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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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시에서 기차를 탔다. 나는 오후 2시쯤 S대역에서 내려 20미터쯤 걸었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도를 건넜다. 봄꽃이 만발한 유치원이 보이고 코너를 막 돌아서 영지가 설명해 준 대로 어느 초밥집 앞으로 몇 걸음을 더 걸었다. 깔끔한 4층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긴장한 탓일까 미세한 두통이 일어났다. 건물 입구에서 비밀번호를 누르자 ‘문이 열렸습니다’ 하는 기계음 소리가 들렸다. 슬며시 문을 열고 1층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을 지나 3층 302호 앞에서 비밀번호와 별표를 누르자 드디어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영지는 회색 캐리어를 받아 들고 거실 쪽으로 향한다.
“다행히 잘 찾아왔네. 엄마! 씻고 쉬어. 난 점심 준비할게.”
단번에 찾아온 영지의 투룸이 아파트 구조랑 비슷해서 일단 안심이 되었다.
“마중은 일부러 안 나갔어. 엄마도 늘 약간의 긴장이 필요하잖아. 모두 엄마를 위해서야. 밀린 청소도 핑계 중 하나이긴 하지만 말이야.”
숨을 잠시 고른 후 영지는 말을 이었다.
“괜찮지?”
“그래, 마중 안 나오길 잘했다. 너의 지론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학습 효과를 보기 위해 일부러 안 나왔을 것이고 지난번에 두 번째 방문 땐 꼭 혼자 와 보라고 못 박은 사람도 바로 너니까. 쓸데없는 기대는 안 하기로 했다.”
퇴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노골적으로 노인 취급을 하는 영지는 그래서인지 이런저런 이유를 앞세웠다.
‘일단 엄마의 기억력을 위해서이고 엄마의 건강 체크가 우선이라나, 딸의 케어 차원이니 고마워해야 한다고까지 했던가.’
부지런하지 않은 영지가 간단한 점심을 차려냈다.
“제법 맛이 깊어졌네. 된장국도 계란말이도.”
간이 식탁 앞에 앉아 식사를 하던 내가 칭찬을 곁들였다.
“그동안 별일 없었지?”
딸에게 늦은 안부를 물었다.
“별일이 없어서 탈이지 뭐.”
영지는 엄마의 의도를 다 안다는 투로 미간을 들었다 놓는다.
“엄마, 기차 타고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영민 방에서 좀 누워.”
나는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는 딸의 말을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응. 사실 기차 탄 시간은 1시간 30분이었지만 말이다. 사실은 꼼짝없이 웅크리고 왔으니까.”
“맞아, 엄마도 이젠 적은 나이 아니잖어.”
영지는 기분이 나아졌는지 금세 풀을 죽인다. 사실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들과는 사뭇 그림이 달랐다. 서로에게 무심해지려는 듯 나도 아들이 살았던 방으로 들어간다. 영지도 잠시 후 자신만의 방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깬 나는 거실로 나왔다. 버릇처럼 FM 클래식의 버튼을 누르자 활기찬 진행자의 목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챙겨 온 스케치북과 4B 연필을 꺼내 놓는다. 손목의 힘을 잠시 풀어 볼 생각이었다. 찻물을 얹어 놓은 채 인덕션의 기계음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불이 점점 커진다. 마치 불꽃이 서서히 피어나는 느낌을 주었다. 맨드라미꽃이 인덕션 위에서 활짝 핀 것 같은. 숫자 8 정도로 불의 크기를 맞추었다. 나는 간이 책상에 앉아 한 번도 지우개를 쓰지 않고 정확하게 사물을 그려 내려 맘을 먹는다. 오늘 하루도 탈 없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으로. 굵은 연필이 동심을 소환해 준다. 창밖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의 고요가 전해져 평화롭고 편안해진다. 물기 머금은 도로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먼지 씻겨진 멀끔해진 나무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비가 내려도 안개가 끼어도 모두 한 얼굴처럼 기분 좋은 날 주전자가 삐익 소리를 내며 신호를 보냈다. 따끈한 물 한 잔에 체온이 1도가 올라간다 하였던가! 어젯밤 잠자리가 바뀌어 잠을 설쳤던 기억에 다소 긴장이 되기도 하였던 것. 아침에 마시는 물 한 컵이 마른 몸을 적셔 주는 듯 따뜻해진다.
