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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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언니가 울부짖는다. “아버지, 저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요. 고등학교 보내 주세요” 하고…. 그 말에 “여자가 뭔 고등핵교여, 언니들처럼 그냥 돈 벌다가 시집이나 가” 하고 아버지는 단칼에 무 자르듯 딱 잘라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완강함에 더 이상 대항할 힘을 잃은 듯 언니는 사흘 밤낮 식음전폐했다. “기지배야, 그러다가 너 죽어. 밥은 먹어야 핵교도 가는 거여” 하고 엄마가 나무랐지만 언니는 눈도 뜨지 않고 돌아누워 있었다.
사십 년 전 우리 집 이야기다. 내 땅뙈기 하나 없는 부모님은 십남매를 내리 낳으시고, 자식들이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일자리를 얻어 보냈다. 큰오빠는 공장, 둘째오빠는 광산, 셋째오빠는 밤업소에 취직했다. 큰언니와 둘째언니는 공장생활과 미용실을 하다가 시집을 갔고, 셋째언니는 재봉일, 넷째언니는 둘째언니 미용실에서 일했다.
그래도 시대가 좀 변해서일까. 다섯째언니는 중학교까지 보내주셨다. 한데 그것도 모자라 고등학교까지 보내 달라고 밥도 안 먹고 저리 버티니 아버지도 무척 당황하신 듯했다. 안 된다며 버럭 소리는 지르셨지만 내심 고민이 되었는지 한숨과 함께 전보다 더 자주 담배와 강소주를 입에 대셨다.
단식 나흘째가 되는 날 아버지는 언니를 불러 앉히셨다. “부모 된 도리로 자식이 더 배운다고 하는데 가로막아 미안하다. 내 땅 하나 없이 농사만 지어 십남매를 키우다 보니 언니, 오빠들은 제대로 핵교도 못 보냈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고등핵교를 가겠다고 하니 학자금이 나오는 광산으로 가기로 했다” 하고 말씀하셨다. 순간 언니는 기쁨 반, 죄송함 반으로 울음을 터뜨렸고 옆에 있던 나도 덩달아 울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한평생 짓던 농사를 그만두고 광산으로 떠나셨다.
아버지가 광산에 취직함으로써 언니는 원하던 고등학교에 예쁜 교복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고, 두 살 터울로 중학교를 다니던 나도 고등학교는 어떻게든 가겠구나 하고 안심하게 되었다. 언니는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였고, 남동생과 나는 걸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녔다. 엄마가 광산 사택에 가 계시는 동안은 언니와 내가 번갈아 가며 동생을 챙겼고, 집안일은 물론 농사일까지 도맡아 했다.
주말을 이용해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찾아간 광산 사택 주변은 그야말로 온통 까만색이었다. 돌도 까맣고 나무도 까맣고 광산에서 퇴근하는 사람들도 까맸다. 옷도 까만데다 어디가 눈인지 코인지도 분간이 안 되는 얼굴은 마치 커다란 연탄 덩이를 방불케 했다. 이렇게 광산 바깥도 모두 새까만데 갱 안은 얼마나 깜깜하고 답답할까를 생각하니 철없던 마음에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세탁기는커녕 고무장갑도 없던 그 시절, 엄마는 얼음을 깬 찬물에 맨손으로 아버지의 작업복을 빨으셨다. 석탄가루가 섬유 곳곳에 박혀 있어서일까. 작업복은 몇 번이나 헹궈도 까만 물이 계속 나왔다. 어린 마음에도 작업복에서 나오는 까만 물이 십남매를 먹여 살리느라 새까맣게 탄 아버지 가슴의 한 같아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택을 다녀온 날에는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것이 부모님 고생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니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던 어느 날, 광산의 갱이 무너져 아버지가 매몰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너무 놀란 우리는 급히 광산으로 달려갔다. 애끓는 마음으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되던 날, 드디어 아버지가 들것에 실려 나오셨다. 순간 간절히 기다리던 마음과는 달리 우리는 아버지께 쉽사리 다가서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아버지의 모습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사흘이나 석탄 더미에 깔려 있었으니 그 모습이 오죽했으랴.
어디가 머리인지 다리인지도 분간이 잘 안 되는데다 살아 계시긴 한 건가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사람의 모습이라기보다 그냥 까만 흙덩어리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눈도 잘 못 뜨는 아버지였지만 울음소리로 딸들을 알아보신 걸까. 감고 있던 눈을 힘겹게 뜨며 “애비 아직 안 죽었어. 울지 마” 하고 힘없는 손을 흔들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셨다.
아버지는 인천 J병원으로 옮겨 재활치료에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보다 폐활량이 좋아 유일하게 생존하셨지만 다리를 다쳐 제대로 걷지를 못하셨기 때문이었다. 사고가 난 뒤에나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월급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선산부’를 지원하셨다고 한다. ‘선산부’는 ‘선임 생산 인부’로 막장 안에서 위험한 작업을 하므로 항상 사고가 많은 곳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우리 때문에 굴을 뚫고 다이너마이트 설치를 하는 위험한 일을 하셨다는 생각에 죄인인 양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래서일까. 언니와 나는 아버지께 더 자주 병문안을 가려고 노력했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용돈도 쥐어 드린 후에야 그나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한다. 이 말은 딱 우리 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아버지 생전에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천지가 개벽을 해도 안 될 일이었다. 그만큼 아버지께 농사는 목숨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자식이 더 배우겠다고 버티니 평생 짓던 농사를 그만두고 광산으로 떠나신 것이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그 당시 자식을 위한 아버지의 결단과 용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살아가면서 힘이 들 때마다 갱에서 구출되어 나오시던 순간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못 드시고 온몸을 짓누르는 무거운 석탄 더미와 사투를 벌이느라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그 와중에 다리까지 다쳤으니 또 얼마나 아프셨을까. 천지분간이 안 되는 암흑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무서웠을까. 들것에 실려 나올 때도 당신의 아픔보다 딸들을 걱정해 까만 얼굴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주시던 아버지.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겪는 지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또 한 번 툴툴 털며 일어서는 용기와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