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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의 죄

한국문인협회 로고 서태양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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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라 거실에 들여놓은 화분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특히 우담바라만큼 꽃을 보기가 어렵다는 녹보수가 세 번씩이나 단아한 꽃을 피웠고, 이어서 게발선인장이 붉고 현란한 꽃을 지속적으로 피우고 있다. 동백도 오래전부터 꽃망울이 일곱 송이가 맺혀 개화를 기다리고 있고, 제라늄도 초록잎 사이에 꽃대가 길게 올라와 있다. 7년 만의 입춘 강추위로 몸과 마음은 아직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이지만 아름다운 꽃을 선물해 준 고마운 화초들 덕분에 행복하고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대한도 지나고 입춘도 지났으니 화사한 봄이 더 가까이 다가온 느낌이다.
이참에 고마운 꽃들을 위해 화분들을 깨끗하게 손질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먼저 화분에 쌓인 마른 잎과 검불을 걷어내는데, 작은 동백과 게발선인장 사이에 티끌 같은 줄기 하나가 삐죽 솟아 있었다. 잎도 없이 죽은 식물 같아서 무심히 뽑으려니 제법 단단하게 박혀 있어서 힘주어 당겼더니 싱싱하고 하얀 실뿌리가 딸려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아차,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구나!’ 난감하여 뽑은 식물을 들고 한동안 망설이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줄기의 끝부분에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싹이 움트고 있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식물을 별생각 없이 뽑아 버린 것이다. 화분 손질을 시작할 때의 의도와는 달리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비록 식물이지만 엄연히 살아 있는 소중한 생명이 아닌가? 본의든 아니든 생명을 해치는 일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무겁다.
괜히 작은 생명에게 못 할 짓을 한 것 같아 미안하고, 어떤 방법으로든 속죄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우선 정체불명의 이 작은 나무를 살리기 위해 서둘러 따로 심어 줄 빈 화분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베란다 창고에서 빈 화분 하나를 찾아냈다. 그런데 나무를 심을 흙이 없다. 지금 흙을 사러 가기는 어렵고, 다른 화분의 흙을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작은 나무를 심어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던 중 식물 없이 마른 흙만 담겨 있는 작은 화분을 발견했다. 먼저 마른 화분에 물을 뿌려 흙을 적신 다음, 모종삽으로 흙을 떠서 빈 화분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젠 다른 화분에 더부살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랄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다’라고 자위하면서 윗부분의 흙을 걷어내고, 밑의 흙을 떠내려는데 무엇인가 딱딱하게 걸리는 것이 있었다. 손가락을 넣어 잡히는 것을 당겨 올렸더니, 위쪽엔 뾰족한 새싹이 움트고 있고 뿌리는 유달리 발달하여 긴 수염 같은 모습을 한, 살아 있는 식물이었다.
‘아,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연거푸 벌어지고 말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해 제비꽃 모종을 심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보라색의 작은 꽃이 너무 예뻐서 화분에 심어 놓고 정성껏 보살폈지만, 안타깝게 죽고 말았다. 그리고 죽은 제비꽃 화분을 베란다 구석에 방치했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달리 제비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고, 그동안 물기도 없는 마른 화분 속에서 생명 유지를 위해 뿌리를 발달시켜 가며 기약 없는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지도 않은 생명을 겉모습만 보고 죽은 것으로 경솔하게 판단해 버린 나의 무관심이 화를 부르고 말았다.
‘아, 나와 인연을 가진 것들에 대한 무관심이, 이렇게 죄가 될 수도 있구나!’
지금껏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며 살아온 날들이 얼마였던가? 종심을 넘어선 나이에 실수를 거듭하고 보니, ‘나이도 다짐도 다 부질없다’라는 자괴감과 지난날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혹시 나도 모르게 또 다른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내 주변 인연들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일이다.
더욱이 내면보다 비주얼에 열광하며 올인하는 현 세태를 생각하면, 섬뜩하기도 하고 두려운 생각도 든다. 최근 들어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묻지마 범죄의 대부분이 눈에 보이는 것 위주의 단세포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정체불명의 작은 나무 ‘삐죽이’는 빈 화분에 따로 심어 주고, 마른 화분에 깊숙이 묻혀 있던 제비꽃은 큰 화분의 홍콩야자 곁에 다시 정성껏 심어 주었다. 그동안 힘겹게 잘 버티어 준 제비꽃이 고맙고, 늦었지만 다시 내 손으로 거두어 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삐죽이 새순과 앙증맞은 보랏빛 제비꽃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두 식물이 건강하게 회생하길 기다려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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