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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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이 짙다. 공원에는 꽃무릇이 지천이다. 활활 타올라 사방으로 불꽃이 튀던 시기는 살짝 지난 듯하다.
여자 셋 앞서거니 뒤서거니 숲길로 들어선다. 분명 까르르 까르르 웃음소리가 높았는데 치솟는 불길 앞에서 웃음기를 싹 거둔다. 하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아닌가. 검은 선글라스의 여자, 눈 화장이 짙은 여자, 입술 연지가 붉은 여자가 꽃 속으로 뛰어든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 석양에 타는 놀 같다며 여자가 색안경을 벗는다. 얼굴이 불에 덴 듯 쓰리다며 가운데 선 여자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시늉을 한다. 불가마도 필요 없겠다고 옆에서 맞장구를 친다. 분홍이나 노란색을 띤 상사화와 달리 꽃무릇은 겁 없이 제 몸을 태우고 있다.
용천사나 불갑사, 선운사 등 절집에서 만나던 꽃무릇은 동네 공원에 무리 지어 피었다. 아파트 화단에도 얼굴을 내민다. 남쪽 마을에선 이십만 평 군락지를 자랑하고 일부러 조성한 꽃무릇 공원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온 세상에 불화살을 마구 쏘아 댄다. 내 마음에도 꽂혀 쩌릿하게 아프다.
석산(石蒜)이라고도 불리는 꽃무릇은 구월에 개화한다. 아침과 저녁의 서늘한 기운이 생명력을 북돋운다. 애오라지 짙은 선홍빛으로 승부한다. 상사(相思)의 애절함이 빠진 유혹의 몸짓이다. 화관까지 갖춰 쓰고 있으니 더 그렇다. 그나마 향기가 없다는 것은 다행인지 모른다.
구월 중순이 지나자 영광 불갑사 일주문으로 사람들이 밀려든다. 울창한 숲 사이로 붉디붉은 꽃무릇이 만개해 바다를 이룬다. 사람들은 그곳에 몸을 던지고자 전국 각지에서 떼를 지어 온다. 영원히 꽃과 잎이 만날 수 없는 이 상사의 꽃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룰 수 없어 애끓는 사랑 따위는 아예 남의 일인지라 그들은 불속으로 뛰어들어 사진 찍기에 여념 없다.
저를 빛내 줄 초록 이파리 하나 없다. 여린 대궁을 올려 꼿꼿하게 버티다 툭 쓰러져 버린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나는 제 몸 태워 소신 공양을 올린 꽃을 향해 두 손을 모은다. 애틋하다 못해 서럽다.
그늘진 곳에 떼를 지어 번지는 이 꽃은 뿌리에 강한 독성이 있다. 뿌리를 찧어서 사찰의 단청이나 탱화에 바르면 좀이 슬거나 벌레가 꾀지 않는다. 방부 효과를 위해 오래 전부터 사찰에서 심어 가꾸던 꽃이다.
어머니는 절집에 피었다고 중무릇이라 불렀다. 이른 아침, 관음전 돌담에 기댄 예닐곱 포기 중무릇과 마주한다. 금강경은 말한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절집에 피었으나 꽃이란 것도 형상이 있으니 허망하기는 마찬가지다.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한다. 꽃도 잎도 서로 형상을 볼 수 없다면 그곳이 부처의 세계일까? 괜히 쓸쓸하여 일어서지 못한다. 가을, 금강경을 읽는다.
색색의 자태를 뽐내던 단풍이 이울자 겨울 철새가 강으로 날아든다. 태화강 상류로 청둥오리 가족이 찾아왔다. 천연기념물인 원앙도 무리를 이루어 힘찬 날갯짓을 한다. 이맘때면 겨울꽃을 만나러 간다. 남도의 절집으로.
불갑사는 진초록의 바다다. 꽃이 진 자리에 눈 시린 초록이 끝없이 펼쳐진다. 치열하게 튀던 불꽃은 흔적도 없다. 그 자리에 상사의 애태움으로 땅을 더듬듯 잎 피워 대지를 덮었다. 비로소 형상이 있는 것은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스님 두 분이 녹색 바다를 가르며 걸어온다. 속세간으로 잠시 외출을 하는 모양이다. 햇빛도 초록으로 내려 먹빛 장삼과 대비되어 은근하다. 마치 바닷길을 건너는 선지자 같다. 스님께 합장을 하자 환한 웃음으로 답한다. 후끈한 열기로 고무되었던 가을에는 느낄 수 없는 생량한 자애로움이다.
금강문과 천왕문 그리고 만세루를 지나 마침내 대웅전 마당에 발을 들여놓는다. 담담하고 고요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배경으로 팔작지붕의 대웅전이 두둥 떠오른다. 찬 기운 속에 기와지붕 선이 또렷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대웅전 분합문에 핀 수백 송이 꽃이 다가와 안긴다. 정면 3칸이 모두 솟을꽃살문이다. 어칸의 3짝 문에는 연꽃과 모란이 피었다. 좌우 협칸 3짝에도 민꽃살문과 빗금강저꽃살문이다. 화려하지만 정교하다.
사위는 고요한데 문살에 핀 꽃이 겨울 방문객을 위해 대웅전 서사를 엮어 낸다. 지난가을에는 왜 보이지 않았을까. 온통 붉음에 쏠리어 눈멀고 귀는 막았던 것일까. 온갖 색의 번잡함이 물러난 자리에 비로소 꽃살문이 주는 사유가 드러난다.
나는 꽃과 마주하며 오래 서 있다. 나무로 투각하여 꽃을 만들고 꽃과 꽃 사이는 틈을 남겨 두었다. 그 틈으로 빛이 스미고 바람이 지난다. 빛과 바람이 있어 한 송이 한 송이 지혜로 피어나 큰 꽃밭이 되어 서로를 비추고 있다. 엄청난 시간의 축적이다.
불교에서 꽃은 깨달음이다. 화엄경(華嚴經)은 부처님의 공덕이 꽃처럼 장엄하게 펼쳐진 경전을 말한다. 꽃살문은 단순히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가 아니라 화엄의 세계로 들어가는 상징적 관문이요 길이다. 꽃살문은 나무를 엮어 만든 그물이다. 그러니 막고 닫으려는 의도가 없는 문이다. 지상의 꽃이 만개하여 절집을 두루 장엄할 때는 알지 못한다. 꽃이 진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화엄의 세계가 열린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문밖에 있지만 이미 안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대웅전 동쪽도 3칸 모두 꽃살문이다. 동쪽으로 난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발을 들인다. 안에서 본 꽃살문은 색이 없어 지극히 소박하다. 화려함 뒤에는 검박함이 숨어 있음을 조용히 알려 준다. 빛의 방향에 따라 음영이 달라질 뿐이다. 햇빛은 매번 다른 각도로 들어와 여러 가지 무늬를 만든다. 한 조각 한 조각 짜 맞춘 문살의 속살을 보며 화엄의 세계에 다가간 장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화엄경은 말한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다.’ 그렇다면 나도 이미 나무의 한 조각이 되고 바람 한 자락이 된다. 목조 여래 삼세불 앞에 무릎을 꿇는다.
겨울은 화엄경을 읽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