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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자인 까닭

한국문인협회 로고 홍용도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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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의 통화는 언제나 따뜻하다.
정희와 나, 우리는 7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으니 살 만큼 살았다는 여유가 서로에게 작용한 까닭이리라. 그녀와 통화하다 보면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노년기에 누릴 수 있는 확실한 기쁨 중 하나이다. 똑같은 경험을 하고도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서로가 다르다. 그게 얼마나 새삼스러운지, 슬픈 기억도 따스함을 동반하며 환희에 차곤 한다. 우리 둘은 어느새 여고 시절로 돌아가서 지나간 시간 속에 머물며 재잘거린다. 아이들 키우며 살기 바빴을 땐 몰랐던 70대의 여유에 인생의 아름다움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리 넉넉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의식주와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지 않는 오늘이 가장 소중한 날임에 감사하고 마음을 비워 내는 연습의 가치를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에 대해 부담 없이 생각해 보는 것도 즐겁다.

 

약 55∼56년 전, 1970년대에 여고를 졸업한 나는 곧바로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대학 진학률도 낮았고 고등학교도 힘들게 마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가운데 비교적 집이 부유했던 정희는 내가 수학여행을 형편상 포기하자 자기도 수학여행을 포기하고 우리는 학교 도서관에서 함께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 친구였음에도 졸업 후에는 오랫동안 서로가 찾지도 만나지도 못했다. 그만큼 일상의 삶이 각박했을 터이다. 마음속으로만 정희도 어디에선가 잘 지낼 것이며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라 여겼다.
나이 4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어찌어찌 정희와 연락이 닿았다. 정희는 대전에 살고 있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첫 통화가 이루어진 날 정희는 빨리 나를 만나야겠다고 했다. 서로의 일상이 너무 궁금했다. 특히 정희는 내가 못미더워서 걱정이 많았다. 내가 어쩌면 머리 좋고 착하지만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유형의 사람을 만나서 그걸 ‘사랑’이라 믿으며 고생하고 있는 건 아닐까 늘 염려가 따랐다고 했다. 여고 때 정희에게 비친 나는 ‘순수한 사랑’을 갈구하는 로맨티스트였다.
정희가 당장 내일 나를 만나러 진주에 온다고 했다.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그 소식을 남편에게 말하자 남편은 흥분하지 말라며 짐짓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벅찬 가슴을 쓸어내리며 역 플랫폼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이 바로 정희였다. 성인 모습은 상상조차 못 했지만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렇구나 그런 거로구나, 우리는. 남편도 크게 반기며 운전대를 잡았다. 정희와 나는 뒷좌석에서 몇십 년 만에 통화되던 어제 이후의 감정을 이야기하며 한껏 반가움에 겨웠다. 남편의 안내로 촉석루와 진양호를 한 바퀴 돌고 잘 알려진 중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정희는 막차가 예매되어 있었고 대전역에 남편이 마중 나올 것이라고 했다. 연락이 닿자마자 망설임 없이 달려온 정희. 우리는 서로가 흥분을 자제하며 천천히 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동안의 궁금증을 녹여냈다. 아무 연락 없이 지냈어도 서로가 늘 가슴에 지닌 채 살아왔고 잘 살아줘서 그지없이 고마웠다. 행복한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든든한 마음으로 작별했다.
정희가 돌아간 뒤 편지를 보내왔다. 시 형식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푸근한 마음, 내가 마음 부자인 까닭을 알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정희에게로 정희는 나에게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내 친구 용도에게

 

천성이 밝아
언제나 웃는 아이
머리가 좋아
엉뚱발랄 명랑한 아이
심성이 고와
늘 양보하는 아이

 

아∼ 그런데
잔인한 세상이
어여쁜 소녀의 가슴에
화살을 쏘았네

 

피범벅 상처 부여잡고
울며울며 혼자 컸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도 
아물지 않는 상처

 

인생의 찬바람 스칠 때마다 
너무 아파 꽁꽁 싸매
가슴 깊이 묻고 살았네
울면서도 웃는 법을
일찍이 배워

 

가슴엔 설움 가득
두 눈엔 눈물 가득 고였어도 
웃고 있는 모습
슬프도록 아름다워 
한 신사가 품에 안았네

 

이제 그 소녀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내 앞에 있네

 

행복하니?
행복해 보인다

 

그 상처 보듬은 자리 
단단히 여문 그 자리엔 
별빛보다 영롱한
진주가 박혔네

 

여인아, 내 여인아 
그 진주
내 금사슬에 꿰어 
너의 목에 걸어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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