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2월 684호
60
0
<춘향가> 판소리 공연장이다. 두루마기에 부채를 든 소리꾼과 북과 북채를 쥔 고수(鼓手)뿐인 단출한 무대지만 만만치 않아 보인다. 거기에 관중들의 호응의 열기가 대단하여 꽉 찬 느낌이다.
“엇!”
고수가 기합 소리를 내며 북채로 타당 탁, 북과 북테를 친다. 이어 소리꾼이 “전라좌도 남원골∼”하며 사설조의 아니리를 시작한다. “엇!” 타당 탁… 다시 고수가 북과 북테를 치자 소리꾼은 본격적인 창으로 들어간다.
고수는 시작이나 변화 음절마다 박을 치며 ‘얼씨구’ ‘좋다’ ‘그렇지’ ‘잘한다’ ‘얼쑤’ 등의 짧은 소리로 소리꾼을 추슬러 청을 연다. 소리꾼은 고수의 박과 기합 소리에 따라 창을 하며 몸짓인 ‘발림’까지 소리 무대를 펼쳐 나간다. 소리 마당이 무르익어 가면 이번에는 관중석에서 고수의 장단과 함께 ‘얼씨구’ ‘좋다’… 하며 소리판에 뛰어든다. 이처럼 고수와 관중이 분위기를 띄우고 소리꾼의 흥을 돋우기 위해 내는 소리와 몸짓이 추임새다.
우리의 전통 음악극 판소리에는 추임새가 살고 있다. 이 새는 소리꾼에게 <흥부가>의 제비처럼 활력소가 되는 파랑새다. 추임새는 소리와 박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배달민족의 흥과 신명을 불러내는 맛과 멋의 발원지다.
판소리는 소리꾼의 득음(得音)을, 고수는 박(拍)을, 관중은 소리를 알아듣는 지음(知音)들이 모인 음악극이다. 소리꾼은 득음을 위해 깊은 산속이나 폭포수 아래에서 목을 다듬어 앞섶이 몇 번이나 붉게 물들어야 비로소 소리를 얻게 된다. 고수는 박은 물론 변화와 전체를 헤아리는 반주자와 지휘자다. 관중은 소리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의 벗인 지음이다. 이 셋이 추임새를 연결고리로 판소리를 만들어 내며 공동체의 활력을 만들어 내는 풍속의 뿌리가 된다.
세상에 고수와 관중이 소리꾼의 창에 소리를 맞받고 어깨춤을 추는 무대가 어디 있던가. 주고받으면서 만들어지는 소리와 박은 우리의 흥과 신명이다. 또한 소리꾼을 아끼고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네 인심인 것이다. 화성과 대위법에 익숙한 나에게 어깨춤이라는 새로운 리듬을 만나게 한 무대 음악이었다.
판소리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의 음악극으로 오페라와 비교된다. 오페라 반주를 맡은 관현악단과 지휘자가 고수라면 창은 아리아(Aria)이고 아니리는 이야기풍의 노래 레시타티보(recitativo)이다. 발림은 가수들의 무대 연기와 조명 춤사위를 나타낸다. 이에 비해 판소리는 소리꾼 한 명이 수많은 오페라 출연자의 역할을 하는 일인다역이다. 오페라의 다양한 무대 장치와 화려한 의상에 비해 판소리는 돗자리 하나 바닥에 깔고 병풍 하나면 족하다. 선비 차림에 쾌자(快子)를 걸치거나 한복 차림의 여성 명창 의상은 어디서나 어울릴 수 있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음악 문화 유산이다. 어찌 일인다역을 하는 소리꾼과 고수를 가만히 둘 수 있겠는가. 관중이 나서서 추임새를 날려 한마당을 이루게 된다.
추임새는 오랫동안 농사일을 하면서 익숙해진 노동요 ‘선소리’ 중에서 답을 하던 일꾼들의 몫을 관중들이 맡은 것이다. 농악대의 꽹과리 소리, 모내기, 논매기, 타작마당, 마을 대항 줄다리기 등을 함께해 온 판소리 마당을 채운 관중들은 이미 추임새가 몸에 배어 있다. 이런 관중들이 소리꾼의 예술적인 창과 고수의 정교한 박에 추임새를 날리는 것은 어깨춤과 같이 쉬운 일이다.
판소리의 소리꾼을 명창이라 부르듯 청자를 넘어선 듣는 자를 ‘귀가 명창’이라는 뜻으로 귀명창이라 부른다. 판소리는 소리꾼, 고수, 관중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소리꾼, 고수, 귀명창이 어울려 하나의 놀이마당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언어와 몸짓이 짧고 강한 추임새인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음악 연주회에서 추임새가 무대를 좌우하는 곳은 여기뿐이다. 목적은 단 하나 소리꾼이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끌어내어 좋은 연주가 되고 어울리는 축제의 한마당을 이루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추임새가 무대를 떠나 세상으로 나오면 격려와 칭찬이 되어 화합과 화목의 언어가 된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도 주위의 활력소가 되는 추임새의 역할에 반해 버렸다.
새천년 어느 가을밤에 닥친 화마로 나는 아침마다 선물처럼 나타나던 태양을 잃어버렸다. 햇님이 내 생명이고 삶의 추임새인 줄도 모르고 지냈다. 밤과 낮이 하나가 된 생활은 판소리 마당에서 외톨이가 되었던 때와 같았다. 얼마나 긴 시간인지 모르는 사이 몸을 움직여 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쉬지 않고 일백 보를 걸은 날이다. 그때 ‘해냈구나’ 하며 포효했던 외침이 새롭게 만난 추임새다. 그날부터 나는 추임새가 살 수 있는 숲을 만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일천 보를 걸을 수 있었다. 하루에 일만 보에 도전했다. 하루 종일 걷고 쉬고를 반복하여 목표를 이룬 날에는 그동안 내게 던졌던 추임새가 제법 좋아 보이는 숲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걸을 때마다 추임새가 앞뒤를 날며 노래하고 격려한다. 이번에는 녹음도서 독서에 도전했다. 하루에 한 권을 읽어 낸 날은 또 다른 추임새가 내 마음을 온통 채웠다. 걷고 읽는 숲이 울창해질수록 추임새의 날갯짓은 소리를 더해 간다. 책을 읽으며 걷는 생활의 숲에 다시 클래식 음악을 보태 나의 비보림(裨補林)을 만들어 냈다. 읽어 주는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삶은 생활의 추임새가 가득 넘치고 있다.
불편한 생활이지만 매월 초하루와 매주 월요일에는 나와 연결된 분들에게 15분 내외의 클래식 음악을 보내고 있다. 추임새는 메아리처럼 내게로 돌아왔다. 오늘도 나는 내 생활의 마디마다 숨표나 쉼표마다 추임새를 보내고 받기 바쁘다.
판소리 춘향가에 들어간다.
두둥 탁-! 엇! 타당 탁… 얼씨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