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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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을 한 여자가 반듯하게 누워 있다.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작고 아담한 체구에 피부가 하얗다. 리나는 때밀이 타월로 여자의 발목부터 밀기 시작한다. 여자는 마사지를 받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리나를 찾아온다. 다른 세신사를 마다하고 그녀를 찾는 이유는 팔에 힘이 좋아서라고 했다.
“돌아누우세요.”
리나는 여자의 왼쪽 발목을 살짝 치면서 말한다. 단골손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팔에 힘을 주고 정성을 다해 때를 민다. 때를 다 밀고 나서 여자의 몸에 오일을 바른 다음 마사지를 시작한다. 등과 허리를 꾹꾹 눌러주고 뱃살을 세게 주물러준다. 리나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들이 여자의 몸 위로 뚝뚝 떨어진다. 옆에서 다른 손님의 때를 밀던 동료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노려본다. 하지만 리나는 동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몸에 우유를 듬뿍 발라준다. 전신에 우유를 바른 하얀 여자의 몸이 털깎기를 막 끝낸 한 마리의 양을 떠올리게 한다.
포 카레카레 아나 / 나와 이오로토 루아 / 위티 아투코헤 히네 / 마리노아나 에 / 에히 네이 / 로키 마이라….
힘든 마사지가 끝날 때쯤이면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게 무슨 노래예요?”
여자가 궁금하다는 듯 리나를 쳐다보고 묻는다.
“뉴질랜드 민요예요.”
마지막으로 여자의 양쪽 어깨 근육을 꾹꾹 눌러주면서 대답한다.
“뉴질랜드 민요? 우리나라 연가하고 음정이 비슷하네. 비바람이 부는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하는 노래가 있거든요.”
여자가 재미있다는 듯 리나를 보고 웃는다.
여자의 말에 대답해 주다 보니 로토루아 호수의 맑고 푸른 물결이 생각난다. 어릴 적 동생들과 수영을 하며 놀던 곳,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도요새 소리가 들리던 곳, 유칼립투스 향기가 바람결에 날아오던 곳. 로토루아…. 리나는 나지막하게 로토루아를 응얼거려 본다.
“수고했어요.”
마사지를 끝낸 여자가 만족한 표정으로 세신대 위에서 내려온다.
“안녕히 가세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요금은 선불로 받았기 때문에 인사만 친절하게 하면 된다.
한 차례 손님들이 빠져나간 지하 목욕탕은 동굴 속처럼 한산하다. 리나는 목욕탕 안을 한 바퀴 돌면서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정리한다. 대야와 바가지를 차곡차곡 쌓아 놓고 플라스틱 의자도 한곳으로 모아둔다. 대기 손님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탕 속으로 풍덩 몸을 던진다. 두 팔로 물을 휘휘 저어 가며 어린 시절처럼 물속에서 헤엄을 친다. 파도처럼 물이 일렁이고 부드러운 물살이 몸을 감싸면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옥련 언니는 휴게실 벽에 기대 서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옥련 언니는 요즘 목욕탕 청소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옥련 언니에게 대놓고 말할 입장이 못 된다. 리나에게 마사지 일을 가르쳐준 사람이 옥련 언니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바닥을 닦고 썩은 냄새가 올라오는 하수구만 뚫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리나는 물이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바다와 호수를 보며 자란 탓인지 물을 보면 마음이 평온했다. 남편과 헤어지기로 마음먹고 숨겨두었던 비상금으로 간신히 얻은 집이 옥련 언니네 문간방이었다. 어린 딸아이를 안고 이 동네로 이사한 지가 3년 전이었다.
손님이 없는 시간, 1층으로 올라가 벽에 걸린 TV를 바라본다. TV에서는 리나가 좋아하는 연속극이 재방송되고 있다.
“리나, 달걀 먹어.”
동료가 평상에 앉은 채 불가마에서 구워낸 달걀을 권한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다. 리나는 동료 옆으로 가서 앉으면서 달걀을 집어 든다. 적갈색을 띠는 달걀은 마오리족들이 땅속에서 구워 먹던 항이 음식과 닮았다.
“도대체 왜 그래, 내 말 못 알아들어?”
역시나 동료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알고 있어.”
“그렇게 땀 빼가며 일하지 말랬잖아. 리나 때문에 내 손님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마오리족들은 원래 그렇게 미련스럽고 고집이 세?”
