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2월 6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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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이 남의 이야기로 흘려버렸다. 사춘기에 열병처럼 겪는 줄 알았다.
서울에 살다가 부천으로 이사 간 막내아들 큰손녀가 학교를 안 간다고 했다. 학교만 가면 머리와 배가 아파서 수업하다 집으로 온다고 했다. 그렇다고 야단쳤다가 더 빗나갈 수 있다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때로는 핑계라는 생각이 들어 매를 들고 싶지만, 부모를 신고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했다.
손자가 백일 때부터 막내 집에서 오랫동안 머물게 되었다. 그때 큰손녀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다. 재잘대는 작은손녀와 달리 말이 없었다. 책상에 앉으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거나 친구와 채팅하고 있었다. 유일한 취미는 일본 만화 캐릭터 모으는 것이 낙이었다. 혹시라도 동생들이 캐릭터를 만지거나 망가트리면 분을 못 이기고 펑펑 울기까지 했다. 성격이 소심하다고 생각했지만, 셋이나 되는 동생들이 말썽 피우면 엄하게 대하는 의젓함을 보이기도 했었다. 어린 동생들은 언니가 부르면 눈치를 보며 슬슬 피해 다녔다.
손녀는 교과목 중 수학은 잘했고, 새벽부터 학교와 학원으로 내몰리는 듯 보였지만 요즈음 추세라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태어나서부터 서울에 살다가 다른 도시로 이사 가면서 큰손녀는 심적 부담이 큰 듯 보였다. 서울 집 가까이는 아기 때 키웠던 외가가 살고 있었다. 하굣길에 거리에서 할머니를 만나면 어리광도 부리고 외식도 자주 했었다. 손녀는 한참 예민한 시기에 전학한 탓도 있을 것이라고 아들에게 말했다. 부러움 없이 성장하는 손녀라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쌓이는 불만이 있었다니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손녀 데리고 주마다 상담 다닌다는 자식에게 내가 사춘기 때 겪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냈다.
가출한 엄마 대신 이모가 살림해 주다 결혼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맡아야 했다. 동생 셋과 아버지를 돌보는 일은 열다섯 나이에 버거웠다. 머릿속에는 언제나 집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마침 이웃에 힘들 때마다 다독여 주는 군인 가족이 있었다. 돌도 안 지난 사내아기와 놀다 보면 점심으로 내놓는 손으로 빗은 만둣국이 먹고 싶어 자주 갔었다.
어느 날 여름방학 때 군인 가족 언니는 시댁에 심부름을 주겠냐고 물었다. 집이 싫어 무작정 나선 기차 여행이었다.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한편으로 답답한 집을 벗어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한나절이 훨씬 지나 내린 역은 충주와 가까운 작은 간이역인 ‘주덕’이었다. 반세기가 넘어 기억은 흐릿하지만 ‘주덕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언니의 시동생을 찾아갔었다.
언니의 시댁 가는 길은 다리도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언니의 시동생은 장마철로 불어난 물살에 옷 젖는다며 나를 업고 개울을 건넜었다. 그곳에는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노부부는 마치 친손녀를 만난 것처럼 살갑게 맞이했었다.
이웃에는 노부부의 동생이 살고 있었다. 새로 지은 한옥의 우아함과 코끝에 스미는 나무 향을 따라가면 내 또래가 있었고, 위로 밑으로 다섯 자매가 살고 있었다.
찌는 듯한 삼복더위에 뒤뜰 우물가에서 달빛을 타고 내려온 선녀처럼 다섯 자매와 함께 희희낙락대는 한여름 밤의 피서지였다. 앞 도랑에 철철 넘치는 물가에서 시도 때도 없이 손빨래하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집에서는 경험할 수 없던 풍요로운 환경이 발목을 묶어 놓았었다.
장날이면 지게에 봇짐을 가득 싣고 십여 리 넘는 언덕길을 넘어오는 노부부를 기다렸다. 들판에 목화꽃으로 뒤덮인 풍경에 눈이 시려 오기도 했었다. 활짝 핀 목화를 한 움큼씩 바람에 날릴 때면 노부부의 두런대는 소리가 들렸었다. 제일 먼저 내 손에 들려주는 달콤한 꽈배기, 잔잔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 시절을 가끔 꿈속에서 만나고 있다.
한편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여름방학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딸 걱정에 아버지는 그 언니를 닦달했었다. 편지가 오고 급기야 전보까지 왔었다. 할 수 없이 눈물겨운 작별을 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기차에 올랐었다.
한 달 넘은 시간이 마치 꿈속에서 헤매다 온 기분이었다. 노부부의 자애로움과 이웃 자매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눈에 선해 만사에 흥미를 잃었다.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집을 떠나고 싶었다.
방학이 끝나고 열흘 넘도록 결석하자 담임이 찾아왔다. 학교생활에 적응 못하는 내 손을 잡고 문예반으로 갔었다. 그곳에서 글을 쓰면서 방황했던 사춘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혹시나 사춘기 때의 내 과거를 손녀가 밟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었다. 손녀는 대학 지망을 국문학과로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적극적으로 칭찬해 주고 책이라도 맘껏 사줬어야 했는데, 손녀에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은 후 취미로 글을 쓰라고 한 게 내내 후회가 되었다.
아들 부부를 애태우는 손녀가 추석에 왔었다. 우울한 모습을 조금은 벗어난 듯 보였다. 살도 빼고 자신을 가꾸는 뽀얀 얼굴이 조금씩 자신감을 찾아가고 있었다. 한가한 시간에 손녀와 마주 앉아 사춘기 시절 내 경험을 스스럼없이 털어놓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신의 멘토가 되어 줄 사람이나, 평소에 하고 싶었던 취미생활을 해라.”
손녀가 사춘기의 긴 터널을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손녀는 기타를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다음 달부터 학교에 열심히 다닌다고 아들 부부와 약속도 했단다.
성장 과정이 남보다 다른 것뿐이지 늦은 것은 아니니, 재촉하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했다.
“엄마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네.”
아들은 빙그레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