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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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 좋아해요?”
“네?”
“에스프레소 좋아하시냐고요. 좋아하시면 타드릴까 싶어서….”
공문 발송을 앞두고 서둘러 계획서를 작성하던 나는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 들어왔을까. 쉬이 남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교실의 단단한 문은 휑하니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둥근 얼굴이 빼꼼 내밀어지며 나를 보곤 싱긋 웃고 있었다. 김세희, 올해 옆 반으로 발령 온 여선생님이었다. 나는 불청객의 방문에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 확실하게 의사를 표하기로 했다.
“김세희 선생님.”
“네?”
기대를 품은 듯 커지는 눈망울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는 괜찮으니까 혼자 드세요.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아… 그러세요?”
“네, 아마 여유가 없을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가시면서 문 좀 닫아주세요.”
언뜻 차가워도 보이는 나의 말과 행동에 그녀는 짐짓 슬픈 듯 시선을 아래로 향하더니 이내 조용히 문을 닫고 가버렸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그녀의 마음 또한 내게서 멀어지기를 바라며 나는 시선을 다시 모니터로 향했다. 쓸쓸하게 돌아서던 얼굴이 마음의 잔상으로 남았는지 모니터가 한없이 흔들거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껌뻑이며 키보드로 다시 손을 올리던 차였다.
피익!
“아!”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고 간신히 작업을 이어가려는데 하필 정전이라니. 나는 터져 나오는 울분을 참지 못하며 탄성을 지르곤 머리를 부여잡은 채 한참을 괴로워했다. 무려 두 시간이나 걸린 작업이었다. 오늘 완료하고 집에 갈 생각이었는데 내일 언제 또 이 작업을 다시 해서 끝낸단 말인가. 나는 학생 교육에 전념하지 못하고 업무에 매몰되어가는 교직 풍토를 탓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하자.”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내일 학생들에게 알릴 내용을 칠판에 판서한 후 빠르게 짐을 정리하여 문밖으로 나갔다. 학생들과 힘들었던 신경전, 김세희 선생님과의 일, 정전으로 인한 사고 등이 겹치니 어서 집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냥 축 늘어진 채 아무 생각 안 하며…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듯 교실 자물쇠를 잠그는 내 손놀림이 빨라졌다.
찰칵.
학교에서의 일은 학교에서의 일로 두고 이제는 방과 후의 삶을 즐기고 싶다. 방과 후까지 학교 일을 고민하고 생각하기엔 내 삶이 너무 지치니까 말이다. 늘 신조로 삼던 다짐을 다시 한번 되새김하며 몸을 돌리는데 발에 무언가가 툭 부딪쳤다.
‘불법 상인들이 들어왔다 갔나?’
속으로 작게 읊조리곤 손으로 집어 살펴보니 아담한 사이즈의 흰 텀블러가 수줍은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배에는 별 모양의 작은 메모지를 예쁘장하게 붙인 채.
‘서홍석 선생님. 오늘 힘드셨죠? 혼자 먹기엔 양이 많아서요. 퇴근하시면서 맛있게 드시고 힘내세요! ’
“하….”
메모 내용을 살핀 나는 쓴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세상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밀어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사람 관계, 특히나 남녀 관계에서 더욱 크게 작용하는 것을 세상을 어느 정도 산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밀어냄을 당하는 처지에서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그녀는 나의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힌 사람처럼 머리를 잘게 흔들곤 손 안에 든 텀블러를 쓰다듬었다. 날씨가 추워서일까 오늘따라 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 손안에서 그녀의 손길이 머문 듯했다.
고민하던 나는 몇 번을 망설이며 더듬다 텀블러 뚜껑을 열었다. 갓 내린 에스프레소의 고운 향이 적막하고 냉담한 복도를 물들이며 고목 또한 서서히 물들였다. 천천히 기울여 맛을 음미하자 그녀를 닮은 듯 진하고 깊은 맛이 배어 나왔다. 나처럼 가벼운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뚜껑을 덮어도 사라지지 않는 에스프레소의 진한 여운은 오래전에 잊었던 여인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홍석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알면 알수록 깊은 그런 사람이요.”
2019년이 지나던 그해의 끝. 에스프레소가 담긴 커피잔을 입가에 천천히 기울이던 그녀는 나에게 잔을 넘기며 그렇게 말했다. 전해져 오는 향긋한 에스프레소 향에 빠져 바로 목울대를 넘기던 나는 곧 당황하여 입을 벌리곤 어어 하다 조금 늦게 대답했다.