“그렇지만 대충 일을 하고 돈을 받고 싶지는 않아.”
리나는 동료의 얼굴을 쳐다본다.
마오리족이 미련하다는 말에 화가 나려고 했지만 대꾸하지 않는다. 며칠 전에도 동료는 적당히 하라며 그녀에게 훈계를 주었다. 동료가 목욕탕 사장의 친척이라는 사실을 리나도 알고 있다.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으면 알아서 해!”
동료가 달걀껍데기를 탁 소리가 나도록 쟁반에 던지고 일어선다. 리나는 말없이 달걀껍질을 까서 입 안에 넣고 꼭꼭 씹어 삼킨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가끔 자식들에게 이 말을 했다. 갈색을 띠는 달걀을 보면서 리나는 오래전 여동생과 먹었던 쿠마라(고구마)를 떠올린다.
뉴질랜드 북섬에 있는 타라나키, 리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곳에는 원주민인 마오리족들이 모여 살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마오리족이며, 뚱뚱한 엄마 역시 마오리족이다. 엄마는 나이가 들고 살이 찌면서 어깨가 더 우람하게 벌어지고 골격이 커져 언뜻 보면 남자처럼 보인다. 마오리족들도 도회지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대부분이 키위 농장에서 일을 하거나, 임금이 낮은 직종에서 일을 하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는 들판에서 양을 길렀다. 남의 땅을 빌려서 양을 길렀기 때문에 땅값으로 일 년 수입의 절반을 주어야 했다. 그나마 아버지의 성실함 덕분에 해마다 양의 수가 늘어났고, 큰 부자는 아니어도 리나네 가족은 걱정 없이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한 명과 남동생 하나, 리나를 포함해 모두 다섯 식구였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자주 수영을 나갔고, 빨랫줄에는 항상 젖은 수영복들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리나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죽었고, 아버지가 죽고 나자 모든 것이 엉망이 돼 버렸다. 한동안 어머니는 당신에게 책임져야 할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양의 마릿수가 줄어들었고, 집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리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뉴질랜드산 키위와 빵을 샀다. 우유를 냉장고에 넣고 살며시 방문을 열어본다. 은지가 눈을 뜬 채 조용히 누워 있다.
“엄마 왜 이제 와?”
딸아이가 반가움에 투정을 한다.
“미안, 우리 예쁜 딸 잘 잤지?”
리나는 아이를 일으켜서 목욕탕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이미 유치원에 갈 시간이 늦었다. 금방 노란 스쿨버스가 아이를 태우러 올 것이다.
“응 있잖아, 안집 언니가 빵이랑 우유 줬어요.”
아이가 비누 거품 때문에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린다. 리나는 아이를 씻긴 다음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준다. 얼굴이 둥글고 몸집이 통통한 은지는 친할머니보다 외할머니를 많이 닮았다. 겨우 여섯 살 먹은 여자아이지만 제 또래의 남자아이들보다 덩치가 큰 편이다. 남편의 피부와 모습을 닮은 아이를 얼마나 원했던가. 하지만 아이는 리나와 같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다. 갓 태어난 손녀를 바라보던 시어머니의 떨떠름한 표정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기뻐하거나 웃지도 않았다. 리나는 아이의 머리를 빗겨 준 다음 가방을 어깨에 매준다.
“엄마, 오늘 유치원 안 가면 안 돼요?”
“안 돼! 가서 친구도 사귀고 한글도 배워야 해.”
단호하게 말하고 나서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빌라 앞 도로에는 노란 버스가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리나는 자리에 앉은 은지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10년 전, 오클랜드 공항을 출발해 한국으로 오던 날, 여동생은 엄마와 함께 공항까지 따라 나왔다. 바다 건너 먼 나라로 떠나는 딸을 배웅하기 위해 엄마는 처음으로 공항이라는 곳에 나왔다. 출발 시각이 가까워지자 엄마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코에 카 파이(잘 살아야 된다).”
엄마가 리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그녀는 눈물을 감추며 엄마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티노 파이(좋을 거야).”
여동생이 언니의 등을 어루만졌다.
“카 키테 아노(안녕).”
