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 발표 2026년 3월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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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회전이요! …네, 그대로 직진하세요.”
택시기사는 아무 대답 없이 내가 제시한 좌표대로 운행했다. 정 박사가 찾아오라는 길은 낯설지 않았지만, 도시 분위기가 그동안 많이 바뀐 듯했다. 2년 전만 해도 보도블록이 콘크리트 재질의 사각 보도블록이었으나 그새 U형 블록으로 바뀌어져 있었고, 횡단보도 안전 조명등도 새로 설치돼 있었다. 과거 미군 부대가 주둔해 있을 때보다 도시가 많이 정비되고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 정 박사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주변이 좀 짙은 회색빛이었다. 안개와 잘 매칭되는 도시여서 안개의 도시로 상징되기도 했지만 도시 전체가 좀 화사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나이를 점점 먹어감에 따라 색감에 대한 반응도 민감해진다고 어느 신문 칼럼에서 읽은 게 기억났다. 아무튼 그때 사무실 분위기만 봤을 땐 도시 전체의 칙칙한 빛깔과 그런대로 어울린다고 느꼈지만 ‘미래시대포럼’이라는 사무실 간판과는 생뚱맞고 기괴한 조화라는 생각이었다.
“손님! 목적지에 다 왔습니다.”
택시에 승차했을 때‘어디로 모실까요? ’라고 물은 후, 두 번째 듣는 기사의 목소리였다.
“카드 결제할게요.”
기사는 여전히 응답은 하지 않고 내가 건넨 카드를 받으려고 뒷좌석으로 몸을 약간 틀었는데 옆모습을 보니 분명 여자였다.
“여자 기사님이었네. 난, 아까 여자 목소리 같다는 정도로만 느꼈는데….”
“어머, 그러세요? 사실 오늘 처음 나왔어요.”
“오우! 영광이네요. 근데… 개인택신가요?”
“네, 신랑하고 교대로 하고 있어요.”
“그런 방법도 있구나. …기사님 명함 있으면 한 장 줘봐요. 춘천 또 오게 되면… 콜 돼죠?”
“그럼요?”
카드로 요금을 결제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대강 이 부근 어디로 기억되는데 정 박사 사무실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면 금방 찾을 수 있을 테지만, 내가 방문하는 걸 정 박사가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여유 있게 가는 게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삼 층 높이의 건물 외벽을 보며 ‘미래시대포럼’ 간판을 찾았지만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번 두리번거리다가 차라리 정 박사한테 전화를 거는 편이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박사 휴대폰 번호를 눌렀고 신호음이 갔다. 컬러링이 흘러나왔다. 클라리넷으로 연주하는 독특한 선율이었다. 귀에 익은 곡이라고 생각했지만 제목은 떠오르지 않았다. 느린 속도의 클라리넷 선율이 휴대폰에서 계속 울려댔다.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분명히 2년 전에 왔을 때 택시에서 내려 삼사 분 거리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간판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뿐만 아니라, 어제도 나하고 통화를 한 친구가 응답을 안 한다는 점에서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족히 1분 이상 컬러링이 울렸을 것이다. 이제 음악이 두 번쯤 반복되고 끝나 가려는 순간 사람 음성이 들려왔다.
“네, 대신 전화 받았습니다.”
“아, 잠깐, 대신? …지금, 전화 받은 사람은 누구예요?”
“네, 정 박사님 사윕니다.”
“사위? 아니, 정 박사는 어디…? 난 고등학교 동창, 전수혁이라고 해요. 정 박사가 어디 갔어요?”
“아, 선생님! 장인어른이 좀 위중하셔서 … 중환자실에….”
“뭔 얘긴가? 어제도 나하고 통화했는데? …근데, 거기가 지금 어디라구요?”
“대학병원입니다. … 선생님, 하지만 지금 면회는 안 됩니다.”
그런 와중에 아까 타고 왔던 택시기사 명함이 손에 잡혔다. 노란색 바탕에 공일공으로 시작되는 큰 고딕체 숫자대로 번호를 눌렀다. 예상 외로 신속하게 응답이 왔다.
“네, 개인택십니다.”
아까 그 여기사의 음성이 분명했다.