사실 영지의 문자메시지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일상의 연속 그 자체였으니까. 처음 3개월간은 아르바이트 자릴 구하지 못했고 매해 치르는 언론고시에 응시하겠다는 계획도 들려주었다. 가끔은 엉뚱한 메시지로 별난 상상이 다 떠올랐다. 날마다 숨 쉰다고 사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끝내 영지의 목소릴 듣고 난 후에야 전화를 끊곤 하였다. 주말부부로 살았던 30년 동안은 그런대로 지냈는데 남편이 퇴직을 하자 한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잦은 갈등이 생겨났다. 영지는 이런저런 속사정을 본의 아니게 듣게 되어 불편했던 모양이다. 취직도 늦어진 마당에 우울함마저 늘었고 아버지의 기대보다 별말 없는 엄마가 더 조심스럽다는 영지였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눈에 띄게 체중이 불어나기 시작한 영지를 위해 피트니스 클럽을 추천했었다. 운동을 오고 가며 밖의 세상을 접해 보라는 의도였다.
나는 늘 자정이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기를 원했지만 영지는 새벽녘에야 자리에 누웠다.
“입맛이 없겠지만 밥은 챙겨 먹고 다녀야지.”
영지를 위해 1시간 30분 동안 기차를 타고 올라왔다. 그런 나를 만나면 푸근한 마음보다 지금 상황에선 아무튼 숨고 싶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늦은 결혼으로 나이 차가 많은 딸아이였다. 영지의 취직 문제 또한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운이 다하지 않아서라며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래서였을까. 영지가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를 더했으면 바라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영지의 마음은 굳이 대학원 공부보다 좋은 일자리를 선호했다. 나는 좀 더 폭넓은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을 거라고 권했다. 옛 생각에 빠져 있을 즈음 아까부터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엄마, 잘 잔 거지?”
“그래. 불면증이 놀라 달아난 듯 달게 잤어.”
영지의 방은 주택을 헐고 4층 건물을 올린 지 2년째 된 투룸이었다. 차라리 새집에 살게 된 행운 말고 지원을 한 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오면 기분이 한층 나을 것 같았다. 처음엔 사실 영지를 마주하기에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지하철역을 떠올렸다. 영지랑 둘이서 역 앞 D가게를 찾았다. 갖가지 물건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좋아하는 컵 한 개를 고를 때도 선택을 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무언가 생략된 듯한 동물 그림을 골랐다. 크림색 바탕에 판다가 그려진 컵을 골랐다. 집 안에서 필요한 여러 개의 생활용품도 구입했다. 마침 집이 근거리에 있어서 산 물건들을 들여 놓고 다시 나왔다. 영지는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쏜살같이 나타났다. 영지의 캐주얼 차림새가 나는 썩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애써 웃고 있었다.
“그쪽으로 쭉 걸으면 S대가 나와.”
영지의 목소리가 톤이 높아졌다. 머릿속을 더듬어 보자 영지가 마중을 나왔던 장소였다. 대학을 다닐 즈음 후문 쪽에 자리 잡은 카페들의 기억이 새로웠었다. 꽃 화분이 주차 금지 겸용으로 경계를 돕고 있는 중이다. 뭐든 미리 준비 잘하는 어른들 때문에 대상에 대한 열망이 옅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핫도그 하나 살까? 엄마가 더 좋아하잖아.”
영지는 망설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천천히 가게 앞으로 다가갔다. 40대 초쯤으로 보이는 주인이 영지의 주문을 꼼꼼하게 받아 적었다. 감자튀김이 박힌 핫도그 1개와 치즈 핫도그 1개를 주문, 5분 정도를 기다린 후 잘 포장된 핫도그를 들고 학교 앞에 도착했다. 고객의 취향을 만족시켜 주려 애쓰는 주인 입장에서 보면 직접적인 대면 상대라는 게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학교 울타리 안쪽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하늘은 청명하고 산책하기 좋은 날, 몇몇 학생들이 어울려 축구를 하고 있었다.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동아리 활동을 하는 모습이 발랄하다. 신발 때문인지 영지가 갑자기 다리가 아프다며 볼멘소리를 하였다.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 벤치가 보였다. 문득 걷고 또 걸었다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나 또한 발바닥이 후끈거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오래된 고목을 쳐다보았다.
