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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金秀泳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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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전.
오늘은 바쁘지만 지금은 조금 시간이 있다. 그 짬에 정우에게 전화를 건다. 궁금한 일이 많은데 바쁜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번호가 입력됐으니 전화는 올 것이다. 오늘 다툴 식품회사는 오전 10부터 업무 시작이라 했다. 그때까지 시간은 TV로 때운다. 마침 호쾌한 프로레슬링(WWE)이 있어 시간여행이 심심치 않다.

 

○드디어 오전 10시.
아무래도 첫 번째 사단은 가격만 따져서 결정한 것이 패인이었다. 많이 봤던 산양유 광고로는 TV홈쇼핑이다. 1통에 400g씩, 3통에 63,360원이라 했다. 이와 비교됐던 상품이 Q홈쇼핑 카탈로그였다. 거기서는 통당 450g씩, 5통에 100,300원이었다. 계산해 보니 Q사 제품이 g당 8.22원이 쌌다. 2세트 구매 시 1만 원 할인 조건에서도 Q사가 4.05원이 저렴했다. 이에 더 따지지 않고 Q사 제품으로 결정하고 전화 주문을 했다. 상품은 3일 후에 도착했다. TV 광고를 들으면 한 달 먹어 보고 불만족 시 100% 환불 조치한다고 했다. 그만큼 산양유에 대한 효과를 장담한다는 뜻이겠으니 Q사 제품도 그만한 기간이면 동일한 효과를 낼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됐다.
이렇듯 산양유를 주목한 이유는 빠지는 살 때문이었다. 이것이 두 번째 사단이 된다. 근육이 줄어서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은 얼마 전부터일 것이다. 전철이나 지하도 계단을 보면 단숨에 달려 올라갔지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던 사람이 달라진 것은 지병(○○암)이 발생하면서였다. 그러니까 5∼6년은 된 듯하다. 그런 상태에서 어느 날엔 모처에 기도하러 갔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 마음만 뻔했지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걷는 습관은 예전과 같지만 이전과 다른 점은 암만 뛰어도 속도가 붙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힘써 달리는데도 앞사람은 따라잡을 수 없고 뒷사람에게는 번번이 앞지르기 당하는 것이 일상이 된 나로서는 충격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빠진 근육을 어찌하면 보강할 것인가 하는 생각은 본인의 연식을 생각한다면 희망 사항일 뿐이며 나이의 가르침대로 순응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내 생각은 단호하다.
그렇지 않아.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팔팔했어. 자전거로 팔도강산을 수차례나 누볐던 사람이라고.
하지만 큰 병에 발목이 잡히면서 예전에 하던 운동도 하지 못하지 자전거는 더더욱 탈 수 없지 앞뒤 산만 조금씩 다니거나 동네 한 바퀴를 30분씩 돌고 오는 것이 하루 운동의 전부인 정도이다.(이 운동은 암과도 연관이 있다. 상태가 심한 정도였음에도 전이가 안 되었던 것은 열심히 운동한 덕분이라 했다. 특히 자전거 운동이 주효했던 셈이었다.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자, 어서 근육 회복을 해서 지난날처럼 뛰고 타고 해보자구.
여기서 빠진 근육 생각이 났고 TV만 켜면 나오는 산양유 광고가 눈에 들 수밖에 없었다.
산양유! 너로써 나를 구원하리라.
마음먹고 산양유 구입을 결단했다. 네덜란드산 산양유에다 귀한 초유까지 복합된 제품이라 한 달이면 변화를 자신한다는 TV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건 복음과 같은 희소식이라 하겠다. 그러면서 이틀 사흘 먹다 보니 과연 네가 나를 살릴 명약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해서 통에 적힌 설명문을 살펴봤다.
분리대두단백질 68.3%, 산양유단백분말 5%, 초유 산양유 혼합분말 3%, 기타 프락토 올리고당, 구연산칼슘, 농축유청단백, 산화마그네슘 등등.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대두(大豆) 68.3%, 산양유 5%, 초유는 산양유와 혼합해서 3%라는 기록이다.
