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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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필집을 출간한 작가의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녀는 2019년 3월부터 우리 수필 교실에 나온 최윤실 작가였다. 수필 공부를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신인상을 받고 4년여 만에 첫 수필집을 내었다. 그사이 남편을 떠나보내고 채 2년이 안 되었다.
그간 180여 편의 글을 썼다는데 그중 삼분지 일 정도만 선하여 책으로 엮었다. 작가들 대부분이 첫 수필집에서 가장 자기다운 서사를 구성한다. 인간은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이야기를 퍼 올리려는 경향이 있다. 성장기의 정체성을 형성한 유년의 기억은 곧 무의식의 시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증편 솥에 김이 오르면」은 남편의 고희를 준비하면서 유년시절에 있었던 할아버지의 회갑연을 회상한 글이다. 할아버지의 회갑연은 온 동네잔치가 되어서 일주일 동안 치러졌다.
한쪽에서는 증편을 빚어 안치고 있었다. 막걸리로 부풀린 하얀 쌀가루 반죽 위에 진홍색의 맨드라미 꽃잎과 까만 석이버섯을 채 썰어 꽃 모양으로 올리고 미나리 잎을 따다 줄기와 잎을 만들면 금방 나비가 날아들 것만 같았다. 증편 솥에 김이 오르면 멀리 있는 친척들이 오기 시작했다.
미술을 전공한 작가답게 묘사가 회화적이다. 할아버지의 회갑연은 할아버지 당자보다 회갑연을 준비하고 치러내는 온 집안사람들과 온 동네 사람들의 축제로 그려내고 있다. 거기에 아버지의 지극한 효심과 정성을 조망함으로써 가문의 격조를 보여준다. 작가는 시아버지의 회갑연을 열고자 했으나 당사자의 반대로 열지 못했는데 2년 후 갑자기 돌아가셔서 후회를 많이 했다.
남편의 고희를 맞았다. 남편은 망설였지만 그녀는 자식들이 멋지게 치르도록 도왔다. 남편도 남편이지만 훗날의 자식들을 위해서였다. 공교롭게 남편도 고희를 치르고 몇 년 지나 갑자기 영면에 들었다. 이번 출판기념회는 외국에서 생활하는 자식들이 들어와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녀는 기꺼이 따라주었다. 그 또한 자신보다는 훗날의 자식들을 위한 일종의 배려였다.
오늘의 여러 선택에는 유년의 기억이 상당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유년의 경험이 그녀의 삶에 평생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는 「과수원집 사람들」이 있다. 과수원이라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한 공간에서 가족 구성원은 각자 역량만큼의 일을 해야 했다.
우리 집은 방학이면 새벽부터 바빴다.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아이들까지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다. (…) 아버지는 과수원으로 갈 때 시냇물에 세수하게 한다. 시원한 냇물로 세수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언덕 위에 있는 과수원을 향하여 언덕을 오르면 솔밭에서 시원한 소나무 향기가 난다. (…) 과일 하나를 먹기 위하여 열 번 이상의 손이 가야 했다. 온 가족이 때맞추어 합심하여 일해야 하는 것이 과수 농사다. (…) 4대가 한집에서 사는 대가족이어서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우리는 저절로 예의범절을 익혔고 (…) 그 덕분에 우리는 살아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어린 시절의 노동은 가족과 자연과 교감하고, 생활의 리듬을 배우는 과정으로 작가의 무의식에 깊이 자리 잡아, 창작의 근원적인 영감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이에게 이러한 노동은 놀이이며 공부이다. 당연히 유년의 무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과수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자연경관과 가족들의 모습에 관한 서술은 단순하면서도 동화적인 서사를 품고있다.
「잃어버린 생일」은 시어머니 생신보다 하루 전날이 작가의 생일인 탓으로, 며느리인 자신은 어머니 생신 준비에만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녀는 생일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발적 헌납이었다. 며느리로서 해야 할 역할이 개인의 생일보다 우선한 것이다. 친정 집안의 전통적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익혀온 의무감이었다.
문제는 자신의 생일이 잊힌 채로 지나가는 상황이 단순히 날짜의 상실을 넘어,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가 가족 내에서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는 사회적 맥락을 원만하게 이해하는 세련되고 지혜로운 시어머니 역할을 한다. 작가는 세대 간의 갈등을 자신과 아들, 며느리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시대에 따라 변화한 것을 재미있게 풀어나간다. 아들이 며느리 생일을 잊어서 며느리가 화가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며느리에게 전화했다.
“생일 못 챙겨 준 우리 아들 용서해 줘라.”
“호호, 어머니 아셨어요? ”
“동네에 소문이 쫙 났어.”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아들이 아빠가 엄마 생일 챙겨 주는 것을 못 보아서 그런가 보다. 내가 잘못 가르쳤으니 내년부터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물처럼 바람처럼」은 남편과의 사별 후 이야기다.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홀로서기를 하며 새롭게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그려낸다.
지금까지 나를 잃어버리고 살아왔다. 내가 아닌 내가 살아온 것이다. 나는 없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딸 아니면 누구의 며느리. 엄마, 나를 표현하는 말은 셀 수가 없이 많았다. 수없이 많은 시간에 왜 나는 나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 남편이 떠나고, 자식들이 떠나고 내 등에 짊어진 짐들을 내려놓자, 이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수필집 『하늘을 품은 바다』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유년의 무의식이 평생을 이끌어가는 정서를 부어주듯, 독자들에게도 위안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 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