리나는 여동생과 엄마의 손을 놓고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 비행기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12시간 동안 짙푸른 바다 위를 날아갔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리나는 불안감에 떠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화장실을 드나들면서 보냈다. 손수건만 한 현창으로 밖을 내다보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리나는 엄마가 건네준 와이치리 여신상을 가슴에 꼭 안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드디어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고, 리나는 캐리어를 끌고 한국 땅에 발을 내디뎠다. 그때 그녀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과연 그 사람은 공항에 나와 있을까? 물론 약속은 했지만 만약 나와 있지 않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리나는 생각만 해도 무섭고 불안했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불안한 마음에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도대체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았지만 마중 나온 사람들 틈에 동진 씨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리나는 그 자리에 서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오래 울렸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혹시 마음이 변해버린 건 아닐까? 그녀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처럼 겁에 질려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저만치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오느라고 고생 많았지?”
그가 양팔로 리나를 안아주면서 말했다. 너무 감격한 나머지 리나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방으로 들어온 리나는 오랜만에 옷장 문을 열고 맨 아래 칸 서랍을 열어본다. 오래전 뉴질랜드에서 카와를 만났을 때 입었던 옷이 가지런하게 들어 있다. 그 옷을 보고만 있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청색 스커트와 핑크와 베이지가 섞인 체크무늬 남방, 그리고 노란 머리핀…. 20년도 더 지난 옷이지만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뉴질랜드에서 가방을 쌀 때도 이 옷들을 맨 먼저 가방에 챙겨 넣었다. 가끔 사는 일에 지치고 기분이 우울한 날이면 이 서랍을 열어보곤 했다. 가만히 앉아 이 옷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은 빠르게 그 시절로 돌아가고, 퍼석하기만 하던 가슴이 촉촉해지곤 했다. 어느새 자신 앞에 우뚝 서 있는 그의 듬직한 어깨와 그윽한 눈길로 리나를 바라보던 카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태양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고, 하얀 바다 안개에 가려 야트막한 평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맞은편의 방목장이 희미하게 보였다. 리나는 아침 이슬을 밟으며 천천히 초원으로 나갔다. 매애! 매애! 양들이 울어대자 늙은 양치기 개가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안개가 빠르게 옅어지면서 나지막한 초지에서 풀려 나가는 광경에 리나는 잠시 매료되어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카와가 걸어오고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카와는 아버지가 죽고 난 뒤 가끔 리나네 양을 몰아주었다.
“힘들지?”
카와는 젖은 소맷자락으로 빨개진 코와 축축한 턱을 비비며 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갈색으로 그을린 다리에 양말도 신지 않았고, 축축하게 젖은 짧은 바지 차림이었다. 어느새 태양이 솟아오르고 안개 속에서 커다란 빛의 점들이 반짝였다. 카와가 수줍은 표정으로 조그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열어보니 노란 리본 모양의 머리핀이었다. 리나는 머리핀을 꺼내서 머리에 꽂아 보았다.
“티노파이(예뻐)?”
리나가 웃음을 지으며 카와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예뻐 보이고 싶어?”
카와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물어본 건데.”
리나는 주먹으로 카와의 가슴을 툭 치는 흉내를 냈다.
“예뻐서 그래.”
카와는 리나가 내민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를 해주었다. 손키스를 하고 나서 부끄러운지 갑자기 돌아서서 초지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안개가 모두 걷히고 넓은 초지 위에 하얀 양들이 부채살처럼 퍼져 나갔다.
“카와….”
리나는 노란 리본 핀을 만지면서 멀어져 가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와는 뒤돌아서 손을 한번 흔들어 주고는 흩어지는 리나네 양들을 몰면서 멀어져 갔다. 매애! 매애! 양 떼들의 울음소리가 넓은 초원에 가득했다. 그때 카와의 나이 고작 열일곱 살 까까머리 학생에 불과했지만, 리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듬직한 존재였다.
리나는 노란 리본을 머리에 한번 꽂아 보고 다시 서랍에 잘 넣어둔다. 리나에게 이 머리핀과 체크무늬 남방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더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모든 것이 막막했다. 밖에 나가고 싶어도 위치를 모르니 나갈 수가 없고 한국말을 못해서 누구를 사귀는 것도 어려웠다. 시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다니면서 물건 사는 법을 배우고, 길도 조금씩 익혔다.
“아무것도 할 줄 몰라서 미안해요.”
