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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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안와사가 찾아온 뒤로 나는 매일 한의원에 들러 침을 맞는다. 진료실 문을 열면 한의사는 어김없이 ‘이-, 오-, 아-’를 해 보라고 시킨다. 침이 더디 듣는 날이면 그는 조용히 묻는다.
“어제, 몇 시간 주무셨어요?”
그 한마디가 뜻밖에도 오래 남았다. 밤 열 시에 누워도 새벽 세 시 반이면 눈이 뜨이고, 깨고 난 뒤에도 삼십 분은 더 누워 억지로 여섯 시간을 채워 보려 애쓴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잠이 너무 짧다며 걱정을 건네지만, 나는 어느새 내 삶 어딘가에 남아 있던 ‘잠의 빈자리’를 더듬어 보고 있었다.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잠을 잘라 쓰는 편이었다. 중학교 3학년, 교실을 떠돌던 ‘4당5락’이라는 말은 아직도 서늘한 그림자로 가슴 한편에 남아 있다. 네 시간을 자면 붙고 다섯 시간을 자면 떨어진다는 단정한 문장은 어린 마음의 밤을 가장 먼저 깎아내렸다. 그때부터 내 밤은 늘 짧았고, 아침은 회복의 시간이 아니라 또 다른 긴장의 예비군처럼 다가왔다. 그 짧은 밤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내 안에는 보이지 않는 틈 하나가 만들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군복무 시절에도 그 틈은 더 벌어졌다. 동료들이 여섯 시 기상나팔을 악마의 소리처럼 들었다면, 나는 오히려 담담히 받아들였다. 전역 무렵 치른 7급 공채에 합격하고 공직에 들어선 뒤에도 잠은 늘 뒷자리에 있었다. 낮에는 업무를 익히고 밤에는 방송통신대학 공부를 이어 갔다. 박사 과정까지 밟으며 나는 하루를 늘리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잠을 희생했다. 젊다는 이유 하나로 피로와 몸의 신호를 밀어내며 성취라는 명분 아래 밤을 줄여 왔다.
얼마 전, 오십여 년을 함께한 고교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각자의 수면 시간을 물은 적이 있다. 가장 오래 자는 친구는 아홉 시간 반이라고 했다. 평균은 여덟 시간, 나는 다섯 시간 반. 그 숫자들을 듣는 순간 내 안에 깊게 패인 공백이 더 선명해졌다. 젊은 날 버티며 쌓아 올린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있고, 그 기억들이 이제 와서 몸의 불편함으로 되돌아오는 듯했다. 그것은 단지 부족한 잠이 아니라 한 시대를 견디며 깎아낸 나의 일부였다.
수면 연구에서는 성인에게 7∼8시간을 권장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아침에 얼마나 개운한지, 하루의 집중과 마음의 흔들림이 어떻게 변하는지다. 잘 잤는가의 기준은 결국 아침의 표정으로 드러난다. 나이 든 이들에게 잠의 부족은 더 큰 파문을 일으킨다. 면역력 저하, 혈압 상승, 심장·뇌혈관 질환 위험 증가, 기억력의 흐려짐…. 여섯 시간 이하의 수면이 치매 위험을 높인다는 보고도 있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하면 뇌가 독성 단백질을 비우는 청소 과정이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래 방치된 공백은 마침내 몸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이제 나는 젊은 날처럼 ‘버티는 방식’으로 삶을 밀어붙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잠의 빈자리’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나는 조금 늦게나마 그 빈자리를 천천히 메우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기상 시간으로 리듬을 세우고, 새벽에는 한 시간 걷는다. 걷기 뒤에는 식염 온천장에서 몸을 데운다. 하루 20분 햇빛을 받으며 멜라토닌의 리듬을 맞추고, 오후 2시 이후에는 카페인을 멀리한다. 잠들기 전 간단한 체조로 호흡을 가라앉히고, 방 온도는 20도 정도로 맞춘다.
이 작은 실천들은 단순한 생활 개선이 아니라 오래 비워 두었던 자리 하나에 다시 온기를 채우는 작업이다. 구안와사가 남긴 불편함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자, 내 나이에 맞는 속도를 되찾으려는 몸의 요청이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찾아올 작은 변화.
“오늘 아침은 조금 다르구나.”
그 미세한 온기의 발견이 남은 시간을 더 단단하게 버티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나는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잠은 몇 시간 자야 하는가.”
오래 돌아온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아침의 얼굴에 미소가 고요히 남을 만큼.
일흔이 지난 나는 이제야 안다. 잠에도 나이가 있으며, 그 나이에 맞는 밝기와 속도가 있다. 억지로 밤을 밀어내던 시절은 멀어지고, 아침을 받아들이는 내 표정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어쩌면 아침 햇살의 기울기조차 달리 느껴지는 것은 늦게나마 내 안의 빈자리를 돌아보고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내게 맞는 밤을 천천히 다시 배우는 중이다. 오래 비워 둔 자리 위에 내려앉는 미소의 온도가, 남은 시간을 붙들어 주는 가장 오래 가는 힘이라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