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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한국문인협회 로고 서한경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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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관광버스가 출발을 하고는 어디쯤에서 잠시 멈춤을 했다. 그리고 20대 후반 정도의 남자 가이드가 버스에 올랐다. 남자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마이크를 들고 서서 인사를 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교민 3세’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교민 3세, 나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생각했고 대략 언제쯤부터 정착하게 되었는가를 계산했다. 왠지 섣불리 묻기가 미안해 입을 닫았다. 나는 애호박과 풋고추를 썰어 넣은 된장국과 포기김치 등을 떠올렸다. 겨우 2주가 지난 지금 그것들이 눈물겹게도 그리웠다.
그는 비교적 키가 크고 반듯한 이마에 눈이 컸다. 키에 맞춘 듯 얼굴도 다소는 크고 길쭉했다. 나는 그의 까풀진 두 눈을 바라보며 꽃미남이 되려다 크고 길쭉한 얼굴 때문에 아쉽게도 선을 넘겨 버렸나? 라는 생각을 했다.
“아르헨티나는 한국과의 시차가 12시간입니다. 한국 어디쯤에서 장대를 꽂으면 지금 이곳 어디쯤에 튀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는 살짝 미소를 보였는데 양 입가에 보조개가 팼다. 그는 꽃미남이었다. 양 입가에 패인 보조개가 다소는 크고 길쭉한 얼굴을 꽃미남의 얼굴로 상쇄시켜 주고도 남았다. 그때 누군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둘째 아들 같아. 우리 둘째 아들이 웃으면 입가에 보조개가 패여.”
“계절도 정반대여서 여기는 가을입니다.”
거리엔 그다지 크거나 높은 건물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미의 파리라고 불리는 도시는 대부분 유럽식 건물들로 잔잔하고 아름답게 채워져 있었다. 나는 간간히 보이는 가로수 잎에서 초가을 즈음이라는 계절을 느끼며,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과 가로수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라플라타라는 강 유역의 도시입니다.”
나는 지도책으로 학습해 온 대서양과 닿아 있던 아르헨티나의 지도와 수도의 위치 그리고 라플라타 강 위치와 생김을 생각했다. 그는 길가 쪽으로 끝없이 채워진 강물을 가리켰다.
“이 강이 라플라타 강입니다.”
동료들은 고개를 돌려 강물을 바라보았고 안쪽에 자리한 사람들은 잠시 엉거주춤 일어나 고개를 빼고 강줄기를 바라보았다.
“유럽인들이 이곳을 점령할 때 반짝반짝 빛나는 강물을 보고 ‘은(銀)강’이라 불렀지요.”
동료들은 처음과 똑같은 모양으로 강물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비교적 맑았지만 계절 탓인지 강물은 간혹 반짝이는 물결이 일렁이고 있는 듯 보였고 그리 반짝반짝거려 보이진 않았다. 나는 혹시 한여름의 땡볕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주민들이 살던 조용한 강가를 떠올렸다. 고기잡이를 하는 작은 목선들이 그려졌고 강가에서 뛰어노는 벌거벗은 아이들이 그려졌다. 세월을 건너 이탈리아 소년 마르코를 떠올렸다. 강가엔 사람들로 북적였고, 고기잡이를 하던 작은 목선이 큰 배가 되어 엔진 소리를 내며 육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갑판 옆쪽에서 마르코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엄마 찾아 삼만 리』 어릴 때 만화책으로 본 이야기였다. 소년 마르코는, 돈을 벌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어느 가정집 가정부로 떠난 엄마를 찾아,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프랑스, 스페인을 거쳐 대서양을 종단하고 이곳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마르코가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이동하면서 겪는 내용들이었다. 그 시절에는 ‘아르헨티나 드림’이 있을 정도로 아르헨티나는 경제가 좋았고 이탈리아, 스페인은 물론 독일에서도 이주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다. 가이드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강 동쪽과 북동쪽 저쪽엔 브라질과 우루과이가 있습니다.”