이건 콩가루잖아!
퍼뜩 드는 의문이 그것이었다.
그러면 백년하청 아니겠는가. 언제 근육을 회복시켜 없던 기운을 되살리겠다는 것인가?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들 정우와 나누어 먹는 방법도 있었으나 보약이든 건강기능식품이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먹일 수는 없었다.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라는 말처럼 이럴 때는 회사와 맞붙는 일이 가장 쉬운 방법일 것이다. 관공서와 달리 식품회사 CB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근무 시간이라 했다.
“여보세요.”
나직하게 목소리를 낮추어서 운을 땐다.
“안녕하세요. 건강식품 CB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다름 아니고 제가 귀사 제품을 샀습니다.” 
“무슨 제품인데요?”
“산양유요. Q사의 카탈로그를 보고 샀는데 함량이 너무 적어서 반품하려구요.”
“반품을요? 식품이라 반품은 안 됩니다. 이미 개봉했을 것 아닙니까?” 
“개봉도 하고 먹기도 했어요. 지금 한 통을 헐어서 먹고 있는데 아직 나머지 네 통은 고스란히 그대로 있어요.”
“그래도 식품이라 드시고 있는 정도라면 어렵습니다.”
숨을 한 번 길게 들이킨 다음 다시 낮은 호흡으로 말을 잇는다. 
“여기 설명된 내용을 보면 대두분말이 68.3%라고 돼 있고 산양유는 5%예요.”
“카탈로그를 보셨다고 하는데 거기도 있지 않습디까? 보셨을 것 아니에요?”
“아닙니다. 대두분말 68.3%라는 글씨는 없었어요. 작은 글씨로 분리 대두단백 중국산이라고만 적혀 있어요. 지금도 제가 그 카탈로그를 옆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책자를 보고 사셨다는 말씀 아닙니까.”
“네, 그걸 보고 Q홈쇼핑에다 주문을 했지요.”
“아무튼 저희는 고객께서 생각하는 산양유 비율이 얼마인지 몰라도 반품은 어렵습니다. 그러면 다른 제품을 사셔야 했지요.”
산양유 제품은 모두 같은 비율로 구성된 것 아닌가. 그래서 TV 광고 제품 가격이 달랐던 걸까? 그 참, 아둔한 늙은이 같으니.
“방금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중국산 대두분말단백이라고요. 5% 들어간 산양유와 3% 들어 있는 초유를 믿고서 산양유를 먹고 있거니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반품하려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겉포장은 뜯어져도 받아들이지만 이미 한 통을 개봉해서 드시고 계신다면 이건 식품이기 때문에 반품이 안 됩니다.”
“나머지 네 통은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68% 이상이나 들어 있는 것이 대두분말이니 어찌 이걸 산양유라 믿고 먹겠어요. 지금 먹는 것은 산양유가 아닌 콩가루입니다. 한 통은 헐었으니 먹기로 하고 나머지는 받아주세요.”
드디어 불씨가 될지도 모를 단어를 서슴지 않고 말한다. 무방비 상태로 한 말이지만 소비자로서는 내심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카탈로그에는 분리대두단백이라고만 써 놓았지 얼마가 혼합됐다는 말은 없어요. 또 고객들은 ‘산양유 초유 단백질’이란 글자만 보지 그게 콩가루인지 밀가루인지는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다. 네 통은 완전한 상태이니 받아주시고 한 통은 이미 개봉했으니 값을 치르지요.”
“저희 회사에서 결정할 일이 아니고 구매한 홈쇼핑에다 알아보세요. 내일은 토요일이니 다음 주에나 연락이 갈 거예요.”
“1차적인 열쇠는 회사에 있으니 반품하도록 해주세요. 20%나 30%만 혼합돼 있어도 이러지 않을 겁니다. 이건 도저히 산양유로 먹기는 어려워요. 그럴 바에는 방앗간에서 콩고물을 빻아 먹지 왜 비싼 돈 주고 사 먹겠어요.”
