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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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 속 ‘나의 이야기’가 열심히 수다 중이다. 더러는 앉고 더러는 빼딱이 서고, 또 더러는 흩날리며 첫눈의 설렘을 풀어내고 있다. 사춘기 소녀마냥 웃음꽃 분분히 피우고 있는 우리들의 작품들. 오늘은 전시 첫날, 내 안의 나를 만나는 날이다.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아카데미 대표 하춘근 작가의 설치미술품 하나가 관람객을 반긴다. 입학과 수료, 수업, 작가 탐방, 축제…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1백여 명 동문들의 행적을 스냅 사진에 담아 만든 커다란 원통 모빌이다. 사진 속 여러 모습들이 시간을 깨고 나와 주인을 만난다. 저 출렁거리는 눈빛과 표정들이 녹아 작가라는 이름표를 달게 해 준 것일게다.
그냥 그런 게지/ 밍밍한 가슴 뜨겁게 달구며/ 그 느낌 그 맥박 따라/ 내 안에 흐르는 강물인 게지/ 그러다 세상까지 적시는
축시를 낭송했다. 문화와 예술의 정의를 시적으로 풀어낸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갖게 하는 자작시 「찬란한 별이 돼라」의 일부이다. 5년 전, 직접 문화예술의 주체가 되어 보자는 취지로 ‘글 쓰는 사진작가’ 윤광준 씨를 교수로 초빙하여 강좌와 함께 발족한 문화예술학회 <피노아카데미>의 전시회를 연 것이다. 지역을 벗어나 버젓한 뮤지엄 아트린에서 기수 수료전이 아닌 동문 전체의 첫 전시회이다. 값을 스스로 매겨 작품에다 붙여 두라는 말에 영락없이 전문가가 된 기분이다.
옹기를 찍기 위해 얼마나 찾아다녔었던가.
호수공원 장독대에 머문 정오의 햇살이 안겨준 시를 떠올리며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는 왜 그리도 작아 보였던지. 시간 따라 마음속 옹기도 쑥쑥 자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후 장단 마을에서 마침내 시에 걸맞는 장독을 찾아낸 것이다.
콩 발효 식품 특산지답게 눈앞에 펼쳐진 장대한 옹기들. 시간과 햇살과 함께 자신을 삭혀 우리 겨레의 밥상을 굳건히 지켜온 각종 장의 친정집이 저 옹기(甕器)가 아니던가. 문자 甕(옹)은 하늘의 태양(亠)을 물고 온 봉황(佳)이 바람 좋고 볕 잘 드는 곳에 둥지를 틀어(瓦) 새끼를 배고 낳고 시집보내며 화락(鄕)하게 지내는 모습을 상형한 문자이다. 부부가 화목해야 장맛이 좋다는 말이 문자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만년 임산부인 옹기들이 늘어선 장독대. 드문드문 상처 난 너른 가슴팍 아래 키 작은 들풀 하나가 새초롬히 서 있다. 비밀 얘기를 듣고 싶었을까, 자기 얘기를 들어줄 친구가 필요했을까. 옹기의 질박함과는 달리 키 작은 선연한 초록빛 생명체가 담벼락 아래 볕쪼임 하는 아이처럼 서 있다. 바람도 가만가만 그들을 어루만진다.
햇살을 담는 건/ 온 우주에 씨앗 한 톨 품는다는 뜻/ 그 씨앗 부풀어/ 세상이 우거지는 일이다// 햇살을 품은 나는/ 바람 타는 우주/ 볕 바른 正午/ 태극에 숨 맞춘다/ 장독대의 저 푸짐한/ 옹기처럼
자작시 「햇살 담다」 전문이다. 시를 담아 배가 한껏 더 부풀어 보인다. 초점을 맞췄다. 들풀 하나로 다른 옹기들은 행간에 숨어 기꺼이 배경이 된다. 그렇게 탄생된 사진은 <볕쪼임 -꿈을 다리는 중>이라는 이름표를 달게 된 것이다. 수료전 세 작품 중 우리 집 장식품 1호이다. 시화가 그려진 스탠드 등과 함께 가장 먼저 가족을 반겨주던 것도 이 작품이다.
누군가 옹기 앞에 서 있다. 절제된 기품과 연륜이 느껴지는 여성이다.
“꼭 내 인생 같네. 어쩜 저 상처까지도….”
지인인데 그분께 선물하고 싶다고 선배가 귀뜸한다. 판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던 터라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검색창을 열었다. 창업 5년 차. 청국장, 고추장 등 발효식품 전문회사 콩그린의 대표이다. 내 시와 사진의 소재와 회사의 제품, 나이까지 같아 전율이 올랐다. 그분의 삶을 지레짐작해 본다. 장독 위에 새벽마다 정한수 한 사발 떠놓고 닳은 손 비비던 할머니 어머니의 모습에 그분이 겹쳐진다. 우여곡절이 기도 되어 새벽 공기를 타고 오른다. 주저 없이 그분의 인생이 옹기를 닮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콩처럼 내 살을 삭히고 발효시켜 마침내 청국장을 만들어내는 저 옹기를 자신을 보듯 연민과 대견함으로 토닥토닥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보다 그분이 더 주인 같아 보물 하나 뺏긴 듯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팔까 말까조차 완전히 정하지 못한 마음을 가격표에다 썼다. 만원 앞에 숫자 대신 ‘햇살’을 썼다. 햇살이 가격이 된 것이다.
옹기 앞 개망초는 자기와 눈 맞추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햇살 만원이라 값 매긴 내 마음을 알아챘을까?
제법 꼬부랑길이다. 눈으로 회색 포장을 걷어내자 오솔길이 된다. 아버지를 닮은 오래전 땀 배인 발자국을 따라 지게 위의 땔감이 춤을 춘다. 옹기 속을 나온 이야기가 메주콩 삶는 냄새를 타고 뉘엿뉘엿 겨울을 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