“내, 내가? 이런 어쩌나. 나는 누구보다도 얕은 사람이라 수영도 못 하는 사람인데? 사람 잘못 봤어.”
그렇게 킥킥 웃으며 그녀를 향해 농을 던지던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곤 웃던 입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샌가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그녀의 하얀 볼을 타고 넘어 거친 바닥까지 내려앉을 참이었다. 나는 당황하여 그녀의 눈가를 손등으로 쓸어주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녀의 눈물이 피부로 스며들어 내 마음까지 적셨다.
“왜, 왜 이래? 커피가 너무 뜨거웠나? 아니면 내가 뭘 잘못했어? 어….”
당황스러워 말까지 더듬는 나를 그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녀는 눈물과 함께 들썩이던 어깨를 어느새 가라앉히더니 나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그냥 잠시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 그래? 다행이다. 하하.”
괜히 멋쩍게 웃으며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는 흘렀던 눈물을 마저 손으로 훔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덕에 감춰져 있던 청록색의 하늘거리는 원피스가 그녀의 곱게 잘 틀어 올린 세련된 머리 스타일과 어울려 빛을 냈다. 나는 날아갈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고, 담으며 그녀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
“뒤에 약속이 있지만 않으면 바래다줄 텐데.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늦은 시간도 아닌걸요. 이 정도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리고….”
“응?”
한참을 우물쭈물하며 입을 오므렸다 벌렸다 발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말았다 망설이던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나에게 몸을 쑥 기울이더니 내 입술에다 쪽 소리를 내며 그녀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뗐다. 나는 잠시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하여 입을 어 벌렸다가 방금 벌어진 일을 깨닫고는 입을 헤 벌리고 말았다.
“오늘 즐거웠어요. 내일 봐요. 그리고 알면 알수록 깊고 좋은 사람이라는 거 진심이에요. 마치 우리가 마신 에스프레소 같달까.”
“어?”
“우리 이제 제대로 만나 봐요. 잘 있어요!”
내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버버 하는 사이 그녀는 쏜살같이 복도를 달려 나가 어느새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촉촉이 남은 감촉에 입술로 손을 쓱 가져가자 그녀가 남긴 에스프레소 향이 깊게 스며들어 마음까지 닿아 있었다. 잠시 향에 취해 멍 정신을 잃고 있던 나는 이내 씩 미소를 짓곤 환호를 지르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가 입술에 남긴 에스프레소의 의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있을 그녀, 심연하와 나의 밝은 미래를 꿈꾸며 머릿속에서 한껏 장밋빛 미래를 펼쳤다. 한참을 환호하다 부푼 마음을 안고 자리에 누운 나는 행운처럼 다가온 연하와의 만남을 자연스레 떠올랐다.
연하를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경기도의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맞이한 혹독한 사회 초년생의 생활. 가까스로 합격한 임용시험에 기뻐하던 잠시의 순간을 뒤로 한 채 나는 이름도 몰랐던 경기도의 작은 도시에 발령을 받았다. 대도시의 문물만을 접하고 살던 나에겐 모든 것이 낯선 도시. 논밭이 펼쳐지고 정겨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영상으로만 보던 전형적인 농촌 소도시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내린 시외버스터미널은 적막한 가운데 지저귀는 새 소리만이 공간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든 것이 난감하기만 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단정하게 빗은 머리를 곱게 틀어 내리고 누가 봐도 선생님이다 싶은 차림을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발을 동동 구르던 나에게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다가와선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저기요, 여기는 처음이세요?”
어찌할 바를 몰라 곤란하기만 하던 나에게 그 물음은 하늘에서 내린 동아줄과도 같았다. 낯선 도시에 다가온 낯선 사람이라는 경계심이 머리를 울리며 나를 말렸지만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낯선 그녀의 다정한 말투와 염려, 그리고 단아한 이목구비에 자리 잡은 호수같이 짙은 눈은 나를 안심시킬 뿐 아니라 설레게 하였다. 나는 빠져들 것 같은 그녀의 눈을 보며 뛰는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네, 네! 대구 반야월에서 지금 올라왔는데 여기가 처음이라서요. 학교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을까.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배시시 미소를 띠곤 내게 다가오느라 눈을 가리던 앞머리를 손으로 정돈하곤 말했다. 가슴의 진동이 더욱 심해졌다.
“대구에서 오셨군요. 저도 대구에서 일이 있어 여기 왔는데. 대학생이신가요?”
