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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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할머니란 소리를 들은 지도 꽤나 오래된 노인이라고 해 두자. 계절에 비유하면 가을도 지나 백설이 분분이 쌓이는 한겨울쯤이라고 할까. 그동안 그 여자는 열심히도 살아온 것 같은데… 오늘 새삼 지난날을 뒤돌아보니 꿈길같이 희미하고 잠깐 순간처럼 짧게 느껴진다.
그 긴 세월이 왜 단축되어 짧고도 희미하게 기억될까. 망각의 그림자가 그의 뒤를 따라와서일까. 뇌의 세포가 자꾸만 죽어가서일까. 나이의 숫자가 하나씩 더할 때마다 엄습해 오는 허무의 무게가 검던 머리카락을 하얗게 탈색해 가고, 곱던 얼굴에 골 패인 주름살이 자꾸 깊어져 갈 때 그의 대명사는 노인으로 개명되어 버렸다.
심지어 요즘 시대에 와서는 나이든 노인들을 꼰대라는 명칭을 붙여서 쓸데없는 잔소리나 하는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지 않는가. 노인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억척스레 살아온 삶의 무게가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아 누르고 힘을 빼니, 곱게 늙어가기가 어디 그리 쉬웠겠는가.
돌이켜 보면 아쉽거나 후회할 것뿐이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안달복달 허송세월하고 시간 낭비한 일, 지금 와 생각하면 어이없기조차 하다.
다른 노인도 그럴까마는 대체로 인간의 육체적 심리적 노화 정도는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직 마음은 따라 늙지 못해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이 불균형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그는 방랑하는 여행자처럼 가끔은 가는 길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정지된 상태에서 그냥 머무르고 있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변화하여 그를 앞질러 달아나듯 뛰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문명과 문화의 급속한 흐름에 따라가려다 어지럼증에 걸려 혼돈 상태로 경직되어 버리기도 한다.
지금은 디지털 정보의 과잉 시대,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이 일상화되어버린 시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소통하지 않고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매개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기계로 조작하며 살아가려니 숙달되지 못한 그의 인지능력으론 얼마나 서툴고 어려운지 역부족을 통감한다.
1∼2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중학생 손자에게 스마트폰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다. 손자는 할머니에게 충고 하듯 일러준다.
“할머니! 이 스마트폰 고장 안 나니까 마음대로 눌러보고 자꾸 연습해 보세요.”
어른들보다 더 바쁜 손자는 할머니가 너무 답답하여 이렇게 일러주면서 자리를 피하려는 눈치다. 그래도 잘못 만지면 고장 날까 봐 손자의 말을 믿지 못하고 마음대로 조작해 보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이미 몸에 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엉거주춤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길이 안 보인다.
삶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전 열심히 리허설만 하다가 정작 무대에 올려보지도 못한 채 뒷전으로 밀려나는 이 기분, 허탈하고 한심한 일 아닌가. 그럴지라도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더 이상 뒤처지고 싶지 않아서 이곳저곳 찾아다니면서 배우기도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봉사 활동에도 참여하여 부지런히 뛰어 보는데 노인의 설 자리는 그리 만만치가 않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는 삶의 방향을 과감하게 자기 위주로 바꾸기로 한다. 한 주에 두세 번, 단단히 등산복을 차려입고 앞산을 오른다. 숨이 차도록 씩씩하게 걸어서 산속으로 들어가는 그때의 기분이 정말 좋다.
이름 없는 들풀에서부터 갖가지 뭇 생명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산의 속삭임이 너무 좋다. 밤에 내린 이슬이 사라지기 전 아침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는 숲길에서 그는 건강도 얻어내고 사색도 하다가 시를 위한 아름다운 시어(詩語)도 찾아온다. 잠들기 전엔 무언가 몇 줄의 글이라도 써서, 혼자만의 글상자에 꼭꼭 저장해 두고 스스로 만족감에 젖어 편히 잠든다.
그는 지루하거나 외로운 것이 싫다. 그래서 사람이 좋고 친구는 더 좋다.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시며 시시덕거리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때만은 그냥 여인의 존재로만 멈추어 있는 가장 자신만만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잘할 수 있는 것과 해 보고 싶은 것은 망설임 없이 시도하고 끝을 본다. 오만하게 살았던 젊은 날을 호되게 반성하면서, 고운 심성으로 타인을 먼저 배려하며 섬기는 삶으로 방향전환을 하려고 애를 쓴다. 이 수칙들이 한갓 허무한 물거품이 되지 않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할 것을 다짐해 둔다.
존재하는 동안 순간순간 한 생애를 이어가야 하는 것이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일진대, 인간 누구나 스스로 감당해 가야 할 의무이고 책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노인을 위한 어설픈 반성과 변론을 해 본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한낮이 지나면 해가 지듯이, 꽃이 영원할 수 없듯이. 그리고 세월이 그를 데리고 알 수 없는 그곳으로 데려다 놓을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이고 생각하며 아름답게 살아갈 것을 스스로와 굳게 약속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