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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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돗가의 찰방거리는 물소리. 생명의 구원을 알리는 이른 아침의 작은 신호가 울린다. 담장을 둘러싼 짙푸른 잎새들은 샛눈을 뜨고 지그시 아래를 내려다본다. 저것은 신의 한 수. 고요한 그늘에 다리 없는 오작교를 세우는 일이다. 꽃과 나무들은 모두 깨어나 경건한 목례를 건넨다. 새날의 서사는 그렇게 시작된다.
눈을 뜨는 새벽이면 그는 먼저 정원에 나가 한 바퀴 휘휘 둘러본다. 뒤란의 나무들까지 살피고 밤새 안녕을 묻는다. 골목을 돌며 화분마다 물세례가 이어진다. 그런 다음 각별히 친애하는 저 커다란 물그릇을 씻는다. 질박한 오지그릇이 멱을 감는 셈이다. 고향을 건너와 한 해를 묵힌 처마 끝 수세미가 물때를 훑어 내린다. 깊고 평평한 바닥을 지나 불룩한 허리께를 노닌다. 뒤엉킨 물이끼들이 일제히 그 안에서 춤을 춘다. 찬물에 시원스레 몸을 헹구면 맑은 물이 찰찰 담긴다. 이런 순서를 거쳐 정원석 위로 고이 모셔진다. 그리도 소중하게.
서늘한 아침의 한유가 펼쳐지는 중이다. 정갈함이 묻어나는 미세한 움직임들이 허공을 지나 귀청으로 흘러든다. 굳이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이 모든 동작들이 한꺼번에 읽히고 있다. 잠깐 사이 조막만한 새 한마리 가지를 출렁이며 날아와 앉는다. 그의 얼굴 위로 조용한 수막새 웃음이 번진다. 멀찌감치 텃밭 곁에 뚝 떨어져선 그 자그마한 새가 커다란 자배기 가장자리에 내려앉길 고대한다. 척박한 도시의 새들을 위한 특별한 초대다. 물 한 모금 콕 찍어 목을 축이고 제 갈 길 온전히 지나기를 기원하는 의식. 이것이 그가 아침을 맞이하는 사소한 방식이다.
아마도 저이의 전생은 먹빛 찬란한 우주의 어느 강어귀쯤에서 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하루를 열면 안개 자욱한 강가를 지났을 테다. 쪽배를 풀어 몸을 싣고 삿대를 밀면서 먼 바다를 향해 가는 새들의 길잡이 수호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울안에 날아드는 작은 새들을 위해 저만한 수고를 하겠는가. 무엇에나 정성껏 마음담기로 세상의 벌판을 거쳐 온 사람답다.
기억을 재생시켜 본다.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장예모 감독의 영화들은 예술적 감각이 탁월하다. 뛰어난 영상미에 반해 그간의 작품들에 눈길을 두어 온 것이 하고많은 시간이다. 그 중에서도 1999년 작 <집으로 가는 길>은 4번이나 보았던 작품이다. 짱쯔이의 맑고 순수한 첫사랑의 여운이 컬러에서 흑백의 무게로 남아 있다.
도시에 사는 ‘유셍’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인 산골마을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불편한 전통방식으로 장례를 치를 것을 고집한다. 그는 고민을 거듭하다 부모님의 아름다웠던 옛 시절을 회상한다. 열여덟 살이었던 어머니 ‘쟈오 디’는 마을 학교로 부임해온 젊은 선생님 ‘ 창 위 ’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녀보다 두 살 위다. 마을을 오가는 둘 사이로 펼쳐지는 배경은 모두가 각각의 수채화다. 우여곡절 끝에 가난한 쟈오 디와 결혼한 창위는 이곳에 정착해 40년 동안 교사로 근무한
다. 그동안 너무 낡아버린 학교를 새로 짓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자금을 모으러 다닌다. 그러던 중 안타깝게도 마을과 떨어진 병원에서 심장병으로 죽고 만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전통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젊은 시절 남편과 오가던 산골마을의 그 길을 마지막으로 꼭 함께 걸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유셍은 결국 어머니의 주장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눈보라가 치는 날 아버지의 옛 제자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운구를 서로 교대하면서 병원에서부터 산골마을까지 멀고 먼 길을 걸어서 돌아온다. 어머니를 앞세운 이 엄숙한 장례식 과정들은 눈발 흩날리는 화면이 모두 흑백으로 처리되어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의 명장면들을 떠올린다. 그녀는 왜 사라진 전통방식을 그렇게 고집하는 것일까 곰곰 생각한다. 자신의 탯줄이 뻗어 나온 생의 길목에서 평생의 동반자와 수놓았을 갖가지 희로애락의 순간들. 스냅 사진처럼 남아 뚜렷이 떠오르는 어느 날의 일들을 반추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흘러간 시간에 발목을 적시고 어룽지는 마음을 들여다보면 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전 생애가 걸어오고 있는 동안 미처 읽히지 못한 서로의 가슴속 문장들로 미어지겠거니 싶다. 무늬로 남은 세월의 흔적들을 헤적일 때 과거는 기억에 의해 소환되고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
그들이 엮어 왔을 소박한 인생의 변곡점들을 상상한다. 그녀는 자기 생을 누비고간 한 사람의 긴긴 자취들을 걸음걸음 땅 위에 새겨두고 싶었나 보다. 지나온 삶의 문들을 하나 둘 여닫으며 뒤적이는 동안 힘겨운 고비를 넘기던 어느 순간들이 속 깊게 떠오르지 않겠는가. 추억이란 이름으로 되살아나는 옛일들은 심중에 애잔함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때로 슬픔을 동반한 채로 말이다. 그건 삶이 품고 있는 한 가닥 비의(悲意)다.
지난밤 촉을 세운 불면의 글귀들이 지면 위에서 펄럭인다. 골똘한 표정의 나는 창 너머 그가 지닌 심장의 지문을 읽는다.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고 노래한 시인이 있다. 비유컨대 ‘목젖을 적시는 그 사이를 한 고비라 부르자’가 그가 지닌 생명에 대한 경외가 아닐는지. 누군가의 깊이를 재는 일이 아직도 이토록 서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신선한 아침의 걸음걸이가 단풍나무 그늘을 지나 초록빛 담쟁이 넝쿨 위로 건너간다. 남편은 오늘도 그와 새 한마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오작교를 세우느라 열심이다. 혹여 콩새 한마리 목을 축이러 날아들까 기원하는 모양새다. 물빛 위로 푸른 하늘이 내려앉은 자배기 옆을 그가 슬며시 지난다. 새벽기운 사라진 부드러운 빛 속을 걸어간다. 먼 훗날 문득 떠오를지도 모르는 저 고운 풍경 하나. 그 모습 놓칠 새라 시야 가득 담아 둔다. 그와 나 사이에 오고 간 날들이 오랜 세월 뒤 잊혀 지지 않을 한 장의 인화(人畵)로 남겨두기 위하여.
*문태준,「한 호흡」중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