“엄마, 시장하지 않아? 자, 일단 핫도그 하나 먹고 점심은 따로 먹든지….”
영지가 핫도그 봉지를 열었다. 자꾸만 살이 오른 걸 감지했는지 “이거 반, 엄마가 더 먹어야겠는데…” 해서 나는 빙그레 웃었다. 언제나 영지는 그렇게 환히 웃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결에 커피 향이 코끝에 와 닿았다.
“어? 근방에 커피점이 있었구나.”
내가 반색을 하자 영지가 잠깐 기다리라며 그쪽으로 향했다.
“엄마, 카페라떼 마실 거지?”
영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래, 난 그게 나아.”
영지도 오래전에 함께 마셨던 커피점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세상에나, 아카시아꽃이 벌써 피었네.”
커피 향기에 눌렸던 탓일까. 아카시아 향기가 엷게 코끝에 닿았다. 그때 영지가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가까워서 좋았다는 말을 앞세우며.
“영지야, 이 꽃 향기 좀 맡아 봐. 유쾌한 향수 같다.”
나는 녹색 트렌치코트의 단추를 열며 말했다. 그때 성큼성큼 한 남학생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학생은 분명 두 사람 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주고받는 나와 영지는 순간, 의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남학생은 철봉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저돌적인 발걸음이기도 하여서 그만 긴장까지 하였던 터. 그러더니 철봉에 두 팔을 걸고서 턱걸이를 딱 1번 한 후 유유히 반대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하! 항상 이 시간에 철봉을 하는 남학생인가 봐. 공교롭게 우리가 여기 있었던 거고. 잠시 후에야 의문이 풀려 둘은 싱겁게 웃었다. 그런데 좀 특이한 남자다. 핫도그랑 커피를 마시는 우리를 보았을 텐데. 대개는 그냥 돌아가지 않나. 아니면 조금 있다 턱걸이를 하든가 급하게 돌아가는 남학생을 보고 영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일어서서 자릴 피해 주는 게 맞았던 건가! 그런 거야?”
남학생이 한 행동은 딱 하나? 턱걸이하려고 두 팔을 걸고 두 번도 아닌 한 번의 턱걸이를 시도한 후에 그냥 아무 일도 아니라며 돌아섰다. “여기가 자기 학교라는 시위 같기도 하고.”
“사실 먹다가 일어서서 자릴 피해 주는 것도 좀 그랬어.”
“너도 그때 이과… 갔더라면….”
영지의 눈이 커졌다.
“아니, 우리가 더 복잡한 상황이었는데 그 남자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었잖아. 그리고 엄마 아빠가 문과인데 무슨 이과?”
영지가 어색한지 목소리 톤이 올라가 있었다. 내재됐던 신경전이 보기 좋게 터지고 말았다.
“다른 뜻이 아니고 여기 학생이라 정답게 느껴진 때문이야.”
엄마가 말을 돌리고 있다는 걸 이미 눈치채버린 영지였다.
“그런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어울린 상황이냐고? 차라리 청바지 차림을 좋아하는 엄마가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 더 어울릴 거야.”
나란히 앉아 있어도 딸의 모습이 왠지 낯설어 보였다. 차 한 잔 기분 좋게 마시자 생각하고 나왔는데….
‘왜 있잖아, 어느 봄날 대학 캠퍼스 안에서 딸과 함께 커피 한잔 편안하게 마시고 싶었다’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영지는 애써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듯 보였다.
“그래! 과거를 돌아보면 뭘 해. 현실을 생각해야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늘게 한숨을 삼키며 영지의 손을 토닥거렸다.