드디어 남은 소갈머리까지 털어내고야 이야기는 끝난다. 할 일도 많은 날인데 아가씨가 꼬장꼬장해서 말이 길었다. 그래도 변죽은 울렸으니 반응은 있을 것이다. 정히 안 되면 그깟 돈은 없었던 거라 생각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버스에서.
버스는 썰렁할 만큼 텅 비었다. 아예 뒷자리로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앉는다. CB에서는 Q홈쇼핑에다 알아봐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식품회사에서 결정한다는 것인지 본인이 구매한 홈쇼핑에다 연락해서 해결하라는 얘기로도 들리는 말이었다. 하면 짐을 고객에게 떠넘기고 회사는 빠지겠다는 뜻도 된다.
참, 고약한 일이다. 입력된 전화번호 중에서 최근에는 구매한 건강기능 관련 식품이 몇 가지 있다. 한 가지는 지금 먹고 있는 산양유이고 나머지는 하루 이틀 더 있어야 올 것 같다. 금방 찾아지는 번호가 자동주문 전화였다. 몇 번 눌러서 상담원과 통화를 시도한다. 상담 전화가 많아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거의 동시에 여보세요 한다. 나긋한 예쁜 목소리다.
“네, 안녕하세요. 제가 얼마 전에 산양유를 샀거든요. 배송받아서 지금 먹고 있는데 산양유는 얼마 들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반품하려구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진 아무입니다.”
“전화번호는요?”
“전화번호는 암만입니다.”
“아, 네. 최근에 세 가지 제품을 구매하셨군요. 그중에서 산양유를 반품하신다고요?”
“네. 한 통은 먹고 있고 나머지 네 통은 그대로 있어요. 그 네 통을 반품했으면 합니다.”
“이건 구매취소를 해야 하는데 담당자가 자리에 없어요. 담당자가 확인한 후에 연락이 갈 것입니다.”
“어떤 연락이 옵니까?”
침이 말라서 입 안에서 까르르 하는 소리가 난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제품회사에도 확인해야 하니까 평일로는 2, 3일 걸릴 거예요.”
“오늘은 연락이 안 될까요? 좀 전에 제가 식품회사와도 통화를 했는데요.”
“그런데 담당자가 안 보이네요. 내일은 주말이라 내주 초쯤 연락이 갈 것입니다.”
“지금 전화 받으시는 분께서는 안 됩니까?”
“그쪽 일은 담당하는 분이 따로 있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상품명은 산양유와 초유인데 정작 상품을 받아서 보니 68.3%가 대두단백이고 초유가 3%, 산양유는 겨우 5%인 거예요. 그래서 반품하려는 것입니다. 이건 소비자를 우롱하는 것이지요.”
어디선가 전화가 들어온다. 정우라고 화면에 찍힌다.
“네, 말씀드린 대로 담당자에게 전할게요.”
“꼭 방금 했던 말을 전해주세요. 산양유 혼합비율이 너무 낮아 반품하겠다구요.”
“전하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새 정우 전화는 끊어졌다. 무슨 일이 바쁜지 지금사 시간이 난 모양이다. 전화는 곧바로 연결이 된다.
“오, 그래. 아침에 내가 전화했다.”
“네. 차가 또 퍼졌어요. 견인차로 끌어서 정비소에 갔더니 엔진에 이상이 있다고 하네요. 맡겨두고 왔어요.”
“차를 찾아왔나 싶어 전화를 했는데 그 참 속상하네. 연일 차 때문에 정비소를 들락거리네.”
“사고도 없고 멀쩡해서 샀는데 10년 넘게 굴린 차예요. 당분간은 장거리 운행은 못할 것 같아요.”
어디, 집이세요 하고 묻는다. 야, 시방 난 집 안팎에서 전쟁 중이다.
“아니다. 병원 가는 길이다. 새 직장으로 출근은 다음 주에 한다고 했지? 이사는 그 다음 주고.”
“네.”
“은행 대출은 차질이 없나?”