“아, …저, 아까 한 10분 전쯤 차에서 내린 사람이에요. 옛날 미군 부대 후문 앞에서 내렸던… 그렇죠, 그렇죠. …15분? 네네, 내렸던 곳에서 기다릴게요.”
아니, 어제까지도 멀쩡하게 통화했던 친구가 느닷없이 중환자실이라니? 이게 무슨 일일까? 이 친구가 오랫동안 매달려 연구해 온 분야가 ‘노인의 고독사’였는데, 자기가 쳐놓은 덫에 걸린 건 아닐 테고….
그러고 보니 부인과 사별한 지 벌써 6년이 돼가는 정영우였다. 새장가를 들라고 나를 비롯해 가까운 친구들이 뼈 있는 충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영우는 손사래를 쳤다. 죽은 마누라와 함께한 세월도 소중하지만, 인간적 의리를 깨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두 가지 얘기 모두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영우는 아내가 떠난 헛헛한 자리를 채우느라 노마를 마누라 삼아 지낸 지 5년이 돼 가는 듯했다.
“견생 돌보다 인생 망가지겠어.”
2년 전 영우 사무실에 왔을 때 노마의 배설물을 치우던 그를 보고 내가 한 말이었다.
“아닐세, 마누라 기저귀 가는 일보다 이게 훨씬 낫네.”
영우는 그렇게 말해 놓고 멋쩍은 듯이 싱긋 웃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반려견 노마는 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 가볍게 경적을 울리며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다가섰다. 아까 타고 왔던 여기사 택시였다.
“아, 15분이 금방 갔네요.”
“네, 러시아워가 지나서 좀 나아졌어요…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대학병원으로 가세요.”
20만 정도의 상주 인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 대학병원이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 연탄가스 중독으로 같은 반 친구가 입원해 겨우 목숨을 건졌던 당시 시립의료원이었다. 외벽에 균열도 있었고 군데군데 도색이 벗겨나간 3층 콘크리트 건물이던 그 시립의료원이 어느덧 아주 세련되고 번듯한 대학병원으로 변신하다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손님! 갑자기 대학병원은 왜 가세요?”
오늘 첫 운행이라던 여기사에게 좀 여유가 생겼는지 말을 건넸다. 야간이라 옆모습이 뚜렷하진 않았지만, 택시 안의 조도가 그리 어둡지 않아 선명치 않은 대로 여기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덩치는 있어 보였지만, 우람하다는 표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갖춘 귀여운 여성이었다.
“가봐야 알겠어요. 친구가… 중환자실에 있다는데… 도무지 믿어지질 않네.”
“뭐, 별일 있겠어요?”
“그러게, 그냥 어디 부러지고 그랬으면 차라리… 그런데, 기사님! 오늘이 첫 운행이라고 했는데… 할 만해요?”
“할 만하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죽도록 일해야 늙어서 어디 요양원이라도 들어가죠?”
“아니, 지금 얼마나 됐다고, 벌써 요양원 들어갈 준비를 해요?”
“호홋! 어머? 제가 그렇게 젊게 보이나 보죠? 내일모레 벌써 육십이에요.”
허튼소리를 주고받는 동안 택시가 대학병원 현관 앞에 도착했다.
“기사님! 좋은 인연이에요. …많이 버세요.”
회전문이 돌아가고 있었고 빈 간격 안으로 내 몸을 밀어 넣었다. 로비로 들어와 잠깐 서성였다. 중환자실 면회가 안 된다고 했고, 그렇다면 우선 정 박사 사위한테 전화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십 분 전에 울렸던 그 컬러링의 선율이 또 흘러나왔다. 알 듯도 했다. 어디선가 들었던 선율이었다. 아까는 좀 건성으로 들었었는데 멜로디가 낯설지 않았다.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 여보세요? 저, 유재홉니다.”
“아아, 나 아까 통화했던 정 박사 친구예요. 여기 지금 병원 로비에 와 있는데….”
“예예, 선생님! 제가 잠깐 병원 밖에 나와 있는데요. 한 20분 후면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로비에서 좀 기다려 주세요.”
