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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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세례. 수학 30점.”
“푸하하, 그러게 다섯례라고 지었음 50점인데….”
“세례, 네례, 다섯례, 하하하.”
친구들은 특이한 이름 ‘세례’를 놀리기 좋아했다. 딱히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가끔 도가 지나쳐서 화가 날 만한데, 세례가 항상 배시시 웃고 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듣다 못한 반장 총명이가 한마디 했다.
“세례야, 그냥 넘어가자. 죄의 후손들이라서 그래 쩝….”
세례는 자기편을 들어주는 총명이가 마땅치 않았다.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총명이의 눈빛이 구슬이를 향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이렇게 친구들이 놀릴 때면, 세례는 날쌔게 달려가는 장소가 있었다. 오늘도 집 뒤뜰에 엎어져 있는 노란 손잡이 바가지를 뒤집어 보았다. 그 안에는 딸기잼이 가득 묻힌 샌드위치와 초승달 모양이 새겨진 큰 구슬이 있었다. 샌드위치를 입에 가득 물고 우물거리자 목이 콱 막혔다. 너무 허겁지겁 먹었나 보다.
“캑캑.”
“아이고, 내 이럴 줄 알았어, 이거.”
뒤따라 헐레벌떡 달려온 구슬이가 생수병을 내밀었다. 꾸울꺽 하고 물과 함께 딸기잼 샌드위치를 삼킨 세례가 물었다.
“구슬아, 너하고 총명이가 보나마나 수학 만점이지?”
“응.”
“좋겠다.”
“그런 말이 나와?”
“응, 내 이름을 십례라고 지어 달라 그럴걸.”
“오빠는 연날리기가 1등이잖아? 나는 그게 더 멋있는데.”
“정말? 나랑 같이 연 날리러 가자.”
“오빠는 연을 날리고, 나는 풀반지를 만들고.”
구슬이는 부모님이 둘 다 장사를 하셔서 잠시 외할머니댁에서 학교에 다녔다. 3학년인데, 4학년인 세례를 잘 따랐다. 세례는 부모님을 일찍 잃고 할아버지와 살았다. 세례는 연싸움 1위였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방패연은 천하무적이었기 때문이다.
세례가 사는 동네에는 유난히도 꽃들이 많이 피었다. 할아버지는 꽃을 좋아하는 세례를 위해서 작은 꽃밭을 가꾸셨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꽃들은 구슬이처럼 고고했다. 빨간 히아신스가 향기를 토하고, 튤립은 수줍게 고개 숙였다. 벽에 기댄 금낭화는 음표처럼 하늘거렸다.
코로나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2020년 3월, 세례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세례는 한 번도 연줄이 끊긴 적 없던 방패연들을 비닐로 싼 후, 푸른 상자에 넣어서 뒤뜰 꽃밭에 묻어 두었다. 세례는 마음이 아파서 더 이상 연을 날릴 수가 없었다.
부잣집 총명이와 구슬이도 캐나다로 이민했다. 중학교에 다닌 후부터 세례는 생존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늘 마음에 새겼다. 세례는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도시에 자취방을 얻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세례는 수업을 마치고 꽃배달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즈음 구슬이네 집이 망해서 구슬이가 학교를 휴학하고, 화장품 다단계 판매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경우 바른 구슬이가 친구들에게 화장품을 팔아달라고 청한다는 것이 세례는 믿기지가 않았다. 구슬이는 천 원 한 장도 빌리지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꽃들이 들판에 가득 핀 3월이면 세례는 늘 할아버지가 그리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세상은 코로나를 잊었다. 코로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만의 슬픔이었다. 세례는 하늘나라에 계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열심히 새벽기도를 다녔다.
봄비가 나뭇잎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세례는 꽃집 주인이 감기에 걸려서 꽃배달 대신 꽃집을 정돈하고 있었다.
“프리지어 한 단 주세요.”
세례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구슬이의 목소리다. 프리지어는 구슬이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다.
“혹시….”
“세례 오빠? 딸기 샌드위치 주던 구슬이야, 나 구슬이.”
“캐나다에 살지 않아?”
“아니.”
슬퍼 보이는 구슬이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세례는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세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둘은 함께 다녔던 동네 교회에서 결혼언약식을 했다. 세례와 구슬은 3년 동안 구슬 통장에 돈을 알뜰히 모으기로 했다. 그리고 그 모은 돈으로 결혼식을 하고, 집도 사기로 했다. 세례는 돈을 벌기 위해 원양어선을 탔다. 그리고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서 구슬이에게 보냈다.
눈 깜짝할 새 3년여가 흘러 도시로 돌아온 세례는, 구슬이가 기다릴 원룸으로 바람보다 빠르게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삐이꺽.
낡은 손잡이에서 쇳소리가 나며 둔탁하게 문이 열렸다. 원룸 문이 열리자 웬 낯선 사내가 나왔다. 그는 구슬에 대해 물어보는 세례에게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구슬의 근황을 알아보러 근처 부동산을 찾아갔던 세례는, ‘구슬이 크고 노란 가방을 끌고 떠났다’는 말만 반복해서 들었다. 그는 미친 듯이 구슬을 찾았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례는 싸락눈이 내리는 길을 비틀거리며 걷다가, ‘오늘’이라는 카페의 작은 간판에 끌렸다. 그는 지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오늘’이라는 단어가 그에게는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는 선장이 쥐여준 용돈 10만 원이 꼬깃꼬깃 구겨진 채로 들어 있었다.
카페 ‘오늘’에는 마음을 읽는 마술사가 있었다. 마술사는 늘 예수님께 기도하는 장로님이었다. 마술사는 독한 에스프레소를 3잔이나 거푸 시키며,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켜는 세례를 조심스레 지켜보더니, 옷소매를 가볍게 톡톡 치면서 곁에 앉았다. 찬 기운이 밴 세례의 외투에 마술사의 체온이 스며들었다. 세례는 따스한 기운을 느끼자,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서 세례가 울음을 멈추자, 마술사가 톡 하고, 카페 안에 설치된 작은 전구들을 켰다. 형형색색의 커피잔들이 빛나면서 <Amazing Grace> 백파이프 음이 흘러나왔다. 눈물에 젖은 세례 앞으로 마술사가 다가갔다.
마술사의 손에는 끊어진 실이 양손에 들려 있었다. 마술사는 끊어진 실 가운데 세례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끊어진 실이 감쪽같이 이어져 있었다. 마술사가 마음을 들켜버린 세례의 등을 따스하게 감싸안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가게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싸락눈이 함박눈으로 바뀌어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몇 년이 지난 후, 3월 샛노란 수선화가 호숫가에서 서로서로 몸을 비비며 수다를 떨 무렵이었다. 마술사는 겨울의 먼지를 털며 봄맞을 준비로 카페 문을 활짝 열었다. 바로 그때, 보조개에 미소를 띤 남자가 귀여운 여인의 손을 꼭 잡고 카페 ‘오늘’로 들어왔다. 남자의 옷소매는 낡고 헤어져 있었으며, 바다 비린내가 확 코를 찔렀다. 마술사는 두 개의 찻잔에 매화꽃차를 준비하며 눈부신 미소로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