“아, 아뇨! 대학교는 졸업하고 여기 초등학교로 발령이 나서 왔어요. 중, 중앙초등학교로요….”
왜 이렇게 더듬거리기만 하는 걸까. 오늘따라 바보 같은 나를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대답에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손으로 턱을 만지더니 ‘딱’ 손을 튕겼다.
“아! 중앙초등학교요! 제가 가려는 길에 그 학교를 본 것 같아요. 같이 갈까요?”
“네?”
“사실은 저도 여기에 처음 발령이 났거든요. 그래도 오기 전에 지도를 좀 살펴보고 왔어요. 저는 그 옆 학교에 발령이 났어요. 둘이 머리를 맞대면 낫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 연하의 얼굴이 따사롭기만 해서 나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평소 부끄러움이 많아 남들과 대화도 잘 못 나누던 내가 그날따라 왜 그렇게 쉽게 마음을 열었을까. 녹음이 우거지는 계절. 드리운 자연의 기운 아래 우리는 길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 취미 등. 이야기를 나누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마음속의 작은 호감이 한껏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연락처를 주고받고 그날 저녁에 다시 만나 지금처럼 진한 에스프레소 잔을 들곤 공원으로 가 담소를 나눴다. 새벽이 비추며 새소리 정겹게 지저귀는 다음날까지 향 냄새로 사방을 물들일 듯이.
그렇게 낯선 타지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 온 지 반년이 지났다. 직장 생활의 고충을 나누고 한가한 여유 시간을 즐기기 위해 우리는 자주 만나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가끔은 친구처럼 조언도 해주고 가끔은 연인처럼 연인들만의 장소에서 데이트도 하고. 그런 시간들이 지나가며 어느샌가 우리는 서로를 마음에 품게 되었다. 아니 사실 연하는 몰라도 나는 처음 만난 그날, 이미 연하에게 반해 있었다. 언제든 그녀와 사귀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러나 마음을 주면서도 행여나 지금의 연이 끊기게 될까 조심스러워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하던 우리는 올해의 말이 되어서야 드디어 연인이 된 것이었다.
나는 마음이 설레어 이불을 걷어차고 한참을 뒤척거렸다. 그간 연하와 함께 있었던 일, 나눴던 대화 등을 생각하자 연하에 대한 마음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깊고 좋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사실 나에겐 연하가 그런 사람이었다. 예쁘고 성격 좋고 능력도 출중하고. 한 사람을 깊은 늪에 빠지게 할 만큼 출중한 매력을 갖춘 그런 사람.
그러나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는. 나는 오히려 가벼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남에 대한 판단을 함부로 할 수 없듯이 나에 대한 판단 또한 함부로 내릴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나에 대해 내가 어디까지 정확히 아는지는 나 스스로가 감히 판가름할 수 없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으로서는 주변 사람들의 판단이 제일 정확한 것일까?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는 중에 나는 자연스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녀의 눈물. 기뻐서 울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눈물이었으나 괜스레 그 눈물의 의미가 신경 쓰였다. 만남 뒤에 이별이 있다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빠르게 지워졌다. 불길한 상상이라 치부하며. 나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똑똑.
빗방울이 사방을 때리는 듯 부서지며 가을의 연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동굴에서 잠을 깬 듯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며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켰다. 어딘가 몸이 아픈 듯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리며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마치 전신을 두들겨 맞은 듯 떨려오는 몸에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아냐, 어쩌면 이건 내 기분 탓일까? 혼란스러운 마음이 나를 헤집고 나는 거미줄에 얽힌 공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채 이리저리 몸을 틀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끈대는 몸을 손으로 쓸어 보곤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손을 뻗어 뻗쳐진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하곤 거실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집안에서 들리는 것은 시계추의 부지런한 움직임뿐. 적막한 공간엔 햇살 한 줌 비치지 않은 채 캄캄한 어둠만이 을씨년스러운 계절의 화려한 단상을 비춰줄 뿐이었다. 나는 오래되어 잘 열리지 않는 냉장고를 툭툭 건드려 억지로 문을 열곤 물을 꺼내 그대로 들이켰다. 해소되지 않을 듯 내면에 일어나던 불안이 차가움에 정제돼 고요히 가라앉았다.