“이 학교가 정말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구나. 엄마는 몰랐네. 그만큼 훌륭한 인재 양성에 기반을 다진 거고 학문 탐구는 물론이거니와 사회에 나간 인재들이 많고 나라에 대한 봉사도 아마도 빛이 나는 인재 발굴로도 결코 뒤지지 않은….”
영지가 피식 웃었다.
“엄마, 제발 그만! 학교 이름부터가 남다르잖아.”
나는 내심 영지의 진심 어린 눈빛을 읽었다. 서울에서부터 유망주로 여기던 딸아이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언제였나 싶었다.
영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이 늦어지면서 지쳐 가기 시작했던 것, 일상은 어느덧 야행성으로 뒤바뀌고 조용하다 못해 말수도 줄었던 기억이 벌써 몇 년째 계속된 것인가! 그런 시간들이 지난하게 흘렀더란 말인가! 가끔 울다가 문자를 보내와 나를 놀라게 했었던 적도 있었으니까. 이런 영지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동안 많이 수척해졌고 윤기도 잃은 표정이었다. 메마르고 건조해 보이는 영지를 향해 물었다.
“엄마가 어깨 내줄 테니 잠시 기대 봐. 잠을 통 못 잔 거야? 엄마 온다고 청소하느라 그런 거냐고?”
“감사가 떴으니 당연하지.”
영지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남자친구는 아직도 못 만들고?”
“또 그 소리다.”
몇 초간 기댔던 머릴 바로 세우며 영지가 반박한다.
“엄마, 어디 결혼이 그렇게 쉬워? 취직보다 내겐 더 어려운 문제라고. 아직 직업을 구하지 못했는데 뭘 바라는 거야. 엄마는 딸이라 관대한 거고.”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말했다.
“조건에 조건이라고.”
“영지야! 알았으니 감정 대화는 그만두자.”
나는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영지도 물론 그러려고 한 건 아닐 것이다.
“햇살도 좋은데 화제가 별로야.”
“그런가! 그러면 다른 주제로 바꾸지 뭐.”
“우리 점심은 뭘 먹어?”
“저기 보이는 샌드위치 어때?”
영지는 그때서야 나의 손을 잡는다. 싱그러운 봄 햇살은 중천에 있고 두 사람의 걸음이 조금은 경쾌해졌다.
“첫날의 즐거운 산책이다.”
그 말에 영지의 얼굴이 환해졌다.
“라일락이 피는 계절이었을 거야. 엘리엇의 시가 꼭 아니어도 프라하의 봄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져. 함께 체코에 가기로 했었으니까. 엄마랑 내가 그곳에서 프라하의 봄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물론 아빠 땜에 다 망친 셈이지만. 갑자기 아빠가 하필 동유럽여행을 들고 나온 거냐고 체코만 빼는 동유럽여행은 없어서 그런 거지?”
“그래, 아빠랑만 갔다 와서 미안해 딸.”
딸의 입장에서 보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된 건지도 모른다. 사실은 같이 가자고 해도 셋이서는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라며 거절했던 딸이었다. 슬그머니 부부여행으로 그치고만 그해 봄. 그래서 딸의 여행 욕구를 불만족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샌드위치 카페를 찾아 나선 영지의 표정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엄마 마음은 알지.”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자 영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샌드위치를 취향대로 고를 수 있는 매장에 도착했다.
여직원이 재빠르게 영지의 주문을 받았다. 나이든 쪽이 엄마라는 걸 눈치 챈 듯 여직원은 친절하게 웃고 있었다. ‘다이어트 샌드위치도 따로 있나 보구나. 요즘 사람들은 참 편해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우가 들어간 샌드위치도 있고 토마토를 좋아하지 않아 어쩌면 토마토 샐러드는 영지에겐 선택을 못 받겠구나 싶었다. 녹색 글씨에 노란색 글씨가 보기에도 선명했다. 상쾌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물랜드 주스는 향긋했다. 식사 한 끼가 입 안 가득 봄을 느끼게 해주었다. 자유롭고 섬세한 산책을 나선 것이네. 생각보다 알찬 캠퍼스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유구한 역사뿐 아니라 의대와 약대까지 겸비하여 지루한 줄 모른 셈. 약 1시간이 넘었을 즈음 현대적인 건물 한 동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새의 날개를 여러 층으로 포개어 놓은 듯 보이기도 하고 아무튼 투명한 유리를 전체 건물에 활용한 개성 있는 건물이었다.