유재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유재호. 그 순간, 컬러링 멜로디가 비강(鼻腔)에서 웅얼거리며 흘러나왔다. 그렇지, 유재하였지? 요절한 가수 유재하. 그가 부른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였구나. 그 노래를 어느 외국 사람이 클라리넷으로 연주해 앨범을 만들었다고 듣긴 했지만, 막상 정 박사 휴대폰 컬러링으로 그 음악을 듣다니…. 잠깐이지만 나는 그 선율을 콧노래로 따라 불렀다. 오래전 노래방에서 처음 이 노래를 들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마이크를 잡고 감당할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불렀던 여자.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그 여자. 유부남이던 내 앞에서 돌싱인 그 여자가 이 노래를 왜 불렀는지, 한참 지나서야 나는 그 의미를 겨우 알게 되었다.
그날 노래방 모임은 문화사업국 부서 회식 후에 가진 2차 자리였다. 기관별 연간 추진 업무 역량 평가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기념으로 내가 마련한 회식이었다. 항정살을 잘하는 곳이 있다고 팀장이 안내하여 간 식당에서 소주 열일곱 병과 맥주 아홉 병을 마셨다고 법인카드를 그으며 여자 팀원이 말했다.
“성인 아홉 명이 마신 거치곤 좀 약했죠, 국장님?”
“글쎄? 더 마시고 싶으면 어디 좋은 데로 가요.”
“국장님이 2차도 쏘시는 거죠?”
법인카드 팀원 옆의 다른 팀원이 재빨리 내뱉었다. 송미숙이었다.
“미숙 씬, 술이 아직 모자란 모양이군!”
“아녜요, 국장님! 술 말고 노래방요.”
그래서 가게 된 노래방이었다. 문화사업국 직원 아홉 명 가운데 남자 둘, 여자 다섯이 빠지고 송미숙과 법인카드 팀원 그리고 내가 합류해 결국 노래방에 들어갔다.
“국장님! 시시껄렁한 인간들 모두 빠지고 나니까 오히려 홀가분하네요. 자, 그러면 지금부터 오늘 분위기를 미세스 송과 미스 윤이 국장님을 풀 코스로 모시겠습니다. 빰빠라 바암!”
비음이 약간 섞인 목소리에 농염한 몸매까지 곁들인 송미숙의 오프닝 멘트로 시작된 노래방의 분위기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게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그 사이 화장실 간다며 나간 미스 윤은 어느 순간 아예 종적을 감췄고, 나만 남은 자리에서 송미숙이 마지막 노래라고 꺼낸 비장의 카드가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였다. 마이크를 들기 전 송미숙은 내 옆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뭔, 할 얘기 있어요, 미숙 씨?”
그 순간 송미숙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그녀의 혓바닥이 내 입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한바탕 회전하였다.
“어, 어, …으음!”
내가 신음도 아닌 소리를 몇 음절 뱉어 내자 송미숙이 입술을 떼었다.
“…그냥, 그냥, 전 국장님 앞에서 이 노랠 부르고 싶을 뿐이에요.”
당황스럽기도 했고, 묘한 기분도 들었지만 전혀 불쾌하진 않았다.
“…어때요? 한번 들어보세요?”
하며 시작한 노래가 그 노래였다. 모니터가 작동했고 고딕체 큰 글씨의 제목이 나타났다. 「사랑하기 때문에」 작사·작곡 유재하, 라고 액정 화면 하단에 표시되며 전주가 흘렀다. 도입부가 제법 긴 발라드풍이었다. 국내 가요에 저런 곡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송미숙의 노래가 시작됐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내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연신 몸을 흔들어 댔다.
“아, 저 정 박사님 사윕니다. 어디 계시죠?”
“아! 내 여기 편의점 앞에, 의자에, 앉아 있어요.”
사위는 로비로 들어와 원무과 앞에서 두리번거리다 어렵지 않게 나를 찾아왔다.
“많이 기다리셨지요? 저, 사위 유재홉니다.”
건장한 모습에 살집이 두툼하고 호탕해 보였지만 말투는 겸손했다.
“그래, 정 박사는 …?”
유재호는 서 있던 자세를 고쳐 나를 마주 보며 장의자에 앉았다.
“…뇌졸중이랍니다.”
“차라리, 어디 한쪽 발이 부러진 게 나았을 텐데….”
말을 뱉고 보니 사위가 듣기에 좀 불편함 있게 들렸다.
“그래, 의사는 만나봤어요?”
“예, 만나긴 했는데 과정이 좀 복잡했습니다.”
