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세초(洗草)의 물가에서

한국문인협회 로고 고진숙(종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조회수15

좋아요0

홍제천 물길 따라 북한산을 향해 걷다 보면 물소리가 말을 건다. 자분자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물결이 흐른다. 한참을 걷다 보면 할머니 집 앞마당처럼 너른 바위들이 펼쳐진다. 유독 하얗고 단단한 바위들이 많다. 너른 바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려놓은 형상이다. 정자 현판에는 '세검정(洗劍亭)’이라 새겨졌다.
나는 거의 매일 이곳을 찾아 산책한다. 너럭바위에 앉아 숨을 고른다. 당대의 문인과 화가들이 즐겨 찾았던 자리라 하니, 그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북한산 비봉과 문수봉, 보현봉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은 지금도 쉼없이 계곡을 스쳐 지나간다. 바위에 앉아 물소리를 듣는다. 종이를 씻었다는 선조들의 손길을 떠올리고 역사의 흔적을 더듬는다.
세검정은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며 성을 쌓던 군사들의 쉼터였고, 연산군의 유흥을 즐기던 곳으로도 전해진다. 또 광해군을 폐위하려던 반정군(反正軍)이 칼날을 갈아 세워두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영조는 불의를 무찌른 정의의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는 말을 듣고, 직접 ‘洗劍亭’이라는 글씨를 써 현판으로 하사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다 정자 앞 안내판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세초(洗草) 유적’, 순간 눈에 익지 않은 글자가 오래 남는다. 종이를 씻었다니.
세검정이 들어선 바위는 차일암(遮日巖)이라 불린다. 지금은 주변 풍경이 달라졌지만, 옛날에는 봄이면 연둣빛 사이로 노란 개나리가 활짝 피었고, 여름이면 짙은 그늘이 물속까지 내려앉았다. 가을이면 낙엽이 물 위를 핑그르르 돌았고, 겨울에는 물이 멈춘 듯 바위 밑에서 숨을 쉬었다.
정자 건너편에는 조지서(造紙署)의 표석이 서 있다. 왕의 명령으로 설치된 조지서는 국가 문서에서 쓰이는 표전지(表錢紙)와 지폐 용지인 저화지(楮貨紙), 그리고 각종 서적용 종이를 생산하던 관청이었다. 그 종이는 아름답고 질겼다고 전해진다. 기록을 만들어내던 관청과 그 기록을 씻어 없애던 물이 서로 마주한 자리였다.
역사의 사실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은 왕이 참석하는 모든 행사에 동행하며 사실 그대로 적었다. 그 기록은 왕조차 들여다볼 수 없었다. 엄정하게 작성된 사초가 왕의 눈에 닿는 순간, 피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이 기록된 사초를 보고 사관들을 숙청했고, 다른 왕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관의 목숨은 기록과 함께 위태로웠다. 이후 중종은 실록 편찬이 끝나면 반드시 세초를 하도록 제도화했고, 남은 사초까지 모조리 씻어 없앴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라 먹물이 묻은 한지가 찢어지지 않게 물에 씻어 바위 위에 펼쳐 햇볕에 말렸다. 이를 포쇄(曝曬)라 불렀다. 또 실록 편찬에 참여한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세초연(洗草宴)을 열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를 씻는 일은 단순한 재생의 과정이 아니었다. 기록하며 쌓아온 마음의 무게를 물에 흘려보내는 행위였다. 세초는 끝맺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물 위에 종이를 펼치던 손은 사라졌지만, 기록을 다루는 손은 여전히 바쁘다. 종이는 쌓이고, 물에 씻을 수 없는 기록은 이면지로 남는다. 그것이 나만의 세초다. 학기가 바뀔 때마다 지난 책과 노트를 정리했고, 사회인이 된 뒤엔 수첩에 빼곡히 적은 기록들이 사초가 되었다. 지금은 컴퓨터 속 수많은 파일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중요하다고 여겨 저장해 두었지만, 다시 열어보면 유치하거나 치졸한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직 실록으로 다듬어지지 못한 초고들이다.
세초는 단순히 물리적인 행위가 아니다. 묵은 먹물이 퍼져 희미해지고, 마침내 다시 백지(白紙)가 되듯, 삶의 기록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때 비로소 본질이 드러난다. 수첩과 노트, 컴퓨터 속 수많은 글은 내가 살아온 흔적이다. 미완성이지만 버릴 수 없는 시간들이다. 어떤 날은 과감히 지우고 싶고, 어떤 날은 다시 꺼내 읽고 싶어진다. 이제는 안다.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 감히 지우는 역설의 의식이라는 것을. 더 정제된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오늘도 세초의 물가에 앉는다.
어떤 때는 마음속을 세초한다. 뒤엉킨 감정과 서투른 문장,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씻어내고 다시 문초(文草)를 적는다. 그게 곧 세초를 기다리는 자기 다듬기의 통과의례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