설거지를 끝내고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괜찮아.”
리나보다 일곱 살 많은 남편은 다 괜찮다고 말했다. 금방 좋아질 거라며 등을 다독여 주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다정하게 잘 해주었고 그녀도 한국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리나는 망설임 없이 뉴질랜드에서 모아 온 비상금 거의 다를 남편에게 맡겼다. 은행 일도 모르고 가는 길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온 지 4년이 지나자 한국말도 어느 정도 하고 생활에도 크게 불편을 못 느꼈다. 그리고 어느새 아이 엄마가 돼 있었다. 아장아장 걷는 딸아이를 보면서 리나는 자신이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리나는 한국어를 배우러 문화회관에도 나갔다. 선생님이 칠판에 써 놓은 단어를 열심히 따라 썼다. 엄마, 사랑해요, 바다, 그리움, 문화회관에는 한국어 말고도 배우고 싶은 프로그램이 많았다. 한국 요리, 한국 문화, 뭐든지 빨리 배우고 익히고 싶었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수강료를 내지 않고 무료로 가르쳐 주었다. 선생님은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서 문장을 만드는 법과 그 뜻을 설명해 주었다. 보고 싶어요, 그리워요, 리나는 자신이 쓰고 싶은 단어를 연결해 보았다. 한국어는 글자가 같아도 뜻이 다른 것이 많아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마오리어는 다섯 개의 모음(a e i o u) 아에이오우와 영어와 비슷한 여덟 개의 자음(h k m n p r t y)으로 돼 있어서 배우기가 쉽다.
여고생이 된 첫 여름방학 어느 날이었다. 고목으로 자란 유칼립투스 나무가 향기를 내뿜고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리나와 카와는 나무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야트막한 산자락에는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저만치 보이는 바다에는 파도가 일렁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손을 맞잡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리나는 체크무늬 옷이 참 잘 어울려.”
카와가 고개를 돌리고 리나를 바라보았다. 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왼쪽 팔을 들고 체크무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옆에 서서 달콤한 눈길로 리나를 바라보던 카와가 갑자기 리나를 껴안고 키스를 했다. 자신을 꼭 껴안은 카와의 두 팔에서 근육질의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리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카와의 가슴에 안겨 따뜻하고 포근함을 느꼈다. 키스를 하고 난 카와는 잠시 리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양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짧지만 황홀했던 그 순간을 리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리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리나의 행복한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조금씩 변해 갔다. 남편은 집안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밖에서 자고 오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도 시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 무심했다. 리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언제 들어와요? 오늘은 은지가 하루 종일 열나고 아팠어요.”
처음에는 애교 있는 목소리로, 그 다음은 애원조로, 혹은 조금 화난 것처럼.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멋대로 행동했다. 리나는 남편이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처음에는 사업을 한다고 했다가 어떤 때는 포클레인 기사라고도 했다. 자세히 따지고 물으면 “너는 알 필요 없어!” 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그녀를 무시했다. 리나는 점점 지쳐 갔고 우울하게 보내는 날이 많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아이를 거칠게 대하면서 미워했다. 미워하는 이유는 아이가 아빠를 닮지 않고 외할머니를 닮았다는 것이다. 남편은 그런 문제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참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나날이 이어졌지만 리나는 눈물을 흘리거나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참기 힘들었던 것은 남편이 딸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남편은 아이의 생일날에도 선물이나 케이크를 사오는 법이 없었다. 어쩌다 집에 있을 때조차도 아이와 놀아주지 않았다. 아이가 사랑스럽고 작은 손을 내밀며 아빠에게 안기려고 했을 때도, 남편은 냉정하게 아이를 밀어냈다. 그의 냉정한 표정과 차가운 숨결이 아이를 완전히 얼려버리는 것 같았다. 아이는 점점 할머니와 아빠를 무서워했다. 시간이 갈수록 말수가 줄어들고 표정이 어두워지는 은지를 보면서 리나는 그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진다. 더 이상 그냥 집에 있을 수가 없다. 리나는 우산을 찾아들고 집을 나선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얼마 전에 은지가 반 친구들에게 놀림당했던 일이 생각난다. 은지는 크면서 엄마를 꼭 닮아 가고 있다. 적갈색 피부와 튼실한 몸매 유난히 발달된 엉덩이.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친구들이 나보고 아줌마래요.”