“가만있자, 어디 조용한 쪽으로 가서 얘길 들읍시다. 저기, 저기 카페가 좋겠네.”
“오전에도 장인어른과 통화했습니다. 마침, 친구분이 저녁 무렵 오기로 했다면서 저녁은 친구와 함께하겠다는 말씀도 했습니다. 두 시간 후쯤 장인어른이 저한테 심부름시킨 일에 대해서 결과를 말씀드리려고 전화했는데 받지 않으셨어요. 그때가 오후 세 시쯤입니다. 그 사이 아마 칠팔 분 정도 계속 전화를 드려도 통화가 안 돼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요. 달려왔더니 골든타임이 소멸되기 한 30분 정도 남았을 때였습니다.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 엎어져 계셨고 반려견 노마가 계속 깽깽거리고 있었죠. 제 추측으로는 아마 노마를 산책시키려고 사무실에서 내려오시다 갑자기 중심을 잃고 쓰러지신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 왔을 때 조금 의식이 돌아오셨고 응급실에선 어눌하지만 의료진과 몇 마디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마 더 지체했으면 식물인간 될 뻔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오늘 내일을 지켜봐야겠다고 그래요.”
“그런데, 처음 발견했을 때 정 박사가 의식은 있었어요?”
“숨은 쉬고 계셨는데, 말씀은 못하셨고요. 왼쪽 손목이 꺾여 있어서 펴 드렸는데 다행히 골절은 아닌 거 같았습니다. 뭐, 그리고 장인어른 입술이 조금 터져서 피가 흘렀어요. 자세히 보니까 피는 이미 멈췄더군요. 아무튼 저 스스로 최대한 침착하려고 했지만 막상 119를 부르는데 심장이 어찌나 쿵쾅대고, 심지어 휴대폰 쥔 손이 계속 덜덜덜거렸습니다.”
“사위가 큰 역할 했네…. 딸한텐 연락했어요?”
“아, 장인어른 병원에 모시고 나서 바로 카톡으로 전화했습니다.”
“좋은 세상이긴 한데… 캐나다에서 여기까지 나오려면 이삼 일 걸릴 텐데…?”
“네, 일단 오늘 내일 경과를 좀 보고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선생님.”
“재호 씨라고 했던가? 재호 씬 지금 춘천에서 뭘 하고 있어요?”
“조그만 닭갈비 가공업 하고 있습니다.”
즉각즉각 대답하는 사위의 스타일이 맘에 들었다.
“기러기 아빠라서 많이 힘들겠네. …애들하고 와이프는 캐나다 간 지 얼마나 됐어요?”
“장모님 돌아가시고 그다음 해니까, 5년 됐습니다. 재작년에 장인어른 칠순이라서 잠깐 나왔다 갔고요.”
“5년이라…?”
5년 전이면 내가 대전에서 하던 사업을 막 정리하고 황혼 이혼을 한 해였다. 광역시 직속 기관 부서장으로 퇴임하고 공연기획업체를 차려 사업에 막 재미를 보려던 차에 날아든 고지서가 이미진의 이혼 합의서였다. 물론 한 달간의 숙려 기간에 서로 충격을 최소화하고 모든 걸 수용하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지만, 막상 합의서를 작성하려니 분노와 노여움과 울분이 한데 섞여 사나흘 폭음에 가까운 혼술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폭음 끝 혼미했던 정신 가운데 만난 여자가 송미숙이었다.
퇴임한 부서장을 흔쾌히 만나겠다고 나와 준 송미숙이 고마웠다. 마침 그녀는 하루 월차를 냈지만 오전에 일을 끝내고 점심 무렵부터 시간이 있다고 해서 한적한 일식집에서 만났다. 다니던 직장 분위기도 궁금했고 또 오래전 일이지만 지난날 노래방에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불렀던 그 노래 사연도 물어볼 겸 얘기를 풀어나갔다.
“사무실 분위기는 요새 어때요?”
“글쎄, 뭐라고 할까요? 아무래도 구관이 명관이지요. 국장님 같은 분이….”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 타래가 술술 풀려나가다 정점에 이르자 생각지 않은 송미숙의 고백이 터져 나왔다.
