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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봄바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자인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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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떠나기 전 배낭을 꾸릴 때부터 설렘을 동반한다. 누구와 떠나느냐에 따라 마음이 달라지고,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요즘은 여행 문화가 발달하여 시간이 되면 어디든 떠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곳곳을 찾아다니며 즐기려는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지난해 2월 갑자기 통영에 가게 되었다. 정년퇴임 후 노익장을 과시하며 테니스 치던 분들과의 만남이 등산으로 이어지고, 이제는 함께 여행도 하며 좋은 시간을 만들고 있다. 허물없는 사람들과 도란도란 마음 나누는 일은 편안하고 미덥다. 나이가 있어 운전은 포기하고 통영 가는 고속버스에 오른다. 통영에서 장사도와 연화도에 가볼 계획이다. 오랜만에 타보는 고속버스가 이렇게 좋은 줄 미처 몰랐다. 비행기 비지니스석보다 넓은 것 같아 깜짝 놀랐다. 가이드나 다름없는 분이 기왕이면 편하게 다녀오자고 프리미엄으로 예약하셨다고 한다. 어느 모임이나 앞에서 애쓰는 분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 되겠다.
남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리조트에 여장을 풀고 다음 날 아침, 장사도 행 유람선에 오른다. 멀리 장엄한 일출을 머금은 바다가 반짝이더니 이내 붓방아를 찧어댄다. 나는 급히 선상으로 나가 바다를 관찰했다. 햇살은 바다라는 도화지 위에 분홍색 물감을 풀어 둥둥 떠다니는 꽃잎을 만들어 내느라 분주하다. 본인 작품에 몰두한 모습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그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사람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듯, 바다도 햇살을 만나 찬란한 윤슬로 반짝거린다.
아침 시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 바다 한가운데서 펼쳐진다. 벅찬 감정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연분홍 무대 위에서 칼춤 추듯 빛나는 잔물결은 바삐 움직일 뿐 멈출 생각이 없다. 출렁이는 연출이 장관이다. “와, 이런 바다는 처음이야” 흥분한 목소리가 바다 위를 뛰어다닌다. 통영의 아침 바다는 경탄의 연속이었다. 드디어 천혜의 동백섬이라 불리는 장사도에 도착한다. 섬은 자연경관이 빼어나 한려수도의 정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해상공원이다. 언덕을 오르는데, 풀기 없는 동백꽃이 듬성듬성 매달렸다. 아픈 사람처럼 힘이 없어 보인다.
많은 꽃이 섬을 뒤덮었을 것으로 알았는데, 2월에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조금 늦게 왔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일지만, 그 나름의 자연미가 흐른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일을 꼬투리 잡는 건 아니지 싶다. 자연도 휴식 기간이 있어야 다음 생을 준비하는 것이리라. 장사도는 일제강점기에 한 공무원이 섬 이름을 등록하다가 ‘누에 잠(蠶)’이 쓰기 어려워 ‘길 장(長)’에 ‘뱀 사(巳)’를 써서 장사도가 되었다 한다.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인위적인 조형물도 많아 손녀와 함께 왔으면 좋았겠다 싶다.
예전에 학교 운동장이었을 법한 넓은 공간에 수백 년 된 분재들이 울퉁불퉁한 자태를 뽐내며 나열되어 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쳤을 법한 작은 종은 지나는 사람 손에 이끌려 소리를 낸다. 작지만 울림은 크다. 이 종소리에 학교로 모여들었을 아이들은 어른이 된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안을 들여다보니 협소해서 몇 명이 배웠을까 궁금해진다. 주민이 살던 집을 현대식으로 재현한 작은 집에는 예전 시골 부엌에서 보았던 무쇠솥과 항아리, 장작, 지게 등이 놓였다. 툇마루에는 사기요강, 다듬잇돌, 방망이 등도 주인을 잃었다.
창호지를 바른 창살문을 보니 시골 생각이 절로 난다. 마루에 잠깐 앉았는데, <섬집 아기> 노래가 흘러나온다. 손녀에게 자장가로 불러주었던 노래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듣기만 해도 울컥한다. 저 멀리 다도해의 작은 섬들도 노랫소리 듣고, 생각에 잠긴 듯 고요하다. 손에 잡힐 듯한 작은 섬들이 가까이 혹은 멀리서 장사도를 지키는 파수꾼 같다. 두 시간 걸린 여정, 어느새 선착장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포만감이 일듯, 충만함이 스며든다.
일행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우리의 삶도 통영의 아침 봄바다처럼 분홍의 윤슬로 반짝이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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