“네. 신한에서 KB로 바꿨어요. 0.9%가 낮아요.”
“그렇다고 했지.”
“네.”
“그러면 내가 주려는 돈은 필요하겠나? 없어도 안 되겠나?”
“주시면 좋지요. 필요해요.”
“그래 알았다. 낭자님도 만나고 해야 하니까 요즘 사업이 바쁘시다.”
“허헛, 내일 토요일에도 만나요.”
“그래. 잘 해라. 사랑은 경이로운 것이란다.”
“네. 경이로운 낭자님한테도 전할게요. 후훗.”

 

○병원, 기타.
오늘 따라 병원이 꽉 찼다.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다. 처방전만 받으면 되니까 많은 이들의 꽁무니에 설 필요는 없다. 700원을 주고 처방전을 받는다. 주말 잘 보내세요, 인사하고 나온다. 약국에 들러 장복 중인 신경안정제를 받아 들고 우체국에 들러 친구에게 또벅또박 쓴 손편지의 답장을 보낸다. 주고받는 편지는 저승길이 어떠냐는 얘기가 아니면 나무필통 딸그락대며 갈뫼모랭이를 돌아 학교에 다녔던 소싯적 얘기다. 그만해도 우리는 한 세상을 충만하게 산 셈이었다. 먼 시절의 얘기가 있고 아침 안개 같은 아스라한 미래가 있다고 하면. 손에 든 약을 가방에 넣고 시내 대로변에 있는 은행에 들른다. 약속한 정우의 이사비용을 이체한 다음 통장 정리를 한다. 돈은 돌아야(써야) 돈이지만 묶여 있는 돈이 더 좋다. 그것은 생활인의 뒷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손 벌리는 자식에게 주는 돈은 여북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겠는가. 끝으로 가야 할 시내 행선지는 돼지국밥집이다. 조금 늦었지만 어지간히 점심시간을 잘 맞추었다. 양껏 담아주는 주방 아주머니의 넉넉한 인심에 감동하며 맛있게 점심식사를 마친다. 이 집은 옆동네에 사는 고교 시절 친구와 함께 와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집이 그 집’으로 남아 있어 조금도 인심이 변하지 않고 사람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친구의 도움말이었다. 그 일이 내가 아프기 전이었으니 어언 수년이 흘렀고 벌써 그 시절은 추억이 되었다.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준 친구에게 지금이라도 고맙다는 문자를 보낼 수 있으련만 사정이 팍팍하게 돌아가서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언제 저 사람들이 해결책을 문자로 보내줄지 전화로 알려올지 오리무중인 가운데 심정은 소태를 씹은 기분이다.
오늘 마지막으로 가야 할 곳은 가방을 무겁게 채울 푸드마켓이다.

 

○다시 버스, 버스.
귀가하는 버스는 집 앞을 지나서 종점까지 간다. 종점 앞에 푸드마켓이 있다. 중간 자리에 앉아 정우에게 문자부터 보낸다. 돈을 넣었으며 알뜰히 쓰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하긴 세상물정을 익히 아는 아들에게 이런 당부는 조언이기보다는 잔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정우는 너그러운 성품인데다 어른 말을 귀담아듣는 편이라 오금을 걸 사람은 아니다. 조용조용하던 앞자리의 두 아주머니 대화가 갑자기 커진다. 아이구 내 보래, 물파스 챙겨 나온다는 것이 선크림을 들고 나왔네. 그러고는 둘이 함께 흐르르 하고 웃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말이지. 소비자는 간이 타들어 가는데 휘파람이나 휙휙 불면서 주말을 즐기는 것 아닌가? 어찌 그게 산양유야? 콩고물이지. 배합 비율을 보라고. 산양유란 생각이 들겠는가.