일행은 다시 고개를 돌리거나 엉거주춤 일어나 강 동쪽과 북동쪽 저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지도책으로 학습해 온 아르헨티나의 지도와 수도 위치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라플라타 강줄기 어디쯤의 위치를 생각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제가 안내하는 시간은 오후 4시 공항까지이니 길진 않지요. 모든 역사를 구체적으로 다 말할 순 없어요. 혹시 설명 중에 궁금한 점 있으시면 물어보시고요. 아니면 집에 가셔서 인터넷으로 검색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또 한 번 입가에 보조개를 패며 미소를 보였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예’라는 대답을 했다. 14일의 여행, 나는 브라질, 페루, 볼리비아를 거쳐 어제저녁 무렵 이곳에 닿았다. 그동안 가이드는 때와 장소에 따라 바뀌었다. 대부분 그 지역에 사는 교포의 후손들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에선 브라질에 이어 면적이 두 번째로 넓으며 세계에선 여덟 번째로 큰 땅을 소유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인 등 백인 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요, 그들과 인디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족이 대략 20프로 정도를 차지합니다.”
이어서 그는 일행을 향해 물었다.
“아르헨티나 하면 누가, 누가 생각나지요?”
거리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나는 남미 지역의 해발고도를 생각하며 TV에서 보이던 비교적 가무잡잡한 피부에 가슴팍이 큰 원주민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앞좌석에 앉은 몇몇이 대답했다.
“축구 신동 마라도나요.”
“축구의 신 메시요.”
“에바 페론이요.”
누군가는 ‘프렌체스카 교황’을 말하고 탱고의 탄생을 말하자 가이드가 만족한 듯 일행을 둘러보며 ‘그렇죠!’라고 대답을 했다. 잠시 후 그는 창밖을 가리켰다.
“이곳이 라보카 지역입니다. 초기 이주민들이 질병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탱고를 탄생시켰지요.”
나는 끝간데없이 펼쳐진 강물을 바라보며 다시 이탈리아 소년 마르코를 떠올렸다. 그리고 강물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는가를 또다시 살폈다. 여전히 강물은 간혹 반짝이는 물결만을 일렁거릴 뿐이었다. 그때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70대 초반쯤과 40대 중후반쯤의 남녀 두 쌍이 음악에 맞춰 탱고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들은 어깨끈이 달린 긴 치마 차림이었고 남자는 흰색 상위와 검은색 긴 바지 차림들이었는데 그들은 특별히 우리에게 이 장소가 그 장소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잠시 길가에 차를 세웠다. 우린 두 쌍의 탱고 춤을 감상했다. 그때 일행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저 모습 평소에도 자주 보이나요?”
“자주라기보다는 가끔은 볼 수 있는 모습이지요.”
우리는 자주라기보다는 가끔은 보인다는 그들의 탱고 춤을 본 것에 흡족해했다. 일행은 아르헨티나의 국회와 법원 앞을 지나고 콜론 오페라 극장 앞에서 잠시 내렸다. 콜론 오페라 극장은 세계 4대 오페라 하우스 중 하나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문화적 상징물이라고 가이드가 소개했다. 우린 1908년도에 오페라 <아이다>를 울리며 개관했다는 서양식의 웅장한 오페라 극장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현재 내부는 대형 서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시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는 ‘올라’, ‘차우’, ‘씨’, ‘노’, ‘그라시아스’ 하며, 아르헨티나 공용어인 간단한 스페인어를 가르치며 그 단어들을 따라서 말하게 했다. ‘올라’는 만났을 때 ‘안녕’ 하는 것이고, ‘차우’는 헤어질 때 ‘안녕’이라고 말하는 거라고 했다. ‘씨’는 ‘예’가 되고, ‘노’는 ‘아니오’, ‘그라시아스’는 ‘감사합니다’였다. 우린 가이드가 선창하면 ‘올라’ ‘차우’ ‘씨’ ‘그라시아스’를 따라했고, 암기해 놓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것이 아르헨티나의 오벨리스크입니다.”