아내 이미진이 골프에 빠지기 시작한 건 내가 문화재단 문화사업국장으로 근무하던 3년째부터였다. 워낙 활달한 성격에 나와 13년 차이의 나이를 극복하며 살아온 아내는 운동이라면 종목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여자였다. 중학교 시절 소년체전 육상 대표선수였던 이미진이 골프에 매몰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마라톤 풀코스 서브 3를 두 번이나 달성한 일, 시 생활체육 테니스대회에 나가 세 번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일, 댄스스포츠 라틴댄스 시니어 경연에서 입상한 일을 보더라도 이미진의 골프 입문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시작이 문제였다. 인연을 맺지 말아야 할 인간과의 만남이 결국 가정 파탄까지 이르게 하는 결말을 가져왔다. 그 인간이 이미진의 티칭 프로 권희철이고, 막장 드리마처럼 송미숙이 그의 아내였다.
사실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정황이며 소문에 대해 나는 거의 백지 상태였다. 이혼 합의서를 작성하기 얼마 전까지도 아내의 불륜남이 송미숙 남편이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만큼 아내의 불륜에 무지몽매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내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고, 내 마누라만큼은 그럴 여자가 아니다,라는 지극한 순정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티칭 프로 권희철과 아내 이미진은 수년 동안 선을 많이 넘어 버렸다는 구체적 내용이 그날 일식집에서 만난 송미숙의 입을 통해 전모가 밝혀졌다. 송미숙은 이미 권희철과 오래전 관계를 정리한 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이미진의 불륜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해 왔던 터였다. 돌싱녀의 마음을 담아 <사랑하기 때문에>를 노래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나를 향한 연민을 그 노래로 고백하고 싶었다며 실토했다. 나는 그날 괜히 송미숙을 만나 마음에 상처만 깊어지고 아내의 불륜을 검증한 확실한 자리였음을 자책하며 이튿날 이혼 합의서에 가차 없이 서명한 게 5년 전이었다.
“재호 씨! 정 박사가 조석은 어떻게 해결했어요?”
“아…, 장모님 돌아가시고 한동안 견과류하고 사과, 요구르트 정도로 아침을 드셨어요. 제가 가끔 해장국 같은 걸 배달해 드려도 거의 안 드시더군요. 점심은 잘 모르겠지만, 저녁은 저하고 가끔 소주 한 잔씩 하면서 혼자 사는 사내들의 고독이랄까, 뭐 그런 인생사에 대해 얘길 나누곤 하셨죠.”
“그 친구 전공이 고령화 사회와 노인의 고독인데, 자기가 자기 얘길 했구먼!”
“꼭 그렇지만 않았어요. 선생님도 잘 아시지만 장인어른이 좀 어린애 같은 순수함이랄까, 그런 게 있으세요. 이번 크리스마스 땐 깜짝 이벤트로 저하고 캐나다에 며칠 다녀오자는 말씀도 얼마 전에 하셨어요. 하핫!”
그때 유재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유재홉니다. 네네, 지금요?”
사위의 얼굴이 다갈색으로 변했다.
“네네, 지금 여기 로빈데, 바로 가겠습니다. 선생님! 저, 장인어른이 심장 쇼크가 왔답니다. 보호자가 빨리 와야겠다고 해서 잠시 올라갔다 오겠습니다.”
“내가 동행할까…?”
“아닙니다. 보호자 한 사람만 들어오라고 하네요.”
“알겠네. 그럼, 재호 씨가 대표로 고생하시게.”
중환자실 담당 간호사의 응급 호출 전화를 받고 유재호는 자리를 떴다. 밤 아홉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대학병원 로비는 저녁 무렵과는 대조적으로 파장(罷場)이 돼 스산스러운 분위기로 잠들어 가고 있었다. 보안업체 직원 두 명과 어떤 사연인지 모를 환자 보호자로 보이는 여성 한 명, 그리고 내가 대학병원 로비의 스산함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고독하다는 생각에 앞서 좀 막막하다는 생각이 어깻죽지를 짓눌렀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정 박사를 만나러 온다는 일탈의 기쁨에 대전역 앞 식당에서 순두부찌개 백반 한 그릇을 점심으로 먹고 온 게 전부였다. 자리를 이동해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진열대를 기웃거리다가 닭가슴살 샌드위치와 오렌지주스 한 병을 계산하고 나왔다. 밤 9시가 넘은 시각에 적막감마저 감도는 병원 로비에서 오렌지주스와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먹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자 느닷없이 목울대가 부풀어 오르며 컥, 하고 숨이 막혔다. 가슴이 답답해 왔다. 명치 부분을 주먹으로 서너 차례 쳐댔다. 뻐근한 통증이 명치를 관통해 척추까지 다다르는 것을 느꼈다. 겨우 호흡이 제대로 작동하는 거 같았다. 그제야 정 박사의 고통이 내게 현실로 다가왔다. 아, 정영우가 겪고 있는 심장 쇼크는 어느 정도의 고통일까?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걸까? 심폐소생술을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걸까? 골든타임을 놓친 건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에서 회오리쳤다.
