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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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아내와 어린 딸들을 남겨 두고 떠난 그도 정녕 가고 싶은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보고 싶을 때마다 힘들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는 나를 분명 그는 보았을 것이다. 어쩌다 꿈에서라도 만나게 되면 그리도 반가웠는데, 너무도 짧은 만남은 아쉬움으로 끝나 가슴이 먹먹해 왔다.
1965년 여름, 그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던 날은 달맞이꽃이 흐드러지게 핀 밤이었다. 내 나이 스무 살, 그는 스물한 살, 나와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반듯한 외모에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당시 아버님은 검인정 교과서를 취급하는 문구점을 운영하셨고 우리 집보다는 부유한 가정이었다.
그해 가을, 그는 나라의 부름을 받아 입대했고 가끔 편지를 보내왔다. 보고 싶다는 말과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내 마음은 더없이 기뻤다. 데이트하던 날, 수정교 다리에서 아버지와 딱 마주쳤다.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안녕하십니까.”
“휴가 왔나?”
군복을 입은 그가 씩씩하게 거수경례를 하니 엄하기로 소문난 아버지는 얼떨결에 대답하신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께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군 복무를 마치자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다. 그가 취직된 곳은 시고모님의 아들이 운영하는 보르네오 원목이 들어오는 부산 현장이었다. 근무처로 간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사고가 나서 크게 다쳤고 나를 찾는다는 급한 연락이 왔다. 부산대학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절하듯 주저앉고 말았다. 건강했던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무릎 아래 두 발이 절단되어 있었다.
“혼이라도 네 곁에 있고 싶어.”
나를 보자마자 건넨 첫마디였다.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그의 큰형님은 가톨릭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으로 계셨는데 바로 이곳 부산병원으로 옮기셨다. 그날로부터 세 번의 큰 수술을 받았고 형님의 보살핌으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는 심한 고통에서도 신음 한번 없이 이겨 내고 있었다. 그리곤 부모님이 주신 몸을 잃어 죄송하다는 편지를 썼다. 치료받을 때마다 입술을 깨물며 참아내는 그를 보며 내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을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시면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부처님께도, 하나님께도 간절히 기도했다. 일 년여의 병원 치료를 마치고 세브란스 재활과에서 의족을 했다. 결국, 극구 반대를 하셨던 내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나는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 사랑의 힘은 그 모든 것을 이겨 내고야 만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체험했다.
시동생과 함께한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니 아버님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보이셨다.
“고맙다. 시집와 주어서.”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다. 결혼하고 보니 집안 분위기가 참 따뜻했다. 약주가 잦으셨던 친정아버지는 흥이 많으셨지만, 술주정 때문에 어머니가 간혹 곤욕을 치르시곤 했다. 그런데 시아버님은 과묵한 성품이시고 어머님은 어질고 심성이 고우신 분이셨다. 팔 남매를 낳으셨는데 매 한번 댄 적이 없다고 하신 말씀처럼, 오직 사랑으로 키우셨음을 알 수 있었다.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그는 전자기술 일급 자격증을 취득했고 아버님의 배려로 문방구 옆에 전파사 문을 열었다. 그리고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는 너무 기뻐했다.
컬러TV가 처음 보급되면서 ‘금성대리점’으로 점포가 확장되었다. 휠체어에 앉아 모든 일을 성실하게 처리했고 삼 년 만에 창고 지을 땅도 살 수 있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아침 화장을 하고 차 한 잔을 들고나가니 “우리 마누라 참 예쁘다”고 느닷없이 그가 말했다. “이제 알았어요?” 우리는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했다.
처음 산 새 자동차를 공업사에서 개조해 손수 운전하며 기사들이 안테나를 빈틈없이 설치하도록 지켜보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 덕에 딸들과 나는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그러던 12월의 어느 날, 무엇이 탈이 났는지 두드러기가 심했다. 잠자리 들기 전에 약 한 봉지를 더 먹었는데 그 밤, 그는 한마디 인사도 없이 가족을 두고 홀연히 떠났다. 약물에 의한 쇼크사라고 했다. 결혼 십 년 만의 일이었다.
내가 왜 이 사람을 그토록 좋아했는지 가끔 생각할 때가 있다. 그는 남다르게 좋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우선 과묵하고 성실함이 좋았다. 어머님의 성품을 닮아 어질고 착해 아이들에게는 자상한 아빠,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한 남편이었다. 비록 몸은 불편했지만,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정을 지켜 준 가장이었다. 내가 결코 그와 견줄 수 없었던 것은, 그는 짧은 삶을 살고 갔지만 두렵거나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 기억이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내가 힘들다고 투정을 부렸을 뿐, 그의 넓은 가슴에 내가 활개 치며 살았다. 명절이 되면 언제나 나를 챙겨 주는 큰시누이가 올해도 어김없이 금일봉을 보내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카톡으로 보냈더니 “언니 덕분에 셋째오빠가 행복하게 살다 가셨어요” 하고 나를 위로한다.
나는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생선 가시 발라 밥을 먹이던 모습, 친구들과도 형제들과도 손님들을 접할 때도 그는 잘 웃었다. 인성이 바르고 속이 깊었던 사람, 호쾌하게 웃던 그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나 이제 하나님 아버지 자녀가 된 지 십여 년, 특별하게 주시는 평안으로 살았다. 어느 때라도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 ‘혼이라도 내 곁에 있고 싶다’고 한 그에게 나도 한마디 들려주고 싶다. ‘우리는 늘 함께했었다’라고, 그리고 ‘진정 사랑했노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