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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 가의 포플러는 아직도 서 있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갑순

시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2월 6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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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 한편에는 교장 선생님처럼 묵직한 느티나무가 서 있었고,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포플러나무들이 운동회 때 매스게임하듯 곧고 반듯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아이들은 그 나무들의 이름을 굳이 부르지 않았지만, 그늘이 만들어지는 시간과 바람이 스며드는 방향은 몸으로 먼저 알았다. 바람이 불면 포플러 잎들은 개구쟁이로 변했다. 아이들보다 먼저 움직이고, 아이들보다 먼저 웅성거렸다. 그 소리는 운동장이 텅 빈 오후에도 오래 남아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 웅성거림은 훗날 내가 글 속에서 듣게 될 수많은 목소리의 예행연습 같은 것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친구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교정은 금세 다른 얼굴이 되었다. 웃음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흙 냄새와 나무 냄새가 남았고, 발걸음 소리가 사라진 운동장은 괜히 넓어 보였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종종 운동장 가에 서서 포플러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풍경은 훗날 내가 일구게 될 글밭의 가장 오래된 자양분이 되었다. 사람의 기억은 늘 사소한 장면 하나를 붙잡고 오래 살아간다.
학교 본관에서 아이 걸음으로 삼 분쯤 떨어진 도서관은 아담했고 내 꿈의 산실이었다. 문이 닫혀 있어도 그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책장들이 나를 부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서관 담당 선생님이 계시지 않을 때면 나는 키를 한껏 늘려 책장 위쪽에 꽂힌 책들을 훔쳐 보듯 꺼내 들었다. ‘훔쳐 본다’라는 말이 어쩌면 정확했을 것이다. 그 책들은 내 것이 아니었고, 오래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이 끝나면 다시 제자리에 꽂아 두어야 했고, 책갈피 대신 기억 속에 문장을 접어 넣어야 했다. 단 한 권의 동화책이나 동시집도 내 소유가 아니던 시절, 그 도서관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공간이었다.
매창 백일장에 더 많은 학생을 입상시키기 위한 문예반 선생님의 특별 조치였을까. 방과 후 학교에서는 몇몇 아이들을 골라 글짓기 훈련을 시켰다. 그 시간은 훈련이라기보다 글 앞에 앉는 법을 배우는 첫 의식에 가까웠다.
초등학교 2학년 말, 통신표에 적힌 ‘노트 정리를 잘 하고 글짓기에 소질이 있는 어린이입니다’라는 한 줄은 가슴속에 시들지 않는 꽃씨로 남았다. 누군가의 짧은 문장은 한 아이의 삶을 오래 흔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4학년이 되자 그 씨는 마침내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주일 넘게 도서관에 모여 글짓기 훈련을 받은 끝에 부안 문화원에서 주최한 매창 백일장에 참가했다. 무더운 날이었다. 읍내 버스 승강장에서 내려 서림공원까지 걷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고, 종이와 연필을 쥔 손바닥에 땀이 배어들었다. 글을 잘 써야 한다는 긴장 때문인지 따가운 햇빛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심장은 유난히 빨리 뛰었다.
경사진 길을 오르다 하늘을 찌를 듯 빽빽한 소나무 숲길에서 매창 시비와 마주쳤다. 그 앞에 서자 숨이 잠시 고르게 돌아왔다. 얼마나 훌륭한 분이기에 이토록 큰 비를 남겼고, 그 이름으로 아이들의 글을 불러 모으는 걸까. 그 질문은 곧 나 자신에게로 향했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었을까. 왜 이 자리에 서 있을까.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던 꿈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입상해 전교생이 모인 아침 조회 시간, 단상에 올라 상을 받던 그 순간의 감동은 내가 ‘글을 쓰는 아이’로 자라게 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학창 시절 동안 나는 줄곧 글을 잘 쓰는 아이였다. 그러나 가정 형편 탓에 중학교 진학도 제때 하지 못해 후배들과 함께 학교에 다녀야 했고, 고등학교 역시 우여곡절 끝에 실업계로 진학했다. 중학교 시절 어깨를 나란히 했던 친구들은 도시의 인문계로 떠났고, 나는 가난하거나 실력이 조금 부족한 아이들이 모인 학교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그 시절, 비교는 늘 나를 주저앉히려 했지만 글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화려한 날갯짓을 하는 친구들 앞에서 기가 꺾일 것 같을 때마다 혼자 시를 쓰고, 어쭙잖은 소설도 끼적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나는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자신감으로 충만해지곤 했다. 글은 나에게 유일한 자존의 증거였다.
