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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펭귄과 당닭들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한영탁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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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던 펭귄과 당닭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사라져버렸다.

아파트를 옮겨 이사를 하다가, 오래 내 손때가 묻은 펭귄 클래식(Penguin Classic)과 밴텀 북(Bantam book) 등 3백여 권의 문고판 영문서적이 몽땅 사라져버린 것이다. 펭귄 클래식 책은 까만 날개와 하얀 배, 그리고 샛노란 발이 앙증맞은 팽귄을 상징으로 삼고 있다. 밴텀 북은 붉은 벼슬과 긴 꼬리를 가진 당닭이 상징이 되어 있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책장의 서적을 내려 많은 종이 상자들에다 차곡차곡 담아두었다. 버리고 갈 책은 따로 모아 놓고, 이삿날은 급한 볼일이 있어서 일찍 출타했다. 저녁 늦게 이사한 아파트 서재로 가서 책을 꺼내 책장에 채웠다. 그때 영문 문고본이 든 상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사센터가 빠뜨렸을까 해서 이튿날 아침 전에 살던 아파트로 달려갔다. 새로 리모델링 작업 중인 방에 들어가 살펴봐도 포켓북 상자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인부들도 본 적이 없단다. 책은 종적이 묘연했다. 아마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버리는 책으로 잘못 알고 처리한 것 같았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제 노안이 점점 심해져서 깨알 같은 글씨가 박힌 문고본은 읽기도 힘이 든다. 하지만 내 젊은 날의 영혼을 가꾸어준 책들이 사라진 건 왠지 나를 슬프게 한다. 온갖 추억을 같이한 정든 벗을 떠나보낸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펭귄 클래식은 1938년 영국에서 첫선을 보였다. 두꺼운 표지로 나오는 장서용 장정본을 누구나 헐값으로 구입할 수 있게 만든 포켓용 보급판이었다. 책값이 한 권에 그때 돈으로 담배 한 갑 값에 불과했다.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도 구입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펜귄 북은 영어 사용 국가들에서 젊은 학생들이나 대중 사이에 인기가 높아 한때 하루 평균 3만 권씩이나 팔렸다. 곧 ‘당닭 책(밴텀 북) ‘캥거루 북’‘ 포켓 베스트셀러’ 등의 비슷한 다른 포켓 문고판 서적이 영미 출판가에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 헌책방들에서도 이런 값싼 영문 포켓북들을 흔히 찾을 수 있었다. 중고 포켓 영문 서적이 흘러나오는 창구는 한국전 당시 한때 30만 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주한 미군 기지들. 미군 장병들이 읽은 뒤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책들이 무더기로 시중에 흘러나왔다.

나는 독서에 목말라 있던 대학 시절부터 기자가 된 후에도 곧잘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순회하며 포켓북을 찾곤 했다. 그런 나의 책사냥 행각은 청계천 일대에 머물지 않았다. 미8군사령부가 있는 용산은 말할 것 없고 가끔 멀리 문산, 파주, 의정부, 동두천, 수원, 오산, 평택 등지의 미군기지 주변 헌책방이나 길거리 고물상점들까지 훑기도 했다. 지아이(GI;미군 장병)들이 버린 책 가운데는 서부 개척시대를 그린 서부소설과 캐나다에서 나오는 ‘할리퀸 북’ 등의 통속 로망스 소설이 주종을 이루

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1973년 징병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대학 재학 중 의무병으로 군에 징집된 병사들이 많아서 펭귄 클래식과 밴텀 북 등의 명작 소설과 당대의 수준 높은 인문, 사회학 베스트셀러의 문고본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서울 양서점(洋書店)에서 구할 수 없거나 값이 비싸서 살 수 없던 양서(洋書)의 포켓판을 발견하면 쾌재를 부르며 얼른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경로를 통해서 세계의 클래식 문학 작품과 국제적 저명인사들의 자서전이나 전기와 역사, 국제관계, 시사문제의 논픽션 신간을 읽고 교양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그 이름난 처칠의 회고록도 그런 경로로 읽었다. 7, 80년대까지도 금서로 돼 있던 러시아, 중국 같은 공산권 인사들의 회고록, 전기, 저작물 등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모택동과 중국 역대 최고의 재상으로 꼽히는 주은래, 홍군 최고사령관 주덕의 일대기도 읽을 수 있었고 장정(長征)에 관한 다큐멘터리들도 읽었다. 이런 독서는 나로 하여금 냉전시대의 외눈박이를 면한 독서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소련 저항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밀반출한 초기 단편과 주옥같은 산문시가 실린 회기 작품집도 발견하여 직접 번역 출판할 수 있었다. 영문으로 번역된 중국 노신(魯迅)의 소설과 희곡,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을 미국인 사이덴스티커(Sidenstieker)가 유려한 영문으로 옮긴 역서, 일본 국수주의자로 자위대 병영에서 할복자살한 유미주의(唯美主義)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영문 번역소설 「금각사(金閣寺)」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나의 젊은 시절 보물찾기 같은 즐거움을 안겨주고, 정서적, 지적 영혼을 가꾸어주며 나를 키워주던 영문 헌책들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주한 미군이 감축되어 3만 명 규모로 줄어들자 그토록 많이 쏟아져 나오던 포켓북이 줄게 된 것이 하나의 직접적 원인일 것이다. 미국의 징병제가 폐지되고 지원군제가 도입되자 대학 재학생 입대자들이 줄어 시중에 흘러나오는 수준 높은 책도 점점 드물게 되었다.

게다가 디지털 시대가 된 요즘은 인터넷으로 아마존에 주문하면 싼값으로 바로 전자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청계천 고서점가에서 영문판 헌책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이제 시중의 영문판 중고서적은 주로 패션 잡지, 사진, 영화, 인테리어 전문지 따위만 보일 뿐이다. 예전 나와 같이 헌책방 순례를 하던 친구들도 지금은 온라인으로 전자책을 읽고 있다. 그들은 전자책이 온라인으로 글씨의 크기도 자유자재로 키울 수 있어서 침침한 노안에 읽기가 더 좋다고들 한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있다.

하지만 젊은 날 내 삶에 행복과 지혜를 안겨주었던 손때 묻은 펭귄과 당닭, 캥거루 문고본들의 망실은 아날로그 사람인 나에게 젊은 날의 아련한 추억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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