그래서 그 부분을 집중해서 반복하고 되뇌었다. 심하게는 그건 콩가루, 콩고물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자 어느새 Q홈쇼핑으로 말이 넘어갔다. 말이 나온 김에 Q홈쇼핑에다 전화를 걸었더니 담당자가 없다면서 확인 후에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게 지금까지 전개된 상황의 요지이다. 그러고 나서 이제, 지금 생각하니 선후가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일이 있으면 소비자는 구매처에다 반품 요청을 했어야 하는데 제조회사에다 했으니 상담원도 놀랐을 것이다. Q홈쇼핑에서는 그때 담당자가 자리에 없다고 했다. 해서 상담원에게 문제가 되는 부분을 강조해서 짚어주었다. 수치까지 말해 주었으니 전달은 되었을 것이다. 전달이 되면 회사 방침이 어떤지는 몰라도 그 후의 조치가 관심사인 것이다. 평일이면 3일 정도 걸린다는 것 같았다. 그 3일을 기다려야 하는 소비자 마음은 어떻겠는가? 애가 타고 일이 손에 안 잡힐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긍정적인 해결책이 나왔으면 좋겠고 시일도 빠르면 좋을 것이다.
뚝딱 하고 알람이 울린다. 그새 정우가 문자를 보고 응답을 해오는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야무지게 아껴 가며 쓰겠습니다, 건강하세요’ 했다. 이사비용이니 아깝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정우 문자 외에도 입력된 번호들이 한둘이 아니다. 차례대로 열어본다.
=<Web발신> 1.(이 숫자는 편의상 붙인 것이며 이하 동일하다.)
<Q홈쇼핑> ‘산양유 초유 상품 확인 후 전화드렸으나 부재중으로 문자 드립니다. 1통 개봉 분; 100,300÷5=20,060원 입금 후 당사 전화 부탁드립니다.’(오전 11:50.)
=<Web발신> 2.
<Q홈쇼핑> 1의 내용과 같다. 시간만 다르다.(오후 12:42.) 이 시간이면 은행을 나와서 돼지국밥집으로 갈 즈음인 듯하다.
=<Web발신> 3.
<Q홈쇼핑> 전반부는 1, 2의 내용과 같고 후반부는 1통 개봉 분인 20,060원을 입금할 은행, 계좌 등을 지정해 놓았다.
‘H은행, Q홈쇼핑 계좌; 772-910005-…’(오후 1:55.)
줄줄이 쌓여 있는 <Web 발신> 3건을 보고서야 아차! 한다. 그리고 한 번 더 문자 내용을 읽는다. 이건 그새 해결이 됐다는 뜻이다. 오, 쾌! 상쾌! 통쾌라! 즉시 하차 버튼을 눌러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린다. 길 건너편 정류장에서 거꾸로 내려오는 버스를 탄다. 위치는 집 앞에서 서너 정류장을 지나온 지점이며 다섯 정류장을 내려가면 가까운 은행이 있다. 오늘은 금요일이라 서둘지 않으면 월요일까지 넘어가게 된다. 시간은 충분히 입금하고 일을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타는 듯이 바쁘다. 홍진에 잡혀 가는지 손에 잡혀 가는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이럴 때를 가리킨 말일 것이다.
“이것 좀 봐주세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청경에게 손을 내민다.
“이곳에 넣을 건데 통장은 없고 제 카드로 보낼까 하는데 되겠습니까?”
“카드로 이체한다는 말씀이지요?”
“네.”
한 단계씩 순서를 밟아 H은행 계좌에다 20,060원을 입금한 후, 받는 이가 맞는지 확인하게 한다. Q홈쇼핑이다.
“네. 맞습니다.”
“홈쇼핑인가 보지요?”
“네. 상품을 잘못 사서 주고받고 하는 거예요.”
“됐습니다.”
카드와 입금 영수증을 한꺼번에 꺼내서 받는다.
“감사합니다.”