국립대학교 사회학 교수로 40여 년 동안 노인의 삶 문제에 천착하여 이 분야 나름의 권위와 명성을 쌓아 온 정영우에게는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 심장 질환이었다. 이게 정영우의 가족력이기도 해서 그의 아버지가 환갑 나이에 주무시다 돌아가셨는데 돌연사였다. 그땐 사인을 알 수 없었기에 모두 갑자기 돌아가신 거라고 했지만, 지금식으로 심근경색이었다. 아무튼 아버지의 유전인자 때문인지 영우도 그간 관상동맥조영술을 세 번이나 했다. 그런데 그곳에 심장 쇼크가 왔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거기다 장모도 없고 직계인 딸마저 국내에 없는 정영우의 사위 유재호는 또 어떤 심정일까? 아마 죽을 맛이거나, 앞이 깜깜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울한 분위기의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는데 마침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유재호일 것이라고 전화를 받으려다 나는 순간 동작을 멈췄다. 평소와 같은 벨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보이스 톡 벨소리였다. 필경 해외에서 걸려온 전화일 것으로 짐작이 갔다. 그렇다면 보이스 톡이 아니라 보이스 피싱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교차됐다.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끝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쪽에서 들려온 게 여자 목소리였다.
“아, 누구시죠?”
“어머? 전 국장님? 전수현 국장님 맞죠? 저, 송미숙이에요. …캐나다.”
나는 순간 찔끔하며 오줌을 지렸다. 나이 들면서 충격적 상황이 오면 간헐적으로 오는 현상이었다.
“송미숙? 미숙 씨? 야, 이거 정말 뜻밖이네. 어디라구, 캐나다? 야, 캐나다에서 내게 전활 다 하고. 아니, 그런데 어떻게 캐나다에서 전화하는 거예요?”
“국장님! 정말 갑자기 캐나다에 오게 됐어요. 제가,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한국은 지금 한밤중이지요? 갑자기 전화드려서 많이 놀라셨겠지만, 정말 놀랄 일은요, 참! 국장님은 자녀가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혼도 홀가분하게 했다고….”
송미숙이 말한 정말 놀라운 일은 사람 관계였다. 6개월 전에 캐나다로 이민 왔다는 송미숙이 어제 에드먼튼 한인회 모임에 참석했다가 통성명하며 알게 된 이가 있었다고 했다. 남편은 기러기 아빠인데 춘천에 살며, 친정아빠는 국립대 교수로 퇴임했는데 노인 문제에 관해 한국에서 꽤나 유명한 학자라고 소개했다며 수다를 떨었다. 그녀의 친정아버지가 정영우 박사라고 이름도 알려줬다고 했다. 송미숙은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춘천에 살고 있는 대학교수 정 박사라는 얘길 몇 차례 들었기에, 그 여자를 만난 게 나를 만난 듯 반가웠고, 너무 반가운 마음에 한밤중이지만 내게 전화했다는 거였다. 세상이 좁았다. 게다가 진짜 중요한 얘기는 전화 말미에 송미숙이 내게 던진 클로징 멘트였다.
“애들도 없고 부인도 안 계신데, 국장님! 한번 날 잡아 오세요. 여기 캐나다 앨버타 주 에드먼튼이에요. 제가 버선발로 뛰어나갈게요. 호호홋! 국장님, 그 노래 아시죠? 사랑하기 때문에….”
가슴이 징하며 크게 울렸다.
편의점 앞 장의자에서 잠깐 눈을 붙였는가 싶었는데 누가 내 어깨를 살짝살짝 흔들었다.
