었다고 뽑아내지 말라.”
이는, 집에 다니러 왔다가, 화려한 제라늄 꽃을 보고 욕심을 부리며 화분을 가져간 딸아이에게 한 말이다. 꽃이 지고 누렇게 변한 잎이 떨어지면, 앙상한 줄기만 남은 제라늄의 모습은 죽은 나뭇가지처럼 볼품이 없다. 죽어 가는 줄 알고 그냥 뽑아버리는 이들이 많아서 전화로 뽑아내지 말라고 알려 준 것이다. 붉게 핀 화려한 제라늄 꽃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사자성어가 있다. 화이부실(華而不實)이다. 꽃은 화려하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뜻으로, 겉모습은 그럴듯하지만 실속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대부분 그런 식물들의 꽃들은 향기가 없다. 하지만 개화 기간이 길기 때문에 오랫동안 꽃을 감상할 수 있는 관상용으로 많이 기른다.
제라늄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생물 시간에 선생님은 온실 속의 화분 하나를 가져와서 무엇처럼 보이느냐고 물었다. 잎이 아욱처럼 보인다고 답하자 물을 건너온 아욱이란 의미로 양아욱이라고 알려 주셨다. 가끔 온실 앞을 지나면서 꽃이 핀 모습을 구경할 수는 있었지만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어서 관심 밖의 식물이 되었다. 지금도 또래 친구들에겐 양아욱이란 온실 속의 식물로 통한다.
화훼 기술의 발달로 오늘날 제라늄은 꽃가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양아욱 대신에 제라늄(geranium)이라고 불리지만 꽃의 모양도 가지각색이고 색깔도 빨강 외에 하양, 노랑, 분홍, 연분홍 등 다양하다. 온실 속의 연약한 모습이 아니고 꽃이 필 땐 활착한 관목처럼 보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게다가 겨울철에도 실내에서 관리할 수 있어서 사시사철 꽃을 구경할 수 있다.
매년 따뜻한 봄이 되면 화산동성당 본당 건물 앞 계단에는 교우들을 위해 관상용으로 사다 놓은 붉게 꽃이 핀 제라늄 화분으로 장관을 이룬다. 보는 교우들마다 탄성을 지른다. 그러다가 꽃이 시들면 빈 공간으로 옮겨진다. 며칠이 지나면 그 화분은 텅 비어 있다. 죽은 걸로 간주하고 뽑아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년 돈을 주고 사 온 식물을 그냥 죽이는 행위는 제라늄에 대한 무지의 소치요 또 낭비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잎은 풀과 나무의 가지나 줄기의 끝에 붙어 있는 식물의 영양 기관이다. 광합성으로 양분을 생산하여 식물의 성장을 도모한다. 또 잎은 식물의 얼굴이다. 아름답게 보이도록 꾸미는 미화원이다. 하지만 잎은 자기의 소임을 다하면 스스로 누렇게 되어 떨어진다. 그러나 잎이 없다고 식물이 죽은 것은 아니다. 상사화처럼 잎이 없어야 꽃을 피우는 것도 있고 겨울나무도 있지 않은가?
어느 날 제라늄 화분 하나를 사러 꽃가게에 들렀다. 제라늄을 옆에 두고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종류가 하도 많아서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 고르다가 살며시 가게 주인에게 제라늄을 번식시키는 방법을 물었다. 삽목으로 번식시킨다는 말을 듣고 귀가 번쩍했다. 화분을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단골 이발소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큰 제라늄 화분이 하나 있었다. 사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큰 가지 하나를 잘라서 집으로 돌아왔다. 여러 토막으로 자르고 화분에 꽂고 아침마다 스프레이로 물을 뿌렸다. 며칠이 지났을 때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가만히 흔들어 보았다. 제법 묵직함을 느꼈다. 뿌리가 생긴 것을 직감하고 계속 스프레이를 사용하자 새잎이 돋아났다. 쾌재를 부르며 정성껏 제라늄 화분을 관리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제라늄은 꽃을 피웠다. 붉고 탐스런 꽃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온 집 안을 훤하게 장식했다. 마침내 꽃이 시들었을 때 그것들을 볕이 잘 드는 베란다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어느 날 화분에 물을 주던 아내가 큰소리로 불렀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잎을 보고 제라늄이 보기에 흉하니 뽑아버리겠단다. 어렵게 삽목으로 꽃까지 피운 것을 그냥 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니냐며 설득했다. 실은 TV 방송에서 모 대학 생물학 교수가 제라늄은 잎이 없는 줄기만을 삽목해도 개체가 형성된다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마른 잎만 따냈다.
얼마 후에 제라늄의 줄기에서 파릇파릇한 작은 잎들이 보였다. 마침내 그 잎들이 줄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지자 몇 개의 꽃대가 보였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들지 못하던 꽃대들이 붉은 얼굴을 들어 올리며 훤히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치며 유레카(Eureka)를 외쳤다. 제라늄의 꽃과 잎의 관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라늄은 충절(忠節)의 식물이다. 군(君)인 꽃이 화려한 권좌에서 물러나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인 잎도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군과 신이 자리에서 사라진다고 국가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잠시 무정부 상태가 지속될 뿐이다. 이내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세를 확장하고 새 임금을 옹립하면 ‘그대를 사랑합니다’ 또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라는 꽃말처럼 새롭고 화려한 제라늄 정부가 수립된다. 사시사철 화려한 제라늄 꽃을 구경할 수 있는 이유다.
제라늄은 시들더라도 버리지 않고 잘 관리하면 다시 찬란한 부활의 영광도 체험할 수 있는 식물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독거노인들에게 삶의 희망을 줄 수 있는 소중한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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