고요함을 가장한 시선을 돌려 오늘을 향한다. 2025년 11월 11일. 오늘을 향하는 날이 나를 오롯이 바라본다. 부지런히 움직이던 시계추는 사색에 질린 채 나를 향해 어서 움직이라 재촉하며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연일까?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오늘. 나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색 바랜 핸드폰을 붙잡았다. 아픈 머리 탓에 몇 번이고 잠금을 다시 풀고 나서야 핸드폰이 내게 눈을 껌뻑였다. 나는 가만히 눈을 맞춰 주곤 나에게 온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잊을 만하면 꼭 오는 흔한 대출 문자와 일찍 일어난 친구들에게서 온 x톡, 어제 주고받은 문자 내용과 통화 내역까지 확인을 마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래 역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거야. 괜히 불안해했네.’
속으로 되뇌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해결되지 않은 찝찝함이 마음의 편린처럼 남아 개운치 못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나는 잘 정돈된 거실과 깨끗하게 반짝이는 식탁 등을 살피고는‘이제는 이것만 확인하면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으로 주방에 딸린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 문을 열자 이른 아침에 피어난 햇살의 기운을 담은 유리창이 나를 반겼고 그 포근함에 순간 잠시 몸을 녹이려던 찰나 익숙지 않은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어제만 해도 서늘함을 마음껏 뽐내며 인체의 내부를 잠식해 달궈진 이성과 감정을 가라앉혔을 액체, 소주가 담겨 있던 병이었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것도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정도로 말이다. 예를 든다면 소주 한 잔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고 두 잔이면 말을 더듬고 석 잔이면 이제 그만 자러 가고 싶을 정도라고나 할까. 술을 잘 못 드시는 부모님의 기운을 물려받아 그런지 술은 늘 나에게 부담스러운 존재, 어쩔 수 없이 마시는 존재였다. 그래서 내가 술을 스스로 사 먹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딱 하나의 경우만 제외하고 말이다. 정말 내가 스스로 견디기 힘든 일이 있을 경우만 빼고….
손에 쥔 소주병을 낯설게 돌려 보던 나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제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서 뭘 했었지? 그대로 잠이 들진 않았는데… 누구를 만났었나? 아!’ 그제야 나는 무릎을 탁 치고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입에서도 술 냄새가 미약하게 느껴지는 게 평소대로 정리는 깔끔하게 잘하고 잠이 들었지만, 양치까지는 하지 못하고 취해서 잠들었었나 보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떠오른 기억들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제 김세희 선생님이 남긴 텀블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집 앞 편의점에서 잘 마시지도 않는 소주를 사가지곤 집에서 혼자 홀짝 마시고는 곧 취해 버렸다. 그러면서 혼자 추억에 잠겨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필름이 끊겨 버린 것이다. 새록새록 생각나는 어제의 기억을 감추려는 듯 앞머리가 흘러내려 내 손을 어루만졌다. 나는‘차라리 떠올리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음을 할퀴고 생긴 쓰라린 상처가 가슴에 대못이 박힌 듯 남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아픔의 기억은 떠올릴수록 더 깊게 머리에 남을 뿐이었다.
한때는 영원할 줄 알았다. 그 사랑이. 지금처럼 비가 내리던 그날. 진하게 우린 에스프레소를 입술에 남긴 연하를 만나고 약 삼 년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그동안 우리의 관계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느 연인이 그렇듯 서로가 죽고 못 살던 초기와 다르게 우리는 다툼이 많아졌고 어느 날은 아예 연락을 끊기도 했다. 그러던 중 연하가 올 초 수원으로 발령이 나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남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요새 왜 연락을 잘 안 해?”
“…미안해요. 바빠서 그래요.”
“나도 바빠. 하지만 늘 시간을 내서 연락하잖아. 너도 나한테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
대답하지 않던 연하는 곧 ‘알겠어요’라고 말을 하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뚜뚜 울리는 벨 소리가 아이들이 사라진 교실의 빈 공간을 하나둘씩 채워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공간을 모두 채운 순간 어쩐지 공허함은 더 커지는 기분이다. 전화기 너머 침묵하고 있을 연하의 모습과 날 보며 에스프레소를 건네던 그날의 연하의 모습이 겹쳐 눈물이 사무칠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남긴 잔향이 아직도 나를 채우고도 넘는데 그녀의 마음에 나의 잔향은 충분히 닿지 못하였나 보다.
그래도 나는 항상 그녀를 믿었다. 언제든 그녀가 나의 빈자리를 다시 채울 수 있도록 나의 마음에 여백의 도화지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로 인해 내가 완성되도록. 하지만… 그녀는 얼마 있지 않아 나에게 이별을 고하고 말았다. 그것도 처음 그녀를 만났던 바로 그 장소에서. 그래서 더더욱 깨닫게 되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것을.
