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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핀(endpin)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지원(수필)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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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핀은 늘 바닥 가까이 숨어 있으면서도 첼로의 모든 무게를 받아 낸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철 끝 하나가 악기의 울림을 지탱한다는 사실이 문득 새롭게 다가온다.
나는 오늘도 공원길로 천천히 걸어 나간다. 산책 친구가 함께할 때도 있지만, 혼자일 때가 더 잦다. 혼자일 때는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책이나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 한 시간 반쯤 이어지는 이 산책은 내게 하루 중 가장 고요하고 충만한 시간을 선물해 준다. 그러나 요즘은 예전처럼 속도를 내지 않는다. 여유를 가지며 산책길 군데군데 놓인 벤치에 앉아,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나무를 바라보고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귀에 담는 일이 얼마나 좋은지 새삼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속도에 밀려 무릎에서 보내오는 미세한 신호들을 놓칠까 봐서다. 세월을 무시할 수 없는 나이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자전거를 피하다가 넘어졌던 일이 있었다. 예전에 다쳤던 자리라 더 놀랐는데, 다행히 외상은 금세 아물었으나 무릎 안쪽의 불편함은 오래 남았다. 그 여파인지 걸을 때 가끔씩 무릎이 꺾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젠 계단 하나도 조심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병원 가기를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오래 다니던 한의원을 찾았다. 부황을 뜨고 침을 맞자 굳어 있던 통증이 서서히 풀렸다. 두 발로 자유롭게 걷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제야 절실하게 다가왔다. 
몸은 늘 먼저 신호를 보낸다. 아주 미세하게,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우리는 대개 그 신호를 무시한 채 살아간다. 아직 괜찮다는 말로,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핑계로.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고 선언하듯 통증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속도를 늦추고,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된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공원 길 위에서 ‘당신의 저녁에 클래식이 있다면 좋겠습니다’라는 제목의 소리책을 들으며 걷고 있었다. 첼로 이야기가 흐르다 ‘엔드핀’이라는 단어가 불쑥 등장했다. 첼로를 단단히 고정해 주는 지지대, 기울지 않게 흔들리지 않게, 연주자가 가장 편안한 자세를 찾도록 돕는 작은 축을 일컫는 말이었다.
사람에게도 엔드핀이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다리일 것이다. 발목일 것이고, 골반과 척추 아래쪽일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세우기 위해 깊숙이 숨겨 둔 중심 축. 흔들리는 순간, 몸보다 마음이 먼저 휘청거리는 바로 그곳.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축은 단순히 신체의 구조만을 뜻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오래 버텨 온 생활의 리듬, 쉽게 무너지지 않게 해 준 하루의 질서, 혹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나를 나로 남게 해 준 작은 약속들. 그런 것들이 겹겹이 쌓여 보이지 않는 중심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지만, 한 번 흔들리고 나서야 비로소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들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무릎의 통증은 거의 사라졌다. 앞으로는 내 다리를 조금 더 조심스럽게 다독이며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몸의 축이 흔들리면 마음의 축도 함께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첼로도 그렇다. 엔드핀이 조금만 느슨해져도 악기의 균형은 단숨에 무너진다. 사람에게도 그런 축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을 곧게 세워 주는 각자의 내면에 자리한 작은 중심. 첼로의 울림은 엔드핀을 타고 바닥으로 번져 나간다고 했다. 사람 역시 마음을 세상에 전하려면 저런 보이지 않는 통로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늘 눈에 띄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크고 빠르고 분명한 성취들에. 그러나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것은 대개 그런 것들이 아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걷는 산책길, 제자리에 놓인 벤치 하나, 조용히 흐르는 음악처럼 크지 않지만 빠지면 균형이 무너지는 것들이다. 엔드핀이 그렇듯, 삶의 중심은 언제나 낮고 조용한 곳에 있다.
돌아보면, 내 삶의 엔드핀은 늘 숨어 있었다. 자리를 떠난 적도 없고, 나를 지지하는 일을 게을리한 적도 없었다. 나는 때때로 그 작은 축을 확인한다. 혹시 느슨해지지는 않았는지, 어디 금이 가고 있지는 않은지.
내 삶이 울림을 갖고 공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숨은 엔드핀이 오늘도 제자리에 단단히 박혀 있어야 한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존재하는 작은 힘들이야말로 나의 하루와 존재 전체를 균형 있게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지탱하는 작은 힘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생각은 자연스레 더 멀리까지 닿는다. 어쩌면 이런 보이지 않는 힘들이 모여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힘들이 관계를 이루고, 마침내 전체를 어우러지게 하는 힘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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