“새로운 세계를 맘껏 꿈꾸게 하는 데 손색없을 것 같은 건물이구나.”
“늘 꿈보다 해몽이 더 좋아 엄마는….”
영지는 샌드위치를 평소부터 좋아하였다. 언뜻 만족한 식사인 듯해 다행스러웠다.
“풀밭 위의 식사는 아니었다만….”
“나도 비슷하게 느껴졌어.”
“노란색 민들레꽃을 녹색 풀잎으로 여기면 아마도.”
“선명하고 유쾌한 빛깔 아니었니?”
“그래, 엄마.”
둘은 정답게 마주앉았다.
영지는 거기 ‘오랜만에 풀밭에 앉아 먹었더니 참 꿀맛이더라’는 표현으로 한술을 더 뜨고 있었다. 마치 숲속 예쁜 캠퍼스가 두 사람을 초대한 봄날의 소풍 같았다.
오랜 역사를 폴폴 풍겨오는 63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는 학교가 신기하기만 하였다. 인근에 사는 이웃들이 큰 혜택을 받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낮인데도 열심히 슛 바구니에 공을 집어넣고 있었다. 남학생들의 강단 있는 스트레스 해소법을 지켜 가고 있었다. 운동하는 사람들의 꿀맛 같은 스포츠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벤치엔 가끔 쉬는 커플들이 앉아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고 예전엔 용기가 나지 않아 눈에 띄지 않은 곳만 찾아다녔던 옛 기억을 곱씹어본다. 그때는 캠퍼스 커플도 보기 드물었고 설령 두 사람이 사귄다 하더라도 학생들 간엔 비밀이었던. 나는 물끄러미 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또렷한 콧날과 동글한 얼굴형에 사랑스런 눈을 가진 딸의 모습이 참 젊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남자친구가 없으니 공부하느라 취직 공부에 시달린 일상생활도 헬스에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영지의 얘기. 자격증에 갖가지 시험이 기다리고 있어 남자친구가 생겨도 아마 귀찮아 못 만났을 거라고 허세를 부리는 딸의 말. 그래 나이만 먹은 거지. 놓쳐버린 황금기의 시간을 이제 와서 무슨 수로 돌이켜 세우겠는가! 올해만 내년까지만, 한 해만 더 준비하고는 말이 소용없을 때 마음이 오히려 더 고요해진다면 좋으련만. 자신이 좋아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게 하고 집중할 만한 일이 있다면 조금 더 나아질 텐데 말이다.
1호선 그 학교 역에서 2∼3분을 걷다 보면 네거리 신호등이 있고 맞은편엔 밤나무골이라는 동리의 도로가 즐비하게 늘어선 자동차가 보였다. 조금 아래쪽으로 직진하면 정문이 나왔다. 한참 지나 남쪽에서 멀지 않은 장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은 깨끗하고 현대적인 느낌이 들었다. N센터엔 낮이나 밤이나 열을 내고 농구에 집중하는 젊은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곳. 그 위로 한 마리의 새가 날아가고 있었다. 자유로운 새의 날갯짓처럼 청춘도 노년층의 사람도 함께 아름다울 수 있었으면 생각한다.
“그래서 아빠랑 다른 공간에 있겠다고 올라온 거야?”
영지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서 얼마나 있을 계획인데?”
영지는 계약서라도 쓸 것처럼 말했다. 직설적 발언으로 업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은행 창구의 직원 같은 태도로.
“엄만 유기농 채소라고 가지고 오고, 그걸 가지고 또 오래 보관하기 위해 씨름하고 그러지 마. 여기서는 주문만 하면 금세 커피도 현관 앞에 배달이 되는 시대라고. 냉장고 크기가 그만하길 천만다행이지 어쩔 뻔했어. 다음엔 간편하게 옷 한 벌만 달랑 입고 올라와.”
“알았다. 다음엔 꼭 그럴게. 이번엔 네가 좋아한 음식이라 그랬어.”