아이들을 기르던 어느 날, 텔레비전 자막으로 스쳐 지나간 ‘전라북도 여성 백일장’ 안내는 잊고 살던 글에 대한 미련을 단번에 깨웠다. 삶의 한복판에서 문학은 늘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왔다. 시골에서 전주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지만, 시내버스와 직행버스를 갈아타며 대회장으로 향했다. 졸업 후 처음으로 쓴 글이 입상했고, 그날 이후 내 안의 문학은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었다. 다시 글을 써도 될까. 내가 잘 쓸 수 있을까.
입상자들로 이루어진 ‘글벗’ 동아리에 초대받았지만, 쟁쟁한 문인들 속에 섞여 있는 일은 경제적으로도, 실력 면에서도 큰 부담이었다. 나는 아직 햇병아리였기에 스스로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돌아서면서 마음 한편이 쓰렸지만, 그 선택은 겸손이면서 두려움이었다. 문학은 언제나 나보다 한 발 앞에 서 있었다.
그 후 비둘기 문학 동인을 만나 김기찬 시인님을 중심으로 시와 수필을 공부하던 중, 선생님의 허락도 없이 『자유문학』에 시 열 편을 보냈다. 그리고 덜컥, 등단 소식을 접했다. 준비되지 않은 등단은 내게 훈장이 아니라 올가미였다. 이름을 얻었지만, 그 이름을 감당할 문장은 아직 없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해야 했다. 원고 청탁은 부담이 되었고, 등단 이전보다 글쓰기는 더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글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주변 선생님들의 말 없는 격려 덕분이었다. 그들은 결과를 묻지 않았고, 대신 시간을 견디는 법을 보여 주었다.
등단이 가져다준 첫 선물은 문화원 취업이었다. 문화원에서 일하며 글은 내 몸을 지탱하는 뼈대가 되었다. 전국의 문인들이 오가는 자리에서 나는 문단의 질서를 배웠고 부족했던 문학적 기반을 차근차근 다질 수 있었다.
이후 출판사로 자리를 옮겨 11년 동안 교정 교열을 맡으며 수많은 책의 첫 번째 독자가 되었다. 타인의 문장을 다듬는 일은 나 자신의 문장을 돌아보게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2005년 수필로 다시 등단했다. 두 번째 이름은 조금 더 무거웠고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더 좋은 글을 향한 갈증 속에서 故 김형진 수필가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자신의 거처를 내주며 재능 기부로 우리를 지도해 주셨다. 문인답지 못한 태도를 용납하지 않으셨고, 오직 글과 삶의 태도를 가르치셨다. 문장은 삶을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그분의 가르침이었다. 2019년 개인 재산을 털어 순수필문학상을 제정하셨고, 올해 1월 황망히 세상을 떠나셨다. 그 뜻은 따님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떠난 뒤에야 스승의 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실감하고 있다.
2016년 광명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 나는 다시 시 공부를 시작했다. 여전히 시는 두렵다. 한 편을 쓰고 나면 마치 처음 시를 쓰는 사람처럼 다시 바닥에 선다. 그러나 두려움은 아직 내가 시 앞에 서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2021년 제10회 월간 문학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그 상은 완성이 아니라 여전히 쓰고 있으라는 격려처럼 느껴졌다.
1998년 시로, 2005년 수필로, 2019년 동시집 발간으로 나는 세 갈래 길 위에 서 있다. 어느 하나도 쉽지 않았고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었다. 등단 이야기를 정리하는 이 순간, 내 문단 인생에 따스한 햇볕이 되어 주고 포근한 바람이 되어 준 수많은 선생님이 유난히 그리워진다. 운동장 가에 서 있던 포플러처럼 그분들은 지금도 말없이 내 글의 가장 자리를 지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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