“괜찮아, 너보다 더 뚱뚱한 친구도 있잖아.”
리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달래주었다. 은지는 성격이 새침하고 사교성이 없는 편이라 친구들과 잘 사귀지 못했다. 가끔 유치원에 가기 싫다며 등원 시간에 투덜거리기도 했다. 오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에서 내리는 아이의 표정이 어두워 보인다.
“은지야, 오늘 유치원에서 재미있었어?”
아이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친구들이 나하고 안 놀아줘요.”
은지가 운동화를 신은 발로 바닥을 툭툭 차며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은지야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갈까?”
“좋아.”
그제야 아이의 얼굴이 밝아진다. 아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리나는 은지가 좋아하는 떡볶이집으로 들어간다. 떡볶이집에는 먼저 온 손님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떡볶이를 먹고 있다. 학생들이 서너 명씩 몰려와 수다를 떨며 자리에 앉는다. 리나는 떡볶이 3인분을 시키고 나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딸아이를 바라본다. 은지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밝아 보인다. 어떻게 해야 은지를 밝고 자신감 있는 아이로 키울 수 있을까. 리나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갈 일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남편은 양육비라는 것도 한 푼 보내주지 않는다. 얼마 전에도 전화를 해 보았지만 아예 받지도 않았다.
“은지야, 티브이만 보지 말고 숙제해야지.”
“이따가 할 거예요.”
은지가 여전히 티브이를 보면서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럼 우리 숫자 공부할까? 아이가 펼쳐 놓은 페이지를 보니 유치원 수학인데도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엄마가 가르쳐줄 수 있어요?”
아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본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보자.”
리나는 일을 핑계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치이, 엄마는 숫자 공부도 모르고, 국어도 잘 모르고….”
리나는 아이의 공부가 자꾸만 뒤로 밀리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 오늘부터 당장 학원에 보내고 싶지만 비용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한국 엄마들은 아이 공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학원도 여러 곳에 보내고 방문 과외도 시킨다고 한다. 리나는 엄마들과 잘 어울리지 않아서 과외를 어떻게 하는지 정보도 없고, 준비물도 챙겨주지 못할 때가 있다.
저녁 설거지를 미뤄 놓고 리나는 방으로 들어가 아이의 머리맡에 앉아본다. 막 잠이 든 듯한 아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린다. 책가방을 열어 알림장을 꺼내 본다. 학교에서 필요한 준비물을 적은 글자가 빼곡하다. 촉촉이 모래, 공기 지점토, 바람개비 재료 등 더듬거리며 읽어 보지만 그 물건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는 것도 있다. 유치원도 쉽지 않은데 앞으로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어떻게 가르칠까? 곤히 잠든 딸아이 옆에 누우면서 리나는 긴 한숨을 내쉰다.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리나는 키위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키위 따는 일이 없을 때는 양털 깎는 일을 했다. 양털 깎는 일은 어렵지는 않았지만, 빠른 시간에 여러 마리를 깎아야 수입이 되었다. 너무 서두르다 기계에 손을 다치기도 했고, 늘 먼지와 양털을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다. 동생들은 아직 어렸고 엄마는 몸이 아팠다. 리나는 양털 깎는 일을 그만두고 관광객을 태우고 열심히 카누를 저었다. 하지만 수입이 많지 않아서 네 식구가 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카누 젓는 일이 익숙해질 무렵, 손님으로 탄 한국 남자가 마오리 언어로 말을 걸어왔다. 그는 리나 옆에 앉아서 카누를 저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그는 누나가 뉴질랜드에서 한식당을 하고 있다며, 취직하면 지금보다 수입이 훨씬 많다고 했다. 그는 자주 카누를 타러 왔고, 어느 날 동진이라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입력해 주면서 꼭 연락을 하라고 했다.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던 카와는 대학생이 되어 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카와가 없는 고향은 텅 빈 세상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리나는 카와의 깊은 눈동자와 듬직한 모습이 그리웠다. 하지만 카와는 방학 때가 되어야만 만날 수 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방학이 되어야 고향에 내려왔다. 방학이 되고 카와가 오는 날이 가까워지면 리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이리저리 매만지며 떨리는 마음으로 카와를 기다렸다. 드디어 카와가 고향에 내려오는 날, 리나는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유칼립투스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멀리서 리나를 발견한 키와가 달려와 그녀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대학생이 된 카와는 훌쩍 큰 키에 지적이면서도 듬직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그의 팔과 어깨에서 우람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리나는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빨개졌다.