딸 영지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눈치다.
“불효한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죄송한데 자꾸 미안한 생각이 들게 하지 마.”
“그래그래.”
나도 그제서야 웃음을 지었다.
“글쎄, 딸이 맘 편하게 지내는 거 봐야 내려가지. 불안증과 불면증도 가라앉으면.”
“엄마는 꼭 표현을 그렇게 해야 돼?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텐데. 엄마 아빠 때와는 많이 다르지. 뭘 그렇게 챙겨 온 거야. 밥도 잘 해 먹지도 않는데.”
나는 영지를 힐끔 쳐다보았다. 영지는 입을 다문 채 걸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학교 정문 앞을 빠져나온다. 나는 영지가 안암동 살던 때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학교 끝날 무렵 나갔다가 나란히 마트를 들렀었지. 가끔씩 인터넷에 특별 요리 레시피를 사들고서 요리했던 때가 있었다. 영지는 기분이 좋으면 돌고래 소릴 내며 얄궂게 나를 끌어안았던 딸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 몸짓은 달라지고 있었다.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하고 어쩔 땐 엄마에게 심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나는 걱정이 앞섰다. 지하철역쯤에 왔을까. 그다지 크지 않은 꽃 바구니를 군데군데 내놓고 큰 글씨로 ‘꽃’이라는 홍보 문자를 써 붙인 가게 앞.
“솔직한 꽃가게다.”
“엄마는 꽃을 좋아하니까 눈에 들어오지 난 그렇지 않아. 지나다니면서도 이곳에 꽃집이 있었는지도 몰랐단 말이야. 꽃 선물해 줘?”
“네가 서울에서 집에 내려올 때면 가끔 꽃을 사 왔었지.”
그런 영지 모습이 떠올랐다. 세월도 흐르고 참 많이 달라진 딸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마음만 받을게.”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말했다.
영지가 무슨 말을 하려나 궁금하던 차에 오늘 저녁에는 뭘 해먹을까 하고 딸이 제법 능숙하게 나왔다. 나이가 든 탓이려니 생각이 들다가도 시대의 변화가 참 빠르다 여겨졌다. 노력한다고 전부 결실을 맺는 것도 아닌 현실 앞에 요즘 젊은이들의 직장 결혼 문제가 쉽지 않겠다 싶고 결국 엄마들도 감당해야 할 부분도 많다 여겨졌다.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기대에 부응하려면 여러 호흡이 잘 맞아 떨어져야 하는데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귀찮은 아이이니 원 참. 심지어 ‘좋은 사람 만나러 갈 때에도 귀찮아 못 나갈 정도는 아니지?’ 친구들이 그러더라는 이야기는 어떻게 해석을 할까. 엄마인 나도 충분히 그럴 여지가 보인다고. 그만 잊고 얼른 들어가 쉬자는 딸.
“배우자 선택에도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너도 한 말 두 번 들으려 하지 않은 거 안다. 영지야, 부모님들 하는 얘기가 나이 든 자식들은 잔소리쯤으로 아는 게 아닌지 몰라. 아무튼 오늘은 서론이 길었다.”
“엄마가 오해받을 몸짓이었다고?”
“참 묘한 사람인 줄 알았겠지 그 아저씨는.”
“걷기는 걷는데 옆을 보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자다 걷는 것도 아니고?”
“맞은편에서 정면으로 걸어오는 아저씨를 피하느라 꽃을 보는 척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던 거야. 몸은 앞으로 걸어간 거지. 그러다가 머뭇머뭇 이리 가면 그 아저씨도 저리 가고 이리 가면 이쪽으로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와 있고 처음엔 동시에 일어난 일치에 웃음이 나왔지. 여러 번 반복되면 정색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거야?”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아서 한 번 더 얘기한 거지. 고향도 아니고 타지라서. 그만하자. 나중에 자세하게 얘기 나누기로 하고 딸아! 아이들 말을 어른들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말로만 해석한 듯 안 그러냐.”
