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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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보이는 신선한 아침빛을 맞으러 간다.
강가로 향하는 지금은 아직 하루가 온전히 열리지 않은 시간이다. 온밤 내 쉼 없이 달려 이곳까지 온 강물은 아침을 싣고 드넓은 바다를 향해 낮은 곳으로 흐르고 있다. 햇빛을 받은 물빛은 강물의 흐름과 반대쪽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어 해가 가까워질수록 그 빛도 점점 가까워지리라.
강물과 흐르는 방향을 같이 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자박자박, 흙길에 흩어져 있는 잔잔한 돌알갱이들이 발밑에서 내는 소리가 규칙적인 박자로 반복되며 리듬을 탄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면 박자도 따라 바뀌며 율동을 더한다.
더디게 오는 아침빛이 가까워질 듯하면서도 그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마음에 이는 조급함을 오늘은 잠시 내려놓으며 강가의 나무 의자에 앉아 기다려 보기로 한다. 갈대 사이로 스미는 바람이 강변의 시간을 서서히 깨운다. 조금씩 강물 위로 흩뿌려진 빛들이 보인다. 아직은 부드럽고 연약한 빛이지만 분명히 하루를 여는 빛이다.
저 높은 곳에서 들리는 비행기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본다. 은빛의 선 하나가 푸른 하늘을 가르며 지나간다. 엷은 새소리, 연한 바람 소리가 더해지며 귀가 순해진다. 멀리서 들려오는 고속도로의 기계음까지도 오늘은 모두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이 그리 매섭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른 시간의 공기가 가진 온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이 먼저 풀렸기 때문일까. 이때만큼은 무엇을 기다리는지에 대한 목적이 옅어지면서 이 기다림조차 이런 상념에 서서히 묻힌다.
등 뒤로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방금 들었던 그 익숙함 때문이리라. 서로 말을 건네지 않아도 같은 아침을 건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이미 한 풍경 속에 들어와 있다.
바람에 몸을 맡긴 강물은 잔잔하고 결 고운 물결이 되어 기슭으로 거슬러 오른다. 부드러운 곡선이 되어 찰랑이며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오래된 자장가처럼 마음을 낮은 자리로 데려간다. 강 한가운데서 자맥질하는 청둥오리가 물 위에 둥근 흔적을 남긴다. 그 원은 천천히 퍼져가며 이 아침이 얼마나 넉넉한지를 보여준다.
도시는 언제나 분주하지만, 이 시간만큼은 그 분주함마저 숨을 고른다. 물가에 가지를 늘어뜨린 버들과 갈대 사이로 작은 새 한 마리가 통통거리며 눈앞에 나타난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꼬리를 까딱이며 쪼르르 이내 저만큼 멀어진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알락할미새인 듯하다. 이름을 알고 나니 풍경이 조금 더 또렷해진다.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이 조금 더 흐른다.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내어 천지에 골고루 나누어 주고, 자연은 그 빛을 받아 저마다의 속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강물도 그 빛을 받아 은빛과 금빛을 섞어 가며 자신만의 색을 만든다. 주위의 모든 것이 그림이며 사방이 화폭이다. 이 순간, 모든 것이 빛나는 시간이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가까워지는 빛. 저 빛들이 정면으로 오려면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기다림마저도 이 아침에는 충분히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으리라.
강의 몸짓은 현란하지 않다. 고운 빛이 내게로 온다. 작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가슴에 스며든다. 평화. 자유. 누군가 정해 준 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이다. 지금은 평화의 시간, 자유의 시간이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며 화사하게 퍼지는 윤슬이 곱다. 그 빛이 마음에 울림이 되어 퍼진다. 강물 가득 울려 퍼지는 그 빛을 천천히 읽는다.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이 마치 금가루를 흩뿌린 듯하다. 유리구슬을 얼마만큼이나 흩어놓아야 이 정도의 빛이 날까. 눈이 부시다. 기계에서 뿜어내는 화려한 불빛에 익숙해진 눈이 이 자연의 빛 앞에서는 오히려 순해진다.
시간은 어느새 한낮을 향해 간다. 그러나 이 강가에서는 시간조차 속도를 늦춘다. 잔잔히 흐르며 빛을 내는 강. 작은 움직임 속에서 빛을 내는 시간이다. 태양과 강이 어울려 사방에 고운 빛을 흩뿌리고 그 속에 조심스레 내 마음도 얹어 본다.
물결에 실린 빛이 점점 다가오며 이만큼 가까워진다. 팔을 뻗으면 손에 잡힐 듯 바로 눈앞이다. 그때, 물결이 “네게도 빛나는 시간이 있었느냐?”고 묻는 듯하다.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말을 잃는다.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찬란했던 순간보다 아쉬웠던 날들이 먼저 떠오른다.
꿈을 향해 달렸던 시간들, 그러나 늘 무언가를 놓치고 지나온 듯한 많은 장면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빛나는 시간은 지나간 어떤 찬란한 순간이 아니라, 지금 이 빛들을 마주하는 이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강물 위에 반짝이다 흩어지는 윤슬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조용히 머무는 시간. 그것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가장 확실한 빛이 아닐까.
하루를 마감하는 즈음의 하늘은 노을빛으로 물들고, 강물도 그 빛에 젖으리라. 아침의 빛과는 또 다른 결의 빛이 강 위에 내려앉을 것이다. 그때에도 나는 오늘처럼 다시 한 번 빛나는 시간을 마주하게 되리라. 강물처럼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잠시 멈추어 바라볼 수 있다면, 누구에게나 빛나는 시간은 이미 곁에 와 있다는 것을 이 아침 강가에서 배운다. 그 가르침을 가슴속에 새긴다.
이 순간, ‘수많은 밤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그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로 시작하는 가곡 <내 맘의 강물>이 떠오른다. 그렇다. 자연의 강을 마주하고 있으니 어느새 한 줄기 마음의 강도 흐른다.
이어서 흥얼거린다. ‘새파란 하늘 저 멀리∼ 구름은 두둥실 떠나고∼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욱마다 맘 아파도∼.’ 빛은 오늘도 소리 없이 강 위에 내려앉아 흘러가는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나를 조용히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