“리나 잘 지냈어?”
오랜만에 만난 카와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럼 잘 지냈지.”
리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아직도 어린아이네.”
카와는 짓궂은 표정으로 리나를 놀렸다. 리나는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이거 먹어봐.”
카와는 예쁘게 포장된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상자 속에는 리나가 처음 보는 하트 모양의 초콜릿이 가득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벤치에 앉아서 초콜릿을 먹었다. 초콜릿을 먹으면서 리나는 카와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초콜릿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방학 동안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유칼립투스 나무 아래서 자주 만났다.
하지만 그렇게 몇 번 만나다 보면 방학은 금방 지나가 버렸다. 리나는 방학 기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방학이 끝나면 카와는 또다시 도시로 떠났다. 대학에 입학하여 한창 신입생 시절을 즐기던 카와는 점차 연락이 뜸했고, 직장 일로 바빴던 리나도 연락하는 일을 잊고 살았다.
동진 씨의 누나가 한다는 식당은 외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늘 북적거렸다. 소스를 만들고, 고기를 구워 나르고, 테이블을 닦고, 리나는 하루 종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좀 가서 쉬어, 내가 할게.”
동진 씨는 리나가 힘들 때마다 눈치껏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 리나는 그에게 믿음이 갔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는 식당 주인인 누나에게 사귀는 여자라며 그녀를 소개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식당 주인은 친누나가 아닌 친척이었다. 같이 식당일을 도우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무거운 음식 그릇은 모두 그가 옮겼고, 일이 끝나고 밖에서 단둘이서 만나기도 했다. 그는 일하다가 다친 리나의 손가락을 잡고 정성스럽게 밴드를 붙여 주었다. 어릴 적 엄마 말고는 리나의 상처를 그렇게 보듬어 준 사람은 그 남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한국에 가면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고 수입도 좋다며, 리나에게 같이 가자고 졸랐다.
리나는 작은 서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여다본다. 남동생은 엄마의 오른편에 서 있고 리나는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채 왼쪽에 앉아 있다. 여동생은 자신의 뺨을 엄마 얼굴에 갖다 대고 활짝 웃고 있다. 자식들에게 둘러싸인 엄마는 웃고는 있지만, 눈에는 슬픔이 가득해 보인다. 한국으로 떠나오기 일주일 전, 집 앞에 있는 바다를 배경으로 가족들이 찍은 사진이다. 리나는 가끔 이 사진을 꺼내 들여다보곤 한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파란 하늘 아래 빨래를 너는 엄마의 모습과 그 옆에서 뛰어놀던 동생들이 생각난다. 그럴 때 엄마는 누가 다칠까 봐 빨래를 널면서도 동시에 아이들을 살폈다.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집 근처의 푸른 나무들과 로토루아 호수 위에 비치던 나무의 그림자까지도 보이는 것 같았다. 멀리 만년설로 뒤덮인 마운틴 쿡도 보이고, 넓고 파란 초지 위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들도 보였다. 길 양쪽으로 고목으로 자란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서 있고, 그 앞을 지나갈 때면 유칼립투스 향이 진하게 풍겼다. 유칼립투스 나무 기둥을 보면 어느새 카와가 생각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된 카와는 도시에 살았고, 때문에 만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카와에 대한 리나의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리나는 단 한 번도 카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속으로는 좋아하고 있으면서, 어쩌면 카와보다 리나가 더 그를 사랑하면서도 왜 끝내 그 말을 못했는지…. 그때 적극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지금 뭐가 달라졌을까….
직장인이 된 카와는 대학 시절과는 달랐다. 한결 굳게 다문 입술과 강렬함이 깃든 눈동자를 가진 건장한 남자였다. 명절이라 고향에 온 카와를 겨우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서로 맥주잔을 부딪쳤다. 카와는 그날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어바넛 캔 맥주를 많이 마셨다.
“잘 지냈지?”
카와가 차분한 모습으로 맥주를 따라 주면서 물었다.
“응. 많이 기다렸어!”
맥주잔을 들면서 리나는 카와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웰링턴에서 살 것 같아.”