우린 입을 닫고 그가 가리키는 직사각형으로 우뚝 솟아 있는 돌기둥을 바라보았다. 그는 1936년에 세워졌다는 오벨리스크를 말했다.
“이 나라의 독립과 도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세워진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 마크입니다.”
이어서 그는 아르헨티나의 오벨리스크 생김이 어떻다는 말을 했다. ‘안쪽으로 계단까지 새겨진 오벨리스크는 사람들의 무게와 발걸음, 그런저런 세월의 풍화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금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내부를 살짝 공개하는 정도’라는 말을 했다. 이어서 그는 ‘에바페론’을 말했고 축구 신동 ‘마라도나’와 축구의 신 ‘메시’를 말했다. ‘빈민가에서 태어난 에바는 모델, 연극배우, 라디오 디제이를 거쳐 페론과 결혼해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는 것,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지만 특히 빈자들에게 더욱 큰 박수를 받았다는 것, 30대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는 것’ 등이었다.
가이드가 ‘아르헨티나엔 세계 최대의 대초원이 있다는 것과 한때는 전 세계 경제에서 4-5위를 다퉜다’는 말을 하며, ‘한 번 추락하면 회생이 힘든 모양’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조금 알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근래의 역사와 IMF로부터 여러 차례의 구제 금융을 받았다는 것, 현재 아르헨티나가 갖고 있는 GDP와 주로 1차 산업에 편중된 국가라는 것 등을 생각했다. 나는 포퓰리즘 정책, 페론주의, 사회적 갈등 심화, 포퓰리즘은 라틴어로 POPULUS에서 유래했다는 것 등 그동안 들어 온 풍월들을 떠올렸다.
잠시 후 그는 4절지 크기의 사진 두 장을 나란히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한 장은 1910년경의 서울 남대문 앞거리 사진이었고, 한 장은 그 시절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의 사진이었다. 그는 그중 한 장을 높이 들어 올리며, ‘그 시대 이곳 사람들이 개통된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양복 입은 신사들이 잘 건축된 건물 앞을 걷고 있는 모습 등이 보였다. 그는 다시 한 장을 들어 올렸다. 그 시절 남대문 앞은 그저 순박해 보이는 흰색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들이 서 있거나 나뭇짐을 진 지게꾼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또는 나뭇짐을 실은 소달구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초가집들이 소복소복 엎어져 있었고 짚신 장수가 좌판을 열고 짚신을 팔고 있었다. 그 앞으로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아이들이 손가락을 입에 물고 서 있었다.
나는 티브이에서 보이던 마라도나를 떠올렸다. 비록 키는 크지 않았지만 황소처럼 잘도 달리며 전체를 리드하던 그였다. 나는 그가 황금 트로피를 들어 올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어서 몇 년 전 카타르 월드컵에서 골든볼을 들고 트로피에 입맞춤하던 메시를 생각했다. 나는 다시 남미 지역의 전체적인 해발고도를 생각했고 그들의 가진 폐활량 등을 생각했다. 이어서 가이드는 프란체스카 교황을 말했다. ‘이탈리아 이민자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이곳에서 성장’했다는 말을 했다. 그분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광화문 앞에서는 대대적인 환영식이 있었고 전국 성당마다 환영 플래카드가 나붙었었다. 나는 소형차를 타고 한국을 돌던 프렌체스카 교황을 생각했다. 가이드는 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한동안을 달렸다. 나는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아르헨티나 수도 관광을 끝으로 오늘 저녁엔 이곳에서 LA행 비행기로 10시간쯤을 달리고 다시 인천행 비행기로 갈아타 13시간쯤을 달려 집으로 간다는 생각을 했다. 남미 4개국 14일의 일정이었던 것을 생각했다. 14일의 여행이 얼마나 빡센 것이었을까를 생각했다. 나는 중국 북경과 서안, 이어서 대만의 요지를 거치고 일본으로 가, 도쿄와 오사카 정도를 관광하고, 대한민국 경주를 구경하고서 지금 서울에 있다는 정도를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게 무슨 여행이야? 한 나라에 가면 그곳 구석구석을 다 돌아다니며 살펴봐야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건 평소에 내가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대로 잘 보고 다닌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빡센 것이었을까를 생각했다. 걸어 다니거나 버스 이동보다는 거의 전부를 비행기로 이동했고 계산상으로는 충분한 휴식과 수면 시간이 주어졌으니 빡셀 것도 없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고는 일행과 잠시, 잠시는 근처 가게들을 돌아다니기는 했다. 시차 영향으로 수면 시간을 거의 뜬눈으로 보내든지 짧게, 짧게 겨우 두세 번 토막잠을 자는 게 문제이긴 했다. 그것도 매일 밤 별 하나 나 하나 돼지 한 마리 토끼 한 마리를 웅얼거리며 겨우 잠이 들었다 깨다를 반복했다.