휴우, 비로소 안도하는 숨이 흘러나온다. 차제에 비어 있는 휴게실에 들어가서 전화를 건다. 돈을 보냈다고, 산양유 한 통 값이라고 말을 더듬거리며 용건을 말한다. 호흡을 가라앉히며 잠시 신문을 보고 앉았다가 은행을 나온다. 잎 떨어진 플라타너스가 우람한 동체임에도 계절을 타는 듯 마른 가지를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남은 한 가지 일을 마저 하기 위해 은행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탄다. 그리고 종일 메고 다닌 빈 가방에다 불룩하게 한 짐을 채워서 다시 길 건너편 정류장으로 건너온다. 이로써 같은 동선 안에서 이 일 저 일을 바쁘게 오가면서 오늘 일과를 맞춤하게 끝냈다.
다음의 4번째 <Web발신> 문자는 집에서 받는다.(오후 2:25) 회수할 상품은 택배기사 방문 전에 박스 포장 부탁드린다는 내용이다. 그야 쉽다. 어렵지 않은 일이니 열어둔 상자 뚜껑을 테이프로 봉한다.
그렇게 오늘이란 이름의 하루가 저물고 그토록 콩 튀듯 팥 튀듯 했던 시간들은 밤을 지나면서 어제가 된다. 그리고 새로운 오늘을 맞는다.
새로운 오늘의 시작은 머리맡에 둔 핸드폰의 알람 소리부터다. 이건 또 무슨 전쟁이야! 하면서 눈을 부비고 잠을 깬다. 어제 받았던 ○○택배 회사다.
=<○○택배> 상품 집하 안내.
‘안녕하세요, 고객님. ○○택배입니다. 오늘 13∼15시 사이에 상품을 집하할 예정입니다. 상품 수거가 편하신 장소를 택하시거나 기타 요청 사항이 있을 시 작성 부탁드립니다. http;//smile….co.’
집하(수거) 주소; 양지아파트 ○○3동 ○○2호, 받으시는 분; Q홈쇼핑, 상품명; 산양유 초유 4통, 택배원; 이 아무. (010...), 실시간 집하 현황을 확인해보세요. http;//smile...(오전 06:31)
수거 장소야 현관 앞이 편하다. 오후 1시 이후라 했으니 문제의 택배 상자는 현관 앞에다 내놓는다. 아침 식사 중인데 또 귀에 익은 알람이 뚝딱 하고 울린다.
‘안녕하세요. ○○택배입니다. 오늘 요청하신 반품 회수 예정입니다. 이중 포장하신 후 <산양유 반품>이라 적어서 문 앞에 두세요.’(오전 07:01)
그래, 그런 것도 필요할 것이다. 매직펜으로 <산양유 초유 반품>이라 쓰고 볼펜 글씨로 받는 이와 보내는 이, 수량까지 적는다. 그리고 빨간 도장을 찍어서 스카치테이프를 붙인다. 비를 맞아도 지워지지 않을 방비가 된 것이다.
오후. 오후 운동을 나가면서 택배 상자를 현관 밖에다 내놓는다. 뒷산에 다녀와도 상자는 (새로 배운 용어로) ‘집하’되지 않고 있다. 현관 벨이 울릴지도 모르니 귀를 크게 열어 놓고 TV 시청을 한다. 두 번째 확인하고 들어왔을 때 뚝딱하는 알람 소리를 듣는다. 들어온 문자를 확인한다.
○○택배 집하(반품) 완료.
받는 분; Q홈쇼핑.
상품명; 산양유 초유(오후 14:34)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서 현관문을 열어보니 상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작은 쪽지가 그 자리에 놓여 있다. 내용은 문자로 보낸 것과 같은 것이었다.
운송자; ○○택배.
받는 분; Q홈쇼핑
수량; 1(4)
상품명; 산양유 초유.
퓨우, 또 긴 숨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야말로 만근심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다. 집어 온 영수증은 가계부 갈피에다 끼워 둔다. 너 하나로도 얘기가 한 꼭지란 생각이 들며 세상 살기 힘들다고 이런 일 하나로도 이처럼 고전하다니 싶다. 세면실에 들러 찬물에 손을 씻고 나서 거울을 보니 이상한 얼굴이 거울 속에서 뻔히 쳐다보고 있다. 언제나 나는 나를 용서하며 사는 바로 그 이상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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