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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무덤(筆塚)

한국문인협회 로고 문영오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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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홍 시인은 어느 회고담에서 ‘시농(詩農) 5년’ 이 단어를 2번이나 사용한 적이 있다. 시 짓는 농사를 5년간 지속해 왔다는 뜻이리라.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도 이를 빙의해서 ‘필농(筆農)’이란 단어를 써 본다. 지리한 시간. 그래도 나는 나날이 즐겁기만 하다.
당나라의 서성(書聖) 구양순(歐陽詢)의 일화. 붓 무덤 이야기는 현대인이 들으면 우직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의 이런 노력이 쌓이고 또 쌓였기에 당신 글씨의 예경(藝境)을 성인의 경지까지 오르게 했으리라.
오늘날 글씨를 배워 왔던 선배 서예인 치고 구양순의 「예천명(醴泉銘)」을 임서(臨書)해 보지 않은 서예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획 한 획의 정치성(精緻性)과 엄밀성, 이 획들이 모여서 이룬 구성의 치밀성은 그저 감탄사만 있을 따름이다. 이런 탓으로 모든 선배 서예가들의 수업 교과서 구실을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다. 연습에 연습을 지속한 결과 닳아 버린 붓을 쌓아 두었더니 무덤을 이루었다는 일화. 해서 내 또한 당신을 만고의 스승으로 추앙하고 있다.

 

처음 유럽 여행을 가는 곳마다 느꼈던 절망과 공포. 혹자는 이 같은 나의 자세를 두고 사대주의자로 폄하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단연코 단언하리라 사대주의는 없다. 생존주의만이 있을 뿐이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주의. 더욱이 문화 현상에는 생존주의만이 물처럼 흐르는 현상이 있을 따름이다. 몽당붓을 모아 놓은 붓 무덤. 항심이 빚어낸 결과는 그를 만고불후의 서성으로 우뚝하게 했고, 그가 남긴 명작 「醴泉銘」은 서성으로 도도한 물결이 되어 오늘도 흐른다.
30여 년 전이었을 것이다. 『書通』 ‘명작 순례란’에 싣기 위해 전주 교외에 머물고 계신 석전(石田) 황욱(黃旭) 선생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신께서 회고담으로 들려주신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당신께서는 서예 공부를 심화시키기 위해 금강산 유점사(?)에 머물면서 몇 년간 공부를 지속했는데 당신께서는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절 뒤편 너럭바위에 올라 맹물을 붓에 적셔 그 물이 다 마를 때까지 쓰고 또 쓰고… 이렇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였고, 후생인 내게 진솔하게 말씀을 해 주신 것이었다.
이런 노력 끝에 이룬 서경(書境)은 당신을 근대 서단의 거목으로 우뚝 세워 놓은 것이다. 당신께서는 이 같은 치열한 노력 탓으로 팔목에 병이 들어 팔뚝의 힘이 소진되자 악필(握筆)법을 창안해 글씨 한 자 한 자에 엄청난 힘(필력)과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반석 위에 써댔던 한 획 한 획. 그저 전율감만 전해진다. 그래서 오늘날 황욱 선생님의 서예 작품을 대하고 있노라면 외경과 공포감이 엄습해 온다. 내가 서부 유럽을 여행하였을 때 건축물과 조각 작품에서 받았던 전율과 절망감. 위대한 예술은 그 작품이 어떤 유형이 되었건 최고의 경지는 몸떨림으로 전해지는 법이다. 이 경개가 뒷전으로 밀린 작품은 예술 작품 속에 들지 못한다고 한다면 나의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서예 작품의 드높은 경지에 좌수서(左手書)란 것이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 서단에 이 경지를 구축한 서예가는 검여 선생과 여초 선생 두 분이 대표적인 것이다. 오른쪽 팔뚝에 이상이 생겨 거기서 오는 통증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왼손으로 붓을 잡고 써 내려간 글씨. 우리는 그 작품의 모든 글씨를 접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존경의 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서예 공부에 얼마나 몰두하였으면 오른쪽 팔목이 병이 들어 왼쪽 팔뚝으로 글씨를 쓸 수 있었을까? 경외감만 덮쳐 올 따름이다.
현대 사회를 두고 사회학자들은 3S가 지배한다고 한다. 3S 중 스피드가 들어가 있음은 물론이다. ‘빨리빨리’ 도대체 이렇게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나 같은 늙은이가 생각해 보건대 느림도 한 축이 되어야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니겠는가?
서예는 느림의 미학이다. AI가 지배하는 한쪽에 느림의 미학의 대표격인 서예의 예경. 스마트폰으로 전, 예, 해, 행, 초의 서예 작품을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추사(秋史)가 그리도 주장한 온획이 발현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넘쳐나는 오묘한 예경은 담아내지 못하리라.
오늘날 현존하는 모든 예술 작품의 결정은 ‘느림과 집념과 지속’이 빚어낸 결과물이지 스피드가 빚어낸 결과물은 결단코 아닐 것이다.
구양순의 ‘필총’, 황욱 선생의 ‘양동이 물’, 검여 선생과 여초 선생의 ‘좌수서’의 공통 분모는 항심(恒心)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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