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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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일이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명동으로 걸어오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머리가 쾅 울리며 발목이 잡혔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소리 나는 곳으로 머리를 돌리니‘대한음악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슴을 흔드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멀리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가 긴 회랑을 걸어 어둠에서 환한 곳으로 나오는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가는 레코드판 가운데에서 ‘베르디의 레퀴엠’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죽은 자를 위한 음악이라고 했다. 음악에 취해 있는 동안 살아있는 나의 마음은 한없이 맑아지고 있었다.
지금도 어디서 ‘레퀴엠’이 들려오면 마음을 온통 거기에 빼앗겨 버린다. 주검 앞에서나 들을 수 있던 음악이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교향곡이 되었다. 죽음은 바라보는 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이에겐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심판의 날이 되는가 하면, 어떤 이에겐 영원한 안식을 주는 축복의 날이 되기도 한다. 죽음은 절대적인 신의 영역이기에 가장 근원적인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진혼곡을 들으면서 자판기를 두드리는데 오래도록 잊고 있던 여학교 때의 일이 아슴프레 떠오른다. 4km 이내는 걸어 다닐 것을 강조하던 시절이라 충무로에서 명동을 거쳐 덕수궁 뒷길로 30여 분을 걸어 다녔다. 학교 본관 뒤쪽에 하얀색의 굵고 둥근 굴뚝이 하나 있었다. 방학을 맞아 운동장도 텅 비어있는 어느 여름날, 한 아이가 굴뚝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아득히 높은 꼭대기에서 투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그 일은 아직 덜 여문 우리들에게 삶의 의미를 물으며 죽음을 가까이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은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카시가 지고 양귀비가 흐드러지게 피던 여름날, 어머니는 병상에서 마지막 길을 걷고 계셨다. 권사님들의 찬송가가 들리더니 이내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낮게 깔리는 묵직한 소리를 배경으로 천사 같은 남녀 합창단의 맑은 소리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가시는 날까지 언성 한 번 높이지 않던 어머님이셨다. 언니와 함께 평소 즐겨 입던 연분홍 한복으로 갈아입혔더니 어머님의 얼굴은 붉은 듯 흰 배꽃처럼 화사하게 보였다. 조금만 더 계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울컥하는데 빠른 템포의 현과 트럼펫이 쾅쾅 가슴을 때린다.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관을 실은 마차가 잿빛 안개를 헤치며 지나갈 때 들리던‘눈물의 날’이 전율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듯했다. 이상하게도 이때 어머님의 눈에도 눈물방울이 맺혔다. 어쩌면 그 시간, 신께로 돌아가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 놓은 채 하늘 계단을 밟고 계시던 중이 아니었을까.
삶의 멍에를 내려놓고 그분과 마주 앉으신 어머님은 아직 귀로도 눈으로도 말하고 계셨다. 그러나 혼에 앞서 몸은 이미 닫히는 중이었다. 떨어지는 수액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더니 소변 줄에서도 진득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죽음 뒤에서 레퀴엠은 천상을 노래하고 미소를 띤 주님이 손을 내밀고 계신 듯했다. 애끓는 자식들의 소리에 힘겹게 눈꺼풀을 한번 들어 올리시더니 눈으로 마지막 답을 하신다. 마침내 지상에서의 이별까지 마친 어머님이 주님의 손을 잡으셨다. 천천히 떨어지던 링거가 마지막 방울을 떨구고 청각도 끈을 놓았다. 식구들은 홀로 떠나는 영혼을 그저 지켜볼 따름이었다. ‘주여,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레퀴엠이 낮게 깔리고 임종을 지켜보던 권사님들의 찬송가가 힘차게 불렸다.
종교가 일상과 가까웠던 중세 유럽에서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삶만큼 중요했다. 죽음은 신의 심판을 받는 날이자 축복의 날이었다.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레퀴엠은 가톨릭에서 위령미사에 쓰이는 입당 송으로 ‘주여, 저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로 시작하므로 그렇게 불렸다는데 라틴어로도 ‘안식’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차르트는 발제코 백작으로부터 진혼곡의 청탁을 받을 때 심부름꾼이 입고 온 검은 망토를 보고 죽을 때까지 저승사자의 이미지에 시달리며 작곡을 하다 쓰러졌다고 한다. 이렇듯 레퀴엠에는 죽음이 전제되었다.
사는 동안 죽음은 늘 삶 가까이에서 서성인다. 고단한 삶을 놓아버리고 싶게도 하지만 그것이 있기에 긴장하며 더 열심히 살게 된다. 죽음이라는 것 안에는 두려움과 진노, 공포뿐 아니라 환희, 안식, 평화 등 얼마나 많은 감정이 숨어있는가. 진혼곡은 죽은 자의 혼을 위로하고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만들어진 곡이다. 그래서인지 이 곡을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며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삶과 죽음은 같은 말이 아닐까.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남은 시간이라도 잘 살아서 심판의 날이 축복의 날이 되도록 하리라 다짐한다. 오늘같이 마음이 무겁거나 자박자박 비 오는 날이면 나는 곧잘 레퀴엠을 듣는다. 빠른 템포의 현과 트럼펫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기도 하고 천상으로 오르는 듯한 합창 소리가 마음을 맑고 편안하게 해준다. 나도 레퀴엠처럼 마음이 정화되고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