카와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은 북섬에서는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도시였다. 리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리나는 끝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술기운이 돌고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날이 어두컴컴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마지막 만남이 되어 버린 그날, 카와가 리나를 안아주면서 말했다.
‘카와랑 같이 있고 싶어.’
그때 리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고향에 내려온 카와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로 다시는 카와를 만날 수 없었다. 조용히 시간이 흘렀고, 얼마 후 같은 직장에 다니는 여성과 결혼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리나는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었지만, 카와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결혼생활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리나는 카와를 잊지 못했고, 그 행복했던 순간은 지금도 또렷하게 가슴에 박혀 있다.
카와는 지금 결혼한 여자와 잘 살고 있을까? 아이도 낳았겠지…. 리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은지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 목욕탕으로 출근을 한다. 옥련 언니는 오늘은 저녁 근무라며 집안 청소를 하고 있다.
“은지 오면 내가 봐줄 테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
옥련 언니는 친이모처럼 은지를 잘 챙겨준다. 은지도 이모라고 부르며 잘 따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마워요. 언니.”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목욕탕으로 가는 길 담장에는 빨간 장미꽃이 예쁘게 피어 있다. 로토루아 호수에는 지금쯤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다. 리나는 하얀 눈이 내려 있을 고향 타라나키와, 카와가 웃던 모습을 떠올리며 목욕탕이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목욕탕 안에는 알몸을 한 여자들로 가득하다. 사람들 소리와 물소리가 섞여 귀가 웅웅거린다. 약쑥으로 우려낸 열탕에는 여자 서너 명이 앉아서 반신욕을 하고 있다. 리나는 옷을 갈아입고 세신실로 들어간다. 손님의 때를 밀고 있는 동료 옆으로 가서 손님이 걸어 놓은 열쇠를 집어든다.
“6번 손님.”
리나는 큰소리로 번호를 부른다.
“리나, 사장님 전화 받았어?”
“아니, 사장님이 왜?”
“아직 모르고 있구나! 일할 사람 구했다던데.”
동료는 할 말을 했을 뿐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하던 일을 계속한다. 어쩌면 잘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잠시 현기증이 일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리나도 이곳을 떠나 푸른 바다 위를 훨훨 날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날개만 있다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타라나키로 날아가고 싶다. 하지만 리나는 자신이 날개가 퇴색된 키위 새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올라가 누우세요.”
일주일에 한 번씩 리나를 찾아오는 단골손님이다.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작고 아담한 체구에 피부가 하얗다. 리나는 여자의 발등부터 때를 밀기 시작한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 리나의 손길을 느끼고 있다. 옆에 놓인 세신대 하나는 텅 비어 있다. 기다리지 말고 옆 동료에게 하라고 해도 손님들은 듣지 않는다. 손님들은 리나에게 마사지를 받기 위해 온탕에서 기다리고 있다. 동료는 리나에게 한심한 인간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리나는 동료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 하는 일에 정성을 들이고 최선을 다한다.
“돌아누우세요.”
여자의 왼쪽 발목을 살짝 치면서 말한다.
“여기 세신사 교체한다고 하던데.”
여자가 누운 채로 리나를 쳐다본다.
“네, 사람 구했다나 봐요. 저도 이제 여기서 잘릴지도 몰라요.”
리나의 목소리는 힘이 없다.
“그렇지 않아요. 리나가 성실하다는 거, 우리 오빠도 알고 있어요.”
“오빠요?”
“네, 여기 사장이 우리 사촌 오빠예요.”
절벽으로 떨어지다가 간신히 한 가닥의 줄을 잡은 듯한 느낌이 든다. 휴…. 리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있는 힘을 다해 여자의 몸을 마사지해 준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고마운 건지, 서러운 건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눈앞이 흐릿해진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입술을 꽉 깨물고 때를 밀고 또 민다. 눈물과 땀방울이 뒤섞여 누워 있는 여자의 몸 위에 뚝뚝 떨어진다.
포 카레카레 아나(비바람이 치던 바다)/ 나와 이오로토 루아(잔잔해져 오면)/ 위티 아투코헤 히네(오늘 그대 오시려나)/ 마 리노아나 에(저 바다 건너서)/ 에히 네이(그대만을)/ 로키 마이라(기다리리)….
리나는 어느새 포 카레 카레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