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2월 6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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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존재로 살아온 우리
우리는 오랫동안 ‘일하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해 왔다. “무엇을 하세요?”라는 질문은 사실상 “당신은 어떤 일을 통해 세상과 관계 맺고 있습니까?”라는 물음이다. 직함이 정체성을 대변하고, 소득이 존재의 무게를 증명하는 시대. 그 안에서 ‘노동’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자존의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한순간, 그 질서가 무너질 때가 있다. 정년을 맞거나, 회사를 그만두거나, 원하든 원치 않든 ‘일자리를 떠난 상태’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낯선 침묵으로 채워진다. 이제 더는 출근할 곳이 없다. 명함을 꺼낼 일도, 회의에 참석할 이유도 없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가 만들어준 무대에서 내려오게 된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질문, ‘나는 이제 누구인가?’
일자리 없는 시대의 아이러니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사회는 더 이상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 정년이라는 이름으로 출구를 열어 주었고, 구직 시장에서는 “경력이 많다”는 말조차 무겁게 들린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회가 한편으론 끊임없이 우리에게 ‘생산적인 삶’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존재로 간주하고, 빈 시간은 무능의 증거가 된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 기준을 내면화한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일자리에서 밀려났음에도 “나는 아직 일할 수 있다”고, “나를 써 달라”고 애타게 외치는 사람들. 자신을 ‘쓸모없음’으로 규정하지 않기 위해 기를 쓰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사회가 나를 원하지 않는데, 내가 왜 끝까지 매달려야 할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고 자존감을 낮추기보다는, 차라리 관점을 바꾸는 편이 현명하지 않을까? 그 모순을 직시하고,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나는 왜 일하려 하는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나는 왜 일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그 답이 단순히 생계를 위한 것이라면, 그에 따른 밥벌이의 대안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일 자체가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면, 오히려 거기서부터 다시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현대인이 ‘소유 양식’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일은 소득을 위한 수단이 되고, 우리는 일을 통해 ‘무언가를 가지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만다. 만약 일이 나를 받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존재 양식’으로 돌아갈 기회일지도 모른다. 직함 없이도 나는 나인가? 소득 없이도 나는 여전히 존엄한 존재인가? 그런 질문들을 품고 살아가는 삶. 그것은 때로는 노동보다 더 깊은 사유와 성숙을 요구한다. 물론 이것은 당장 생계가 절박한 사람에게는 사치스러운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된다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상황을 패배가 아니라 자신을 재발견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역사 속 노동의 그림자
노동이 곧 삶의 가치라는 인식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역사를 돌아보면 뜻밖의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머슴과 노예는 세습되는 ‘정규직’이었다. 평생 일했고, 그 자식도 똑같이 일했다. 반면 귀족과 지배층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놀았다. 놀면서 철학을 논하고, 음악을 즐기며, 정치를 했다. 우리는 그것을 ‘노는 삶’이라 부르지 않고 ‘문화’라고 불렀다.
물론 그러한 사회 구조는 명백히 불평등했고,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코 수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노동이 없는 삶은 인간다움을 위한 전제였다. 쉴 수 있기에 사유할 수 있었고, 시간이 있었기에 창조가 가능했다. 그런 맥락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지금의 상황을 ‘낙오’로 볼 것이 아니라, 어쩌면 ‘회복의 시간’으로 재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자리가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여길 필요는 없다는 것. 일하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 오히려 이제야 진정으로 ‘나’로 살 시간을 갖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디폴트 값을 전환하라
우리는 오랫동안 “일하고 남는 시간에 쉰다”는 삶의 공식을 내면화해 왔다. 주말과 휴일, 연휴와 퇴직이 ‘보상받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공식을 뒤집을 때가 되었다. “쉬다가 필요하면 일도 한다.” 이 사고방식의 전환이야말로 삶의 중심축을 ‘노동’에서 ‘자기 존재’로 옮겨 놓는 일이다. 이것은 게으름을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진정한 주체성을 회복하자는 선언이다. 일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스스로 조율하는 것. 그 자유로운 상태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로 존재하게 된다. 버트런드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하루 네 시간의 노동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나머지 시간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예술, 관계, 사유, 놀이 등등. 그 모든 것은 충분히 ‘일’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 혹은,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라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놀이하는 존재로 살아가기
인간을 정의하는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호이징아는 ‘호모 루덴스’라 하여 ‘놀이하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인간 문명의 위대한 창조인 종교, 법, 철학, 예술 등이 모두 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놀이는 무의미한 소일거리가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행위였다. 은퇴 이후 노동에서 해방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호모 루덴스’로 되돌아갈 기회다. 놀이처럼 일하고, 일처럼 놀며, 경계를 허무는 삶. 그 속에서 우리는 다시 창조자가 된다. 은퇴 후의 삶, 혹은 이직 사이의 공백기는 단지 ‘멈춤’이 아니다. 그것은 전환의 시간이고, 삶의 방향을 다시 설계할 기회다. 그 시간을 낭비라 여기지 말자. 오히려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나를 돌아볼 수 있었고, 앞으로 무엇을 할지를 생각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진정한 자유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된다. 일자리가 나를 거부했기에, 나는 비로소 나를 위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일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감각. 그것은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새로운 자유이다. 은퇴한 당신, 이제는 삶의 디폴트 값을 바꿀 때다. 일 중심에서 존재 중심으로,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