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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굽은 멈췄으나 역사는 달린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권예자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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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본 말의 눈망울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먼 길을 돌아온 여행자의 눈빛처럼 깊고 맑으면서 어딘가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눈빛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역사 속 말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처럼 떠오른다.
말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라, 인간의 꿈과 좌절을 함께 짊어진 동행이었다. 전쟁터에서, 길 위에서, 삶의 가장 치열한 순간마다 그들의 발굽은 인간의 운명을 묵묵히 등에 태우고 달렸다. 그 사연들은 내 삶의 어느 순간에도, 누군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항우의 오추마(烏馬) 일화는 그 눈빛과 겹치며 내 마음을 오래 흔들었다. 오추마는 검은 털에 흰빛이 스며든 준마였다. 오직 항우만이 길들일 수 있었고 항우만을 태웠다. 수많은 전장을 함께 누비며 초나라의 기개를 드러냈다.
절망의 순간 항우는 해하가(垓下歌)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건만,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패배의 순간에 주인이 자결할 때도 그 곁을 지켰던 말이다. 이는 짐승의 근육 위에 새겨진 주군을 향한 충절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전해진다.
삼국지의 적토마(赤兎馬)는 또 다른 불꽃이었다. ‘사람 중에는 여포, 말 중에는 적토’라 불리며 하루에 천리를 달리던 말. 관우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전장을 누빌 때, 적토마도 붉은 갈기와 함께 달렸다.
훗날 관우가 오나라에 생포되어 참수된 뒤, 관우를 잊지 못한 듯 먹이를 거부하다가 굶어 죽었다. 이 고사는 명마의 의리를 보여준다. 그 충직한 죽음은,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삶의 무게가 달라짐을 일깨워 준다.
서양에서도 인간과 말의 운명은 깊이 얽혀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케팔로스(Bucephalus)는 그림자를 두려워하던 사나운 말이었다. 어린 알렉산더는 태양을 향해 돌려세워 그를 길들였다. 이후 세계 정복의 길을 함께 달리며, 인간과 말의 동행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었다. 인도 원정 중 죽자, 알렉산더는 도시 '부케팔리아’를 세워 그를 기렸다. 정복자의 야망 뒤에는 언제나 이처럼 말의 묵묵한 발걸음과 거친 숨소리가 깔려 있었다.
나폴레옹의 마렝고(Marengo)는 작지만 단단한 체구를 가진 아라비안 종마였다. 황제는 자신의 야망을 지탱하기 위해 이 영리한 백마와 함께 알프스를 넘었고,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해 이름을 얻었다. 이후 수많은 전장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달린 그는 단순한 탈것이 아니라 황제의 고독한 결단을 등에 태운 유일한 동반자였다.
권력과 야망, 승리와 패배의 순간까지 그의 발굽은 유럽의 심장부에 당당하게 울려 퍼졌다. 워털루 패배 후 영국에서 죽었고, 그 유골은 런던 국립 육군박물관에 보존되어 한 시대를 호령했던 거인의 발이 되어 준 말로 남아 있다. 그는 살아서는 황제를 태우고 죽어서는 역사를 증명했다. 나는 마렝고의 생애를 통해, 영광과 몰락이 모두 인간의 선택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몽골의 초원에서는 이름 없는 수많은 말들이 칭기즈칸의 군대를 실어 나르며 유라시아 대륙을 흔들었다. 칭기즈칸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기는 쉬우나, 내려와서 천하를 다스리기는 어렵다’라고 말했을 만큼 평생을 말과 함께 숨 쉬었다. 병사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말을 갈아타며 원정을 이어갔고, 말은 자신의 젖과 피로 그들의 허기를 채우며, 척박한 땅에서 생존의 유일한 통로가 되어 주었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 작은 말들은 거친 초원의 풀을 씹으며 유럽의 기사들을 압도하는 속도를 만들어냈다. 칭기즈칸의 영혼이 아홉 마리 백마의 갈기 속에 스며들었다는 전설을 들으며,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언제나 이름 없는 존재들의 헌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역사에도 말과 함께한 안타까운 순간이 있었다. 임진왜란 초, 충주 탄금대에서 패전한 신립(申砬) 장군은, 말을 타고 강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 지형의 제약과 압도적인 적의 화력 앞에서 기병의 힘은 꺾였지만, 그는 끝내 말을 떠나지 않았다. 말은 때로 주인의 오판과 비극마저 등에 지고 달렸다. 지금도 탄금대에 가면, 주인의 운명을 등에 지고 강물 속으로 사라진 말발굽 소리가 바람 속에 들리는 듯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야망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말이 있었다. 역사의 길은 말의 발굽 위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과 함께 달리다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대지와 강물, 초원의 기록 속에 남아 있다.
말은 유한한 동물이다. 그 뜨거운 호흡은 언젠가 멎는다. 그러나 인간과 말이 함께 달린 순간은 역사의 가장 깊은 기억으로 이어진다. 이제 우리의 길은 차가운 금속 엔진과 매끄러운 타이어가 대신한다.
위풍당당할 기개는 좁은 경마장에 갇혀 있고, 늠름한 자태는 목장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이야기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 뜨거운 연대감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다시 달릴 힘을 건네준다.
나는 들판의 이슬 위에서, 도시의 삭막한 소음 속에서, 낡고 오래된 책의 갈피에서 문득 장엄한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시골 마구간에서 마주했던 그 고요한 눈망울 속에 거대한 역사의 파동이 담겨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의 진실이다. 발굽은 멈췄으나, 역사는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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