“그게 아니고 아무튼 여긴 엄마가 사는 고장도 아니고 요즘 얼마나 많은 사건이 생기는지 엄마도 알잖아. 아무 일도 아닌 일로 봉변당하고 죽는 사람까지 생겨나는 세상에 엄마가 하마터면 그 아저씨랑 꽝 정면으로 부딪혀 얼굴 붉힐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아냐, 난 그저 그 꽃이라는 큰 글씨가 특이하고 재미있었고 그 순간 정면에서 걸어오는 아저씨랑 부딪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이었다는 거지.”
“그런데 왜 고개는 옆으로 돌리고 걷는 거냐고. 앞을 안 보고 걷느냐는 시비라도 들어오면 엄마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내 말은 고개는 꽃을 보고 몸은 앞으로 걸으니까. 누가 봐도 엄마를 오해하지, 꽃게도 아니고.”
“그게 그렇게 큰 사건이 되냐고 내 말은.”
“아니, 그러면 그 아저씨 표정도 못 봤어? 영락없이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니까. 그런 낯선 표정 기분 좋을 리 없지. 엄마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는데.”
“안 부딪혔으면 된 거지. 아슬아슬로 그친 거 아니냐고 내 말은.”
“앞을 보고 가야지. 그 아저씨 언성이 좀 높은 상태였잖아. 엄마의 ‘죄송합니다’ 하는 목소리도 너무 작았고, 이미 말했지만 정면 안 보고 다니니 그렇게 갈팡질팡하게 된 거야.”
딸의 단호한 지적이었다. 자식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 있겠지. 엄마가 좀 이상한 사람이 돼 있었으니까, 오해받을 행동 안 만들었으면 바랐겠지 싶으면서도 언어의 톤이 좀 높았던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엄마는 미안한 생각이 있어? 난 사실 싫었던 거야. 더구나 모르는 사람하고. 난처한 상황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거라고. 그게 우리들의 차이 같아.”
그런데 횡단보도를 건너던 영지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시내 한복판에서 순간 어디로 갔는지 화가 나서 집으로 뛰어간 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몇 분을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나자 갑자기 울음이 솟구쳤다. 낯선 도시에서 모르는 아저씨랑 부딪칠 뻔한 일로 불쾌해진 모녀. 물론 자식의 입장에서는 좋을 리 없겠지만 그렇다고 딸아이가 너무 민감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마음을 추스르고 전화부터 걸었다. 영지는 조금 전에 우체국에 들러 동생에게 택배를 보내야 하는 걸 용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 생각을 골똘하게 하느라 다른 생각은 미처 하지도 못했다.
문득 같은 환경에서 자랐던 영지와 영민이가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걸 느끼는 중이다. 영민인 현재 공기업 교육 기간이고 연고랑 상비약을 보내줄 수 있냐는 동생 전화에 우체국에 택배를 부치러 가는 중이라 하였다. 약과 연고 그리고 밴드 종류의 취향을 잘 아는 누나 영지는 조금 전에 준비해 온 물품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는 영민일 더 좋아하고 아들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온다는 거 나도 잘 알아.”
“내가 언제 그랬어? 항상 평등을 외치는 사람이 그럴 리가 있니?”
“아냐, 그렇지 않아. 엄마도 옛날 사람 맞잖아. 남자아이가 더 좋은 거지.”
“말도 안 되는 말 갖다 붙이지 마. 너랑 영민일 한 번도 차이 나게 대우해 본 적 없다. 영지야, 그건 오해야. 독립 자금도 똑같이 주지 않았니? 최근 사례를 봐도.”
“그건 그렇지만 어학연수 때도 아빠가 영민일 먼저 앞장세웠잖아. 내 기억으론 그래. 단기연수라도 다녀오려 했는데 내 의사는 뒤로 미뤄 놓은 후 더 알아보고 결정하자고 해서 끝내 못 가고 말았던 기억.”
“영민인 두 군데 다녀오는 동안까지 이럴까 저럴까 확실한 대답을 못 한 게 누구였지?”
