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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겨울 밤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혜복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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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들은 한 주 전에 친정집에 다녀갔기에 명절에 올 사람은 남동생뿐이었다. 이번 설에는 나도 가게 문을 열기로 했기에 남동생과는 전화로만 인사를 했다. 며칠 후 아버지 제사 때나 얼굴 보자고 하니 동생은 하필 그날 일본 출장이 잡히는 바람에 제사에 참석을 못한다고 했다. 모두 모이면 웃을 일이 많아 창밖으로 새 나가는 고성이 걱정될 때도 있지만 그래봐야 일 년에 형제들 모두 모일 수 있는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이번엔 아들 없는 제사상을 올려야겠지만, 다행이라면 네 명의 사위들이 모두 참석해 그럭저럭 서운하지 않은 훈훈한 저녁이 될 것이다.

친정에 도착하니 엄마는 소쿠리 한가득 전을 부쳐 논 상태였고 천천히 나물을 무치고 메와 탕국 정도만 끓이면 되었다. 한창 달려오고 있을 동생들에게 어디쯤 오나 하고 전화를 하며 밥 안칠 시간을 예상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홍천 거의 다 왔는데 앞에서 사고가 났는지 차가 꼼짝 못 한다고 했다. 차가 전혀 안 움직이는 데다 배까지 고프다는 얘기였다.점심들도 안 먹고 출발했을 텐데 거의 다 와서 정체라니…, 집에서 기다리는 마음보다는 길에 갇힌 심정이 몇 배로 타들었으리라. 아무리 강원도라지만 요 며칠 뻔질나게 내렸던 눈이다.

들어서자마자 허겁지겁 요기 하고 모두 손을 보탰다. 제사는 조상을 기리는 날이기도 하지만 한자리에 모인 가족 모두에게 새삼 감사함을 되새기게 되는 날이다. 정성껏 장만한 제수로 차려지는 상차림은 매만지는 손길, 담아 올리는 마음, 주고받는 동작 하나하나에 믿음이 스며있다. 어디에 있더라도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뿌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살아가는 데 더없는 힘이 되기도 하는 그 안심 도장이 마음을 든든하게 만든다. 풀리지 않던 매듭도 헐거워지는 것 같고 굳어 있던 근육도 말랑해진다. 아들이 참석 못해 썰렁할 수도 있는 오늘 같은 날, 딸 사위 모두 모여 오순도순할 수 있으니 자식을 많이 두셔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편 이런 형태의 가족 모임은 우리 세대까지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상실감을 안긴다. 끈끈한 정서적 유대가 이어지기엔 지나치리만큼 가족 구성원이 단출하다. 가정을 책임지는 것도, 자식을 낳는 것도 기피하는 현상이 가정 문화를 단절시킨다.

간단히 음복을 끝낸 후 사위들은 사위들끼리 안방에다, 딸들은 딸들끼리 거실에 자리를 펴고 둘러앉았다. 담소와 함께 일상의 이런저런 일을 나누기엔 심심풀이 고스톱만 한 것도 없다. 같은 시대를 사는 고민과 생각지도 못했던 해결 방법이 판 위에서 헤쳐졌다가 사라지고, 각자의 생업과 아이들 이야기가 진한 웃음으로 버무려지기도 한다. 연신 떠들면서도 손으로는 패를 쥐었다가 눈치껏 내려놓고 때로는 광을 팔기도 한다. 틈틈이 주전부리를 하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집안에 불땀 좋은 화로라도 들여놓은 것처럼 화기애애한 훈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한순간이었다. 저마다 눈을 비비고 한 곳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언제부터 저 자리에 있었던 걸까. 장식장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은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열여덟 개의 눈동자가 넋을 잃고 한참을 올려보았다. 아직은 눈이 쌓여 미끄러운 정월인데 고즈넉이 내려다보는 자태는 분명 나비였다. 검은색 정교한 테두리에 상앗빛 추상적 무늬를 데칼코마니로 펼치고 있는 호랑나비였다. 삼월도 아니건만 어떻게 날아왔으며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건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가신 지 오 년 만에 만나러 오신 걸까? ”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아직은 봄바람도 꽃향기도 없는 수묵의 계절, 아버지가 찾아든 꽃은 그리운 가족들이었을까. 묘한 감격보다 앞서는 반가움에 뭉클했다.

꿈에서라도 한 번 찾아 주시지 않으셨는데 감사한 마음이 컸다. 아버지도 우리가 잘들 지내고들 있는지 궁금하셨나 보다. 어쩌면 흐뭇해하셨을 듯도 하다. 그렇게 오래도록 우린 아버지와 교감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게 아닌 것처럼 생과 사의 경계는 숨결처럼 미미할 뿐이다. 서로 깃을 맞댄 새들처럼 오순도순 정다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참 다행스러웠다. 창밖은 온통 먹물에 잠긴 듯 검었지만 마음 언저리 등불을 달인 듯 환해졌다. 나비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렀던 겨울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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