“그동안 즐거웠어요. 나보다 이젠 더 좋은 사람 만나요.”
“꼭 그래야만 해? 난 아직도 너밖에 없는데.”
담담하게 말하려 애쓰나 어쩔 수 없이 배어나는 애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절절한 눈빛으로 그녀의 칠흑같이 빛나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 짙게 내린 커피처럼 확고함을 담고 있었다. 그래 마치 그날 에스프레소처럼. 나는 더 이상 되돌릴 길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런 나를 향해 연하는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더니 웬 포장된 상자 하나를 건넸다. 나는 입이 바짝 말라 왔다.
“이건?”
“마지막 선물이에요. 이왕이면 버리지 말고 사용해줘요. 비록 이렇게 되었지만, 우리 사랑은 이 에스프레소처럼 깊고 진하게 피어났다 아름답게 사라졌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에스프레소를 나누고 마셨던 것처럼. 언젠가는 ‘홍석 씨’도 나도 다시 에스프레소 같은 사랑을 나누게 될 거예요. 그날이 다시 오길 바라며 주는 선물이에요.”
변화된 마음에서 오는 변화된 호칭에서 변화된 연하와 나의 관계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 끝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추해지지 말자. 담담히 받아들여야 해.’
나는 속으로 여러 번 되뇌며 심호흡을 했다. 성인이 된 후로 흐르지 않아 메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리려는 것을 나는 억지로 눈을 감고 감췄다. 간신히 손을 움직여 그녀의 마지막 선물을 전해 받고 다시 눈을 뜰 무렵. 연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손에 남긴 에스프레소 상자와 에스프레소를 닮은 그녀의 향만 가득 내 마음 빈틈에 고이 새겨 놓은 채.
별무리가 찬란하게 서둘러 길을 나서는 그날 밤. 뿌예진 안개 너머로 달이 반짝이고 있었다. 달의 포근함에 잠긴 별들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진해지는 달밤의 광명이 이들의 어두운 밤길을 밝힐 뿐. 어두운 하늘엔 안개에 휩싸인 짙은 어둠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달이 비추는 언덕에서 한 무리의 별에 속한 나는 스르르 몸을 일으켜 이들을 눈으로만 좇았다. 어디론가 조용히 떠나고 싶은 밤. 그러나 인세에 매인 몸은 대지에 뿌리박혀 이들을 따르지 못한다.
탁탁 파스스.
뿌예진 안개를 향해 타는 연기를 흘려보내자 둘은 함께 어우러져 본디 하나인 듯 허공을 물들였다. 바래진 안개 뒤로 서로의 추억이 타는 연기 품고 재가 되듯 부서졌다. 마지막 타다만 사진엔 머금다 만 미소를 띤 인물들이 ‘누군가’를 향해 웃고 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비웃으며 사진을 즈려 밟았다. 지독시리 뿌연 안개 낀 밤이다.
그 후 억지로 마음속에서 연하의 잔향을 지우고자 노력했건만 깊게 배인 에스프레소 향처럼 그녀는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나는 그녀의 익숙함에 빠져 새로운 그녀를 맞을 준비를 게을리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삼 년을 만난 그녀를 떠나보내고 다시 삼 년의 시간이 지났다. 이별의 순간 그녀가 나에게 건넸던 에스프레소도 이미 몸에서 숙성된 지 삼 년의 시간이 지났다. 더 깊고 진한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누군가를 깊게 물들일 준비가 나는 오롯이 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넘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문가에 기댄 흰 텀블러를 보았다. 텀블러에 남겨진 진한 향이 나에게 손짓했다.
‘에스프레소 좋아하시냐고요. 좋아하시면 타 드릴까 싶어서….’
자리에 있지도 않은 텀블러 주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던 순간 위태롭게 서 있던 텀블러가 탁 소리를 내며 넘어지더니 나에게로 굴러 왔다. 나는 그제야 피식 웃으며 긴 세월 입가에 남은 마지막 에스프레소를 털어 넣었다. 흰 텀블러에 담긴 남은 에스프레소를 목으로 넘기며. 기분 탓일까 넘겨지는 향 뒤로 누군가가 웃고 있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오래된 갈증을 느끼며 전화기를 들었다.
