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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의 변주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김철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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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들며 흘러내리던 한 점, 곧 떨어질 듯 아스라이 매달려 있던 투명체가 눈을 사로잡는다. 어쩜 저리 영롱할까. 뚜우욱 하고 떨어질 듯도 하지만 끝내 미동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그린 그림은 아닐 터. 동양의 무명 화가를 주목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관심과 생활고에 시달린 화가에게 남은 것은 알량한 캔버스와 열정뿐, 타국은 이방인에게 지독한 고독과 정체성 잃은 방황만을 안겨줬다. 어쩜 그가 저녁이면 마주했을 밤의 유성은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의 작고 맑은 눈물은 아니었을까. 생활고에 그림을 그린 캔버스를 재활용해 또 다른 그림을 그렸다. 물감이 떨어지기 쉽도록 캔버스 뒷면에 물을 뿌렸다. 어느 날 햇살을 받으며 캔버스 표면에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밤의 유성을 닮은 아련함, 미미한 존재가 갖는 아름다움에 취해 50년간 ‘물방울’만을 그렸다.

‘나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녹이기 위하여 물방울을 그린다.’

왜 물방울만을 그리냐는 세간의 질문에 은빛 억새 눈부시게 흰 구레나룻의 화가는 ‘물방울은 그냥 물방울’이라고 말했다. 차마 타국에서 자신이 목매게 불러보던 어머니를 형상화한 거라고 말하지 못했으리라. 위대한 작품은 형이상학적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을 보고 흘린 눈물이 절대 아니다. 세상을 정화하는 물, 환상과 현상의 경계 등 현학적인 말로 포장하지도 않았다. 마흔에 마주한 물방울을 반백 년 동안 그렸지만 그중 똑같은 물방울은 하나도 없다. 스며들며 글자를 번지게 한 물방울, 큰 물방울, 빨리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합쳐진 물방울, 제멋대로 찌그러진 물방울 등 다양한 변주가 마치 인생사 같다.

올해 들어 부쩍 비가 내린다.

사위가 정적에 잠기자 저만치에서 달려온 기억 한 자락이 명치에 걸린다. 음력 시월 칼바람 속에서 아버지를 땅에 묻고 오던 날 밤 솜이불 속에서 훌쩍이던 어머니가 흘렸을 한 방울의 뜨거움. 장차 살아갈 앞날에 대한 두려움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어린 자식들의 흔들리는 눈망울을 보았다. 두려움도 사치였다. 악바리같이 굳은 심지만으로 번망한 세월을 버텼다.

마흔여섯 꽃 같은 나이에 과부로 살아온 인생이 사십 년 세월이다. 일엽편주에 다솔식구를 거느리고 험난한 인생의 강을 건너갈 엄두에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한 방울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바다의 색이 바뀔 정도다. 조붓한 골목 길가 전셋집에 터를 잡고 십여 년을 식당 일로 물젖은 손 마를 때가 없었던 고달팠던 날은 당신 생애 잊을 수 없는 타향의 서러움이었음을 어찌 모를까.

그 후 ‘어머니의 눈물’을 본 것은 팔순이 넘어 찾아온 잦은 병치레 때문이다. 전화로 어머니에게 안부를 물어오던 누나들의 연락은 노모의 잦은 탄식으로 뜸해졌다. 반가운 기색은 오간 데 없고 아프다는 소리만 줄곧 해대니 마음이 멀어진 게다. 약발로 퉁퉁 부어오른 얼굴에 유독 작아진 눈, 그 속에서 흘러나온 눈물은 서러움이었다. 편히 든 잠 그대로 저세상으로 갔으면 했다는 속내를 말할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그 어려웠던 시절도 꿋꿋이 견뎌낸 강인했던 당신의 모습이 오간데 없다. 북두갈고리 손이 되도록 억척으로 살아온 숨소리가 옅다.

모든 게 막막하던 시절, 모자(母子)는 언젠가 찾아올 행복한 시절을 꿈꿨다. 그런 그림을 그렸다. 치열하게 산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것, 이 고비만 넘기면 신기루 같은 삶이 펼쳐질 거라는 기대감은 지난한 삶을 버티게 한 꿈이요 힘이었다.

억겁의 세월 끝에 만들어진 종유석은 인고의 상징이다. 어두운 석회동굴의 천장에 매달려 있던 그 종유석도 한 방울의 물에서부터 시작한다.

화려한 색채나 모양도 없는, 그냥 물방울 그림이 뭇사람의 사랑을 받는 건 순수한 열정과 집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투명하게 ‘무’로 되돌려보내기 위해 오직 물방울에 집착해 온 노 화가에게 진정한 물방울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저 ‘물방울은 물방울일 뿐’이라고 했거늘 무얼 다시 묻는단 말인가.

머나먼 먼 타국에서 고작 물 분자에 불과한 형체만을 그렸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란 존재는 소리 내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느껴지는 끌림이 있다. 속으로 절규하듯 부르다 급기야 눈물이 됐을 아련함의 대상. 그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름이다. 나는 그의 물방울에서 어머니의 눈물을 보았다. ‘물방울 화가’의 얼굴이 유난히 맑아 보인다. 그도 누군가의 아들임을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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