“선생님, 선생님! 유재홉니다.”
“어이, 아! 내가 깜빡 졸았었군! 그래, 어떻게 됐나?”
“가까스로 정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정말, 다행이네. 몇 신가? 열 시가 넘었군! 그러나저러나 여기 부근에 어디 모텔이라도 가야 하지 않겠나? 사위도 많이 피곤할 텐데….”
“아닙니다. 지금 보호자는 병원을 떠나지 말고 대기하라고 해서… 저, 선생님 주무실 만한 곳을 제가 폰으로 예약해 드릴게요. 우선 거기서 주무시고, 제가 상황 봐 가며 전화 드리겠습니다. 주치의 말로는 오늘 내일이 고비일 거라고 하는데, 아무튼 전 병원에서 대기해야 합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이 부근 숙소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닭갈비 가공업을 한다는 사위의 영업적 센스와 장인 친구에게 진심을 다하는 모습에 내 마음이 어느 정도 따뜻해지고 있었다. 대개 터미널 부근이나 유흥업소 주변에 숙소가 밀집돼 있게 마련이고 병원 부근에선 숙소를 본 기억이 거의 없는 나로선 끝내 모텔을 찾지 못하면 병원 로비에서 쪽잠이라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재호가 소리쳤다.
“여기 찾았습니다, 선생님! 대략 병원 정문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거리인데요. 낙원 모텔 208호실로 예약했습니다. 결제했으니까 그냥 주무시면 됩니다. 급한 일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친구한테 신세 질 걸 사위한테 지는구먼! 그럼 내 눈 좀 붙이고 올 테니 뭔 일 있으면 꼭두새벽이라도 전화해요.”
“염려 마세요, 선생님. 편히 주무시고요. 상황이 악화되면 저 캐나다에 있는 와이프, 내일이라도 오도록 할 겁니다.”
“알겠어요. 그럼, 수고하시게 재호 씨!”
유재호와 헤어져 낙원모텔로 들어왔다. 낡은 건물이지만 실내는 리모델링을 했는지 새 건물 같은 분위기였다. 침대에 누웠지만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와 오히려 눈이 감기지 않았다. 적막감은 병원 로비에서나 모텔 방 안에서나 비슷한 농도로 나를 칭칭 감싸고 있었다. 이틀 전 정 박사가 자기 연구실에 놀러 오겠냐고 물었을 때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휴대폰에서 들려온 음성도 평소와 다름없었고 내가 건강을 물었을 때도 전혀 어떤 징후나 낌새를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내 쪽의 건강을 염려하던 정 박사였다. 혼자 살고 있는 입장은 서로 같지만 자기는 사위하고 가끔 저녁을 함께 먹는다며 나보고 잘 챙겨 먹으라고 충고까지 했던 정영우였다. 2년 전 내가 영우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도 여러 종류의 서적과 자료를 책상에 올려놓고 집필에 몰두해 있었지만, 정작 그에게 노쇠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기력이 쇠해 보여 노인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 쪽은 나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의자에만 앉아 있으면서 자네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나?”
딱한 기분이 들어 내가 그렇게 물었다.
“이보게! 자네가 보기엔 내가 책상에서 글만 쓰고 있는 거처럼 보이지? 아냐! 딱 두 시간이야. 두 시간만 이렇게 하는 거야. 그리고 20분 휴식! 그때 노마 데리고 밖에 나가서 산책하고 오는 거지.”
내가 놀라웠던 건 고령화 사회와 노인 문제에 관한 국책 연구 보고서를 작성하면서도 정 박사는 정해 놓은 시간에만 집필에 전념하고 주기적으로 행동 패턴을 바꿔 가며 생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컴퓨터 책상 옆에 포스트잇으로 붙여 놓은 일과표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6시 기상. 맨손체조. 화장실(용변&세수)
-조식(간편 영양식). 음악 감상(유튜브 동영상 : 교향곡 시리즈)
-관련 서적 독서 후 노마와 산책
-원고 작성(2시간). 중식(김밤&면). 인문학 감상(유튜브 동영상 : 로마의 흥망성쇠)
-노마와 산책. 관련 자료 검토. 원고 작성(2시간). 멍 때리기.
