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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마비와 ‘춤추는 사람’ 사이

한국문인협회 로고 안윤하

시인·대구광역시지회장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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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마비인을 춤추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후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수학과 과학이 더 쉽다. 인문학의 해답을 찾는 것이 어렵다. 정확한 답을 찾는 방향으로 집중했을 때 명쾌하게 결론을 내고 싶다. 그런데 명쾌한 결론이 없는 시를, 문학을 좋아하는 것은 스스로 판단해도 논리가 맞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뇌성마비아에게서 받은 충격을 춤추는 사람으로 연결한 후 더 좋은 아이디어를 찾지 못한다. 나의 이런 자연과학적 DNA 때문이 아닐까.
고등학교 과학교사를 하면서 가끔 시를 칠판에 적어 두고 낭송하거나 합송하기도 하였다. 이는 여고 시절 국어선생님께 받은 영향이다. 그 선생님은 시를 암송하게 하였다. 내가 선생이 되어 감수성이 풍부한 여고생들에게 가끔 시의 감성을 공유하기도 했다. 볼링사업을 시작하며 볼링 건물을 건축할 때 건축회사 사장의 부인이 차를 현장에 세워 두고 사장을 찾는 사건이 있었다. 그녀는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에게 생활비를 청구하기 위한 시위를 하러 온 것이었다. 그 차의 뒷자리에는 팔다리가 모두 뒤틀려 있는 아들이 해면처럼 누워 있었다. 그의 눈빛과 마주친 이후 화두처럼 그 눈빛이 내 눈에 꽂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 화두를 삼킨 후 소화시키지도 못했다.

 

신문에 난 시 강좌 모집을 보고 대구의 문학아카데미에 등록하고 서서히 대학 강사를 그만두고 사회적 활동을 정리하며 많은 시간을 시에 투자하였다. 시인들과 여행을 하며 시적 감수성을 공유하고 익혔다. 그들과 어울리며 시적 언어를 배우려고 했다. 그러나 문학적 재능은 별로 없음을 자인하였다. 그래서 우격다짐처럼 노력을 배가시켰다. 그즈음 등단 권유를 받기도 했지만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답답함으로 ‘시가 뭔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찾지 못했다. 단지 문학의 서정성의 가치를 부여하여 시와시학사의 시학 교실을 찾아갔다. 김재홍 교수님을 만나 시에 대한 정의는 더욱 혼미해졌다. 나의 말에는 시적 감흥이 부족하고 잘라내야 하는 군더더기만 많음을 인지하여 모두 덮어 두고 새로 시작하였다. 대구에서 인사동으로 4년 동안 토요일마다 수업을 받기 위해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KTX가 없던 시절 새마을 막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 새벽 5시에 집에 도착하곤 했다. 동료들과 어울려 문학 얘기도 많이 하면서 보냈다. 그 당시는 뇌성마비, 장애, 사회 저변의 삶에 천착하며 일련의 시리즈로 관심 분야의 깊이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묶어 ‘뇌성마비’ ‘거꾸로 서기’ 등으로 주제를 엮어 갔다. 하지만 정작 혼자서 생각하고, 말하고, 쓰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대구의 3년은 감성은 있으나 퉁퉁 부은 시를 썼다면 서울에서 보낸 4년의 창작 수업은 살은 모두 빠지고 뼈만 남은 메마른 창작을 하고 있어 점점 말문이 닫히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풍부한 언어와 다양한 기법으로 적확한 초점을 잡고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서울행을 접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한국에서 살아온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즈음 7년 동안 쓴 모든 작품 400편을 정리하여 20편을 공모에 제출하였고 1998년 봄호에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하게 되었다.

 

대구문학아카데미는 대구에 큰 맥을 형성하고 박주일 시인의 타계 후 맥이 끊겼다. 하지만 1990년부터 2010년 이후까지 100명이 넘는 시인을 배출하였다. 나도 1992년부터 수업을 받았다. 1994년 시와시학 교실에서의 4년간은 나의 가장 활동적인 문학적 시기였다. 한국문단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을 만나 뵈었고 다양한 채널로 문학적 교류를 하였다. 문단의 흐름을 알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시적 체계를 갖춘 것도 이때이다. 시인 평론가들과 서유럽으로 여행을 다녀온 뒤 초심으로 돌아가 뇌성마비인을 춤추는 사람이 아닌 다른 표현을 하기 위해 줄곧 생각하였다. 지금은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 여자들의 삶을 화두로 연작하고자 한다. 문학적 재능의 부족을 논리로 극복하고자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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