나는 14일의 발자취를 떠올렸다. 브라질의 상파울로를 돌다 커다란 예수상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다. 물줄기가 엄청 쏟아지던 이구아수 폭포 아래까지 보트를 타고 들어가 폭포의 물줄기를 온몸으로 즐기는 관광과, 야행성이지만 가끔은 대낮에도 표범과 흑표범을 볼 수 있다는, 그래서 잔뜩 기대도 해보았던 정글 투어도 했다. 이어서 남미 지역의 민속 공연을 보며 저녁식사를 했다. 페루의 푸스코와 마추픽추, 볼리비아의 소금 사막들을 보았다. 대략 해발 3600미터의 고지에 있다는 소금 사막에는 소금호수와 소금밭이 끝간데없이 펼쳐져 있었다. ‘약 2만8천 년 전 안데스 산맥이 만들어질 때 해수면이 올라와 오랜 세월 내륙에 머물게 된 것이 지금 이 소금평야가 됐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고 ‘면적은 경기도 면적보다 조금 더 크다’는 말을 했다.
소금호텔은 소금 사막 안에 있는 2층 건물로 모두가 소금 벽돌로 단단하게 쌓아 놓은 호텔이었다. 침대도 탁자도 모두 소금이었다. 소금 벽에 못을 치고 티브이를 걸어 놓았고, 냉장고는 소금으로 굳힌 장식장 안에 있었다. 오후 4시쯤 방을 배정받고 소금밭으로 향했다. ‘미네랄 천지’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그야말로 광활한 소금 천지였다. 군데군데는 소금물이 차 있었고, 바닥이 찰랑거리기도 했다. 가이드는 ‘엊그제 비가 온 탓’이라 했다. 그때 누군가가 오늘이 ‘비 온 뒤 개인 날’이군요 하는 말을 시적 운율로 말했다. ‘곧 바싹 마르기도 하지요.’ 가이드는 그렇게 대꾸했다. 우리는 나누어 주는 장화를 신고 뛰어다녔다. 누군가가 물었다.
“그 오랜 세월, 이곳에서 새롭게 탄생이 된 어떤 생명체들은 없나요? 박테리아 같은 것이라도요?”
“모르겠어요.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 나온 바가 없어서요.”
가이드는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맘껏 뛰어 다니다가 하늘의 별이 반짝반짝 솟아날 때 소금 탁자와 소금 의자가 길게 놓인 장소로 가서 가이드가 준비한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 느긋하게 앉아 ‘저기 오리온자리’가 있다, ‘저건 작은 아씨들이야’를 떠들며 포도주를 홀짝이고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들어온 나는 안전을 점검이라도 하듯 소금 벽을 만져보기도 하고 살짝살짝 좀 더 세게 좀 더 세게 주먹으로 쳐보기도 했다. 단단하기가 그대로 돌이었다.
잉카문명의 푸스코와 마추픽추는 정말로 한번 와 보고 싶은 곳이었다. 푸스코는 안데스 산맥의 해발 3400미터의 고지에 있었다. 그곳은 잉카인들의 도시였다. 물샐틈없이 정교하게 깎아 만든 돌기둥들이 있었다. 그곳엔 태양신을 모시던 잉카인들의 제사터도 있었다. 이제 막 초경을 치른, 순수함을 간직한 보통 13∼15세의 어린 소녀가 제물이 되었다. 소녀에게는 옥수수술인 치차를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입 안으로 밀어 넣어져야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소녀의 정수리에서 뜨거운 피를 뽑아 태양신에 받쳤다. 그 일은 1532년 스페인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했다. 끔찍한 광경들이 눈앞에 그려지며 머리를 어지럽혔다.