-원고 작성(2시간) 후 석식(별도식)
-야간 산책 후 샤워 / 티브이 시청 / 11시 취침
외로움 때문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조여 왔다. 규칙적인 생활 패턴과 일에 대한 적절한 성취감, 철저한 자아 건강 체크, 정기적인 병원 진료. 아내와 사별 후 이런 생활을 철저하게 유지해 왔던 정영우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이 사태가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고 생각됐다. 그런 생각이 침대에 누운 나를 자꾸 쿡쿡 찌르며 건드렸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진과 이혼 후 혼자 지내 온 5년의 세월이 흑백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발가벗은 이미진의 몸뚱어리도 보였고, 그 나체와 뒤엉켜 어느 호텔 침대에서 뒹구는 티칭 프로 권희철이란 놈의 얼굴도 어렴풋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때 휴대폰이 몸서리를 치며 발작했다. 정영우 휴대폰이었다. 휴대폰 액정 화면의 시간이 오전 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선생님. 혹시 주무시는 건 아니었나요?”
유재호였다.
“아뇨. 괜찮아요. …새벽인데? 뭐, 별일 없지요?”
저쪽에서 응신이 없었다.
“여보세요, 재호 씨? 전화가 왜 이러지?”
“선생님, 저 선생님! 장인어른이….”
“이봐, 재호 씨! 뭐 어떻게 됐다는 거야?”
“우, 우, 운명하셨습니다!”
유일한 혈육인 캐나다의 딸을 기다리느라 하루를 연장해 장례는 나흘장으로 치러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반에서 일이등을 다투느라 선의의 라이벌이었으면서도 가장 배짱이 맞았던 정영우였다. 내가 지방 사무관이 됐을 때, 영우는 시간강사에서 전임으로 갔고, 내가 서기관이 됐을 때 영우는 사회과학대 학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말 가깝고 아까운 친구였다. 그를 먼저 하늘로 보내고,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공허감과 고독감은 장례 기간 내내 나의 모든 기운을 앗아갔다. 나흘 밤낮을 빈소에서 보낸 탓도 있겠지만 그냥 허망했다. 끝없는 허망함이 내 옆구리에 달라붙어 기필코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 연실 비누로 얼굴을 문질러 대고 평소 바르지 않던 스킨로션도 덧입혔다.
장례 기간 동안 고교 동창 이삼십여 명이 다녀갔다. 생활 연고지가 달라서였는지 정작 내 근황을 묻는 애들은 극소수였다. 한결같이 ‘어이 수혁이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또는 농담 섞인 말로 ‘아직 살아 있었네. 만나서 반갑다’ 정도의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동창 한 명이 예외였는데 그는 내게 다가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오래전에 주님을 영접한 수혁이가 이젠 원로장로님이 됐겠지?”
“가만있자, 이게 누구지?”
얼굴은 어렴풋한데 전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하, 나 오 목사야. 오요한!”
오요한? 너무 놀라웠다. 그는 고1 때 내 짝이었다. 짝이었던 관계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한동안 친해졌다. 몇 주 후 친분이 더 두터워져 그의 설득으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오요한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교회였다. 그렇게 1년 정도 교회를 다녔던 게 기억의 전부였다. 그걸 기억해 낸 오요한은 아버지가 개척한 교회에 자기는 이제 원로목사로 있다며 내게 근황을 알려주고 헤어졌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4박 5일의 체류였다. 장례 기간 내내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와 나는 틈틈이 유가족 휴식 공간에서 비몽사몽 중에 눈을 붙였다. 간혹 생전의 정영우가 나타나 나를 깨우기도 했고, 송미숙의 전화가 캐나다에서 걸려와 통화한 장면도 한두 번 있었다. 결정적인 건 가위에 눌려 깨어난 순간이었다. 염습대 위에 누워 있는 시신이 정영우가 아닌 내 육체였다. 내 몸뚱이가 염습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 장면이었다. 사위 유재호가 나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한동안 악몽은 계속됐을 것이다.
예정에 없었던 친구 정영우를 저승으로 배웅하고 나서 산사태처럼 밀려오는 허망함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자신을 맡겨 보기로 했다. 이제 열다섯 시간 후면 송미숙을 만나러 가는 에어캐나다는 앨버타주 에드먼튼 국제공항에 착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