어느덧 크리스마스다. 산타를 위성으로 추적한다는 2025년의 종말이 다가오는 때.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소리 없이 숨어든 새로운 설렘은 누군가에겐 무딘 가슴으로 남을 뿐이었다. 나 또한 한 사람을 마음에 담아 보았다. 그리고 떠나보내었다. 그리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슬픈 결말이며 흔한 이야기였다. 얼마 전까지는.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종업원이 내미는 계산서를 확인한 후 카드를 내밀어 결제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몸서리치게 추운 바람이 몰려왔다. 단단히 여민 옷을 한 번 더 여미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움직였다. 그러다 나는 점점 달리기 시작했다. 여유 있는 척 걷기엔 감당할 수 없는 추위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세 블록쯤 지났을 즈음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나를 불쑥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서홍석 선생님!”
뭐야? 나는 깜짝 놀라 손을 뿌리치려고 몸을 휙 돌렸으나 생각보다 억센 손길은 작은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옷이 찢어질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라고 위안하며 손의 주인을 마주했다. 그러자 빨간 코트에 초록색 털실 모자를 쓴 여인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영락없는 산타를 떠올리게 해 ‘산타 코스프레를 하고 있나?’ 생각하며 당황한 채 여인을 보았다. 그러나 작고 아담한 몸에 큰 옷들을 걸친 모양새라 그 모습이 퍽 귀엽기도 해 나는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죄송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못 보고 지나치실 것 같아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귀염상으로 빚은 얼굴 조각이 그녀의 코트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그 모습에 더욱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는 그녀를 향해 괜찮다는 의미에서 손짓했다. 그제야 안도한 듯 이제는 익숙해진 그녀, 김세희 선생님이 나를 향해 물었다.
“어제도 우리 봤잖아요? 오늘은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어요?”
조심스럽게 묻는 와중에 묻어나는 묘한 기대감. 그러면서 혹시 몰라 주변을 기웃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한결 조심스러워진 손길로 품 안에 있던 물건을 조심스럽게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웬 상자예요? 아, 이거는….”
조심스럽게 내가 건넨 물건을 받은 그녀는 작은 탄성을 지르곤 그것을 소중한 물건인 듯 감싸안았다. 그녀는 내가 주는 선물이라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은 듯 그렇게 나를 향해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것을 왜 자신에게 건네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이건 에스프레소잖아요? 왜 제게 주시는 거예요?”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에스프레소같이 진한 사랑을 다시 나누게 될 때가 있을 거라고. 저에겐 그게 지금이에요.”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피해 다닌 나답지 않게 나는 당당하게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 나는 더 이상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텀블러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마신 그날 이후로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으니까. 새로운 향으로 깊게 덮인 나의 마음은 이젠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를 피하지 않고 만난 지난 한 달 동안 더욱더 진하고 깊게.
“아… 저는 좋아요!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얼굴이 빨갛다 못해 톡 터질 것 같은 감처럼 익은 김세희 선생님은 부끄러운 듯 연신 애꿎은 바닥을 툭툭 쳤다.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이는 것은 내가 이제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든 탓일까. 짙은 감정에 어느새 피어난 애정이 짙게 덮였다. 나는 당장 그녀를 안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녀를 만나면 꼭 물어보리라 다짐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왜 저를 좋아하신 거죠? 그때의 저는 세희 선생님 입장에서는 그저 못된 놈으로만 보였을 텐데요?”
의아한 나의 표정을 보며 그녀는 부끄러운 듯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홍석 선생님을 보면 늘 뭐랄까. 아련한 표정에 숨겨진 그늘 같은 게 보였어요. 무언가 감추고 계시지만 보는 사람이 애틋해 보이는 깊고 진한 그런 거요. 그래서 그날 선생님께 에스프레소를 권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것처럼요. 저도 모르게 그 깊이에 빠졌다고 할까요? 그 이상은 저도 모르겠네요. 사랑엔 원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갓 피어난 수선화처럼 맑고 깨끗한 그녀의 얼굴에서 난 한 치의 꾸며 냄도 찾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느끼며 나는 김세희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스르르 눈을 감는 것이 보였다. 슬쩍 그녀에게 다가서자 그녀의 손에 들린 에스프레소 상자가 마치 물에 닿은 것처럼 온 사방을 향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빠르다는 말이 실감 가는 요즘이었다. 밤이 기울어 새벽으로 넘어가던 날. 연하가 이별을 고하던 그날 이후로 삼 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으니 말이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설렌다던 철없던 시절의 나는 어느새 온데간데없고 사회의 악에 물들어 현실의 부조리함을 탓하는 흔한 30대 초반의 남성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더욱 깊은 사람이 되었다. 아픔을 인내하고 받아들이며 이제는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진하게 우려낸 저 검은 에스프레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