피를 깨끗이 잘 뽑으려면 아이를 거꾸로 들어 올렸어야 했을 거야. 광장엔 사람들이 몰려 있었을 거고, 힘센 근육질의 남자들이 소녀를 들어 올렸겠지? 손발은 밧줄에 묶여 있었을 거야. 소녀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거나 버둥댔을 거야. 얼마나 무서웠을까? 정수리는 도끼로 찍었을까? 잘못되면 골수가 나올 테니까 어떻게든 기술적으로 잘 도려내어 깨끗이 받아냈겠지. 그렇게 소녀는 한동안을 근육질의 남자들 손에 들어 올려졌을 거야. 뜨거운 피가 똑똑똑똑 마지막을 토할 때까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 시절에 가졌던 그들의 철학을 생각했다. 선택된 소년은 본인에게도 또는 부모에게도 크나큰 영광이었겠지. 그렇게 해서 위대한 태양신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라는 종교적인 믿음과 가문의 영광까지도 생각하게 하며 운명처럼 받아들였을 거야. 그러면서 나는 우리나라도 있었던 대가야 금관가야 하던 시절의 순장제도를 생각했다. 이어서 심청전의 임당수 같은 것을 생각했다. 언제적 구전인지 내려오고 내려오다가 판소리가 되었는지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과, 그와 같은 일들은 세계 도처에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 저녁은 푸스코 신전 아래쪽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장소는 민간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뭔가 비릿한 냄새가 계속 불어오는 듯도 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고 어느 집 아낙이 뭐라 뭐라 아이들에게 훈계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마추픽추를 떠올렸다. 마추픽추는 종교적 군사적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대략 기원전 2800년경부터 형성되었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나는 대자연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엄청난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단식 밭에서 구아나코라마라는 동물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얼굴은 낙타였다. 다 자란다면 보통 120킬로까지 자란다는 구아나코라마는 다 자란 우리나라 염소의 키높이보다는 조금 더 큰 종류로 보였다. 나는 가방을 뒤적여 사등분으로 접은 종이를 꺼내었다. 일행 중에 나누어 준 마추픽추에 대한 칠레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의 한국 번역판 시였다. 나는 눈으로 시를 읽었다.

 

<마추픽추>
파블로 네루다
사다리를 타고 지구를 올라가게 되었어요.
잃어버린 정글의 무수한 덤불숲을 헤치며 마추픽추까지 올랐지요.
사다리꼴의 돌로 이루어진 하늘의 도시
마침내 잠옷을 걸쳐 본 적 없는 지구가 거처하는 곳까지.
돈의 어머니 콘도로의 거품. 인간이 새벽을 품은 높고 험준한 암초
원시인의 모래 속에 잃어버린 삶.
이곳이 지구의 옛 거처였고 현재의 거처입니다.
여기서 굵은 옥수수 알갱이들이 솟아올랐다가 붉은 우박처럼 다시 떨어졌지요.
여기서 금실이 비쿠냐로부터 나와
연인을 감싸고 무덤과 어머니들 왕 신자들 전사들에게 옷을 입혔지요.

 

나는 두세 번을 반복해 읽었다. 군사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그리고 사람이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는 수로 시설 등 마추픽추는 사람들이 말하듯 아주 경제적인 도시였다. 그때 가이드가 ‘버스는 곧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핑크하우스 광장에 닿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핑크하우스를 잠간 설명했다. ‘중앙정부와 연방정부가 오랫동안 세력다툼으로 갈등을 했고 중앙정부의 흰색 상징과 연방정부의 빨간색 상징을 혼합해 화합의 의미로 핑크색의 대통령궁을 지었다’는 말이었다. 가이드는 ‘핑크하우스 광장에서 약 60분쯤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것이며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행은 대통령궁이 있는 핑크하우스 앞에 내렸다. 3층의 건물이었고 대통령궁치고 아담한 분위기를 주었다. 아르헨티나의 국기인 푸른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있는 바탕에 중앙에는 잉카제국의 태양신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노란색의 태양 안에 사람의 눈코귀입이 그려진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마라도나와 메시 등과 아르헨티나 축구팀들이 주로 입고 있었던 푸른색과 흰색 줄무늬의 유니폼을 생각했다. 누군가가 ‘화장실은 어디지요?’라고 물었고 가이드는 ‘광장 앞쪽으로 보이는 커피숍’을 가리켰다.
“저 커피숍 안에서 일을 보세요. 예의상으로도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커피도 주문해 마시고요. 커피숍 주인과는 잘 아는 사이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커피숍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핑크하우스의 창문 난간에 서서 궁중들에게 연설을 하던 에비타의 모습을 상상했다. 많은 군중들이 열광의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일행은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일행에 묻혀 핑크하우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리고 핑크하우스 앞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다. 비둘기들이 종종걸음을 치며 관광객들이 던져 주는 과자 부스러기들을 쪼아댔다. 나는 광장을 걷던 수많은 발걸음들을 생각했다. 이런저런 발걸음들이 알록달록한 세월을 더해 가며 하나둘씩 겹치고 겹치면서 광장 아래로 스며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주던 가이드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나는 가이드에게 궁금증을 물었다. 그가 이민 3세라면 가족의 이민사가 궁금했다. 그는 ‘박정희 때 식량 생산 목적으로 이곳 아르헨티나에 어느 정도의 땅을 사들였다는 역사는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 서울 여의도 면적의 70∼80프로가 된다고 알고 있다’는 대답을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농사를 짓기 위해 여기에 오셨어요. 10살짜리 우리 아버지를 데리고요.”
박정희 대통령 말기 쌀 증산 계획으로 이곳에 땅을 사고 영농이민을 보냈었다는 역사를 생각했다.
“농사 짓는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막상 와 보니 땅에 소금기가 많아서 농사를 지울 수가 없었다 해요. 다행히 재봉틀을 다룰 줄 아시던 할머니는 아동복이나 주부들이 입는 긴 치마 등을 만들어 파셨다고 해요. 처음엔 세를 살던 셋집의 창틀에 걸어 놓고 파셨고 할아버지는 벽돌 찍는 일을 하셨다 해요. 두 분이 열심히 일해서 몇 년 후엔 자기 집을 가지게 되셨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두 분이 다 돌아가셨고 성장한 아버지는 같은 처지의 교포와 결혼하여 할머니가 하시던 일을 가업처럼 받아 하셨어요. 그리고 두 살 터울인 형과 저를 낳았지요.”
나는 그때 함께 온 다른 이민자들을 물었다.
“그분들 중에는 다시 한국으로 귀국해 간 분들도 있겠지요?”
“예, 그런 분들도 계시대요.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여기 계셨어요. ‘한국에 돌아간들 마땅한 직업이나 농사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라는 말씀들을 자주 하셨대요.”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어서 그는 대부분 같은 입장이 된 사람들은 이곳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지로 흩어져 살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며칠 되지도 않은 내가 포기김치와 된장찌개 국물 맛이 간절한 것을 생각했고, 송편과 보름달,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가 되는 한가위와 설 명절 등을 떠올렸다. 때때로 식생활과 그런 풍경들이 떠오르며 눈물겹게 그리웠을 그들을 생각했다. 이어서 나는, 대략 한국에서 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 이전의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의 경제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나는 그들이 가졌을 각자의 사정들을 생각했다.
“그렇게 되셨군요.”
나는 그런 대답을 했다. 그리고 지금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시냐고 물었다.
“부모님들은 지금도 하시는 일을 계속하고 계세요. 지금은 현지인 두 명을 데리고 일을 하세요.”
“혹시 형과 두 분 결혼들은 하셨나요?”
나는 가이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형은 했어요.”
“형도 한국 여자와 결혼을 했나요?”
“예, 아버지와 같은 처지로 정착한 한국인 후손 여자와 결혼해 아들딸을 낳았어요. 형은 지금 시내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요.”
가이드는 대답하며 뒷말을 붙였다.
“사업이란 말이 거창하지만 그저 시내에서 가게를 하나 운영하는 정도예요.”
그는 말을 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선 현지인 여자 두 명을 데리고 주로 여성들의 의복을 만들고 있고요. 형과 형수님은 그 의복들을 도매하거나 펼쳐 놓고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요.”
그는 그렇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했다.
“그만하면 성공을 이루셨네요. 앞으로는 더욱 번창할 거구요.” 
내 말에 그는 어느 정도는 긍정의 미소를 보였다.
나는 어젯저녁 이곳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하고 잠시 시장을 돌았던 생각을 했다. 물건 값은 한국보다는 조금 싸거나 비슷비슷하게 느꼈다. 품목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묻거나 산 것은 우유 한 팩과 소품 지갑들, 차 종류, 메시 양말이라는 것 두어 개 등이었다. 나는 그것을 말했다. 그는 ‘인플레’를 말했고 나는 조금은 조심스럽게 대졸 초임의 월급료를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나는 아르헨티나의 보통 가정경제를 나름 유추했다.
“한국엔 와 보셨나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곳에서 그렇게 보내시다가 제가 10세 전후에 모두 돌아가셨고요, 부모님 두 분은 한 번 가 보았어요. 어머니는 이곳에서 탄생한 분이셨고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행객으로요. 아버지는 경주를 거쳐 서울로 올라올 때 어릴 적 교향을 먼발치로 바라보고 오셨대요. 어릴 적 기억은 있었지만 그저 그렇게 너무 많이 변한 모습만 바라보고 오셨다고 해요. 그리고 우리 형도 한 번 가 보았어요. 신혼여행으로요. 저는 아직 못 가보았고요. 저도 결혼하면 신혼여행으로 대한민국 서울에 가볼까 해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입가에 보조개를 패며 미소를 보였다. 나는 그를 보며 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 어머니 어느 분이 입가에 보조개가 있으셨나요?”
“할머니요. 아버지와 형을 건너뛰고 제가 있어요.”
“혹시 결혼할 여자친구는 있으신가요?”
나는 웃으며 물었다. 그는 자기도 ‘같은 처지의 이민 3세 아가씨와 교제 중’이라는 말을 하며 조금은 멋쩍게 웃었다. 나는 감사했다. 이런저런 어려움들은 많이 있었겠지만 현재는 그런대로 잘 적응이 된 상태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에 하늘에 감사했다. 그때 가이드가 작은 소리로 허밍을 했다. 백난아라는 가수가 불렀다는 오래된 노래 <찔레꽃>이었다. 오래된 노래여서 뜬금없이도 들렸다.
“어떻게 그 노래를 아세요?”
나는 놀라워하며 물었다.
“가사는 모르고 리듬만 알아요. 어릴 적 할머니가 한국 노래라며 늘 부르셨어요.”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나는 그의 흥얼거림에 맞춰 노래를 조금 불렀다. 이어서 그는 찔레꽃 2절일 것을 다시 흥얼거렸다.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새동무 천리객창 북두성이 그립습니다∼.”
나는 다시 따라 노랫말을 불렸다. 그 노래의 3절 가사엔 ‘연분홍 꽃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가사가 있었다. 노래는 일제감정기 때 북간도로 떠난 조선인들이 망향의 슬픔을 노래한 가사라 알고 있었다. 그가 부르는 허밍소리를 듣는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하늘 끝 구름 저편인 듯했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 끝 구름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뭔가 애잔함들이 많이도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광장엔 아직 사진을 찍고 있는 동료들이 있었고, 커피숍 난간 쪽을 바라보니 누군가가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가이드와 나는 커피숍 앞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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