맏이들이 넘치는 사랑 때문인지 행동력이 대부분 약하고 부모 의존도가 높다는 이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가족이란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함께 겪어 가야 한다는 것도 해서 더 끈끈하다는 걸 얘기하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아빠는 취업 준비 때도 그랬고, 물론 자기 의지가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이랬으면 저랬으면 의사만 나열하고 마음이 어떻겠느냐 짐작도 하지 못했단 말이야. 정답게 감싸기는커녕 상대방의 의사를 아빠는 존중해 주지 않았다는 걸 엄마도 알 거야. 매번 결과로만 모든 걸 따지는 스타일? 인간이란 원래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과정도 중요한 거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아빠 스타일이 원래 결과만을 중시 여기는 사람이라 우리가 얘기를 하여도 신중하게 들어주지 않아.”
“동생이 먼저 취직을 하게 되어 난 사실 할 말이 없지만 하기 나름이라고 더 열심히 안 한 니 탓이라고 아빠 눈빛에 쓰여 있으니 더 이상 의욕이 생길까.”
그동안 함께 취업 준비하면서 여러 고충이 있겠다 싶은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할 말이 있는 영지의 입은 쉬지 않고 튀어나왔다. 어느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 가며 내년 이맘때 다시 시험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떠올리며 나는 지하철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우체국 가는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던 것이다. 기분은 쉽게 살아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매해 다시 성실하자 다짐했던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지의 희미한 의지가 일관성을 보이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영지에게 메시지가 왔다. 택배는 지금 막 보냈고 집으로 가는 중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화해를 하고 기분 좋게 돌아오려던 나는 끝내 이렇게 마무리가 되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두 손을 꼭 잡고 동생을 챙기던 영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라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영지였다. 동생 일이면 뭐든 잘 챙겨주는 누나였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영지는 놀이터에서도 하교를 할 때도 친구보다는 동생을 챙겨 함께 나타나곤 하였다.
사실 얼마간은 별일 없이 잘 넘어갔었다. 하지만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던 것. 두 녀석이 이모 집을 간다고 집을 나섰다가 도착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묵묵부답이었다. 버스를 잘못 타 반대 방향으로 갔던 모양이다. 그때 엄청 힘든 일을 겪어서인지 그 뒤로 영민은 더욱 누나를 믿고 따랐던 것 같다. 기사 아저씨가 다시 종점에서 버스를 타고 집 앞에 내리라 일러주었다는 말을. 중요한 건 그 당시엔 연락할 핸드폰이 없었고 몇 정거장이 되는지도 알 수 없는 거리를 다리가 아프도록 걸었다는 그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실 걱정은 됐지만 둘이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고 하여 허락을 했었는데 말이다. 다리가 너무 아팠더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자라면서까지 동생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 큰 믿음을 주었던 영지였다. 그런데 생각하고 또 이유를 찾아봐도 안 될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물론 엄마의 시각이 사뭇 다를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방송사 시험을 치르고 1차 2차 면접까지, 그러나 영지는 마지막 관문에서 연락을 받지 못했던 것.
웃음과 울음이 한꺼번에 터지는 격이다. 나이 든 누나는 아직도 햇살 안에 웃지 못하고 동생은 먼저 사회생활로 잠입한 상황. 1년 전엔 둘 다 비슷한 방향에서 공부를 했었는데 동생은 시험 합격 날에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 혼자서 노심초사하다가 그만 마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영지는 이후 말이 적어지고 신경은 예전보다 예민해졌다.
어느 여름날 오후 나는 영지랑 커피 약속을 하였다. 물론 외출을 시도하고 말수를 늘이고 싶어서였다.
“딸아! 지금까지 어느 때가 가장 행복했었어?”
“난 누구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그리고 특별하게 행복한 적도 그렇다고 나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거든.”
영지가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네.”
“엄마는 이 세상에서 언제 가장 행복했는데.”
가끔은 공상에 빠져 있는 딸아이를 보며 그다지 걱정스런 눈빛이 아닌 함께 있으니 행복하게 느꼈다고, 인생이 어떻고 거창하게 말한 적도 없었지만 사는 것이 남들과 아주 특별할 것도 없었다. 가끔 터트려진 이벤트로 재회 때마다 여행을 대신하곤 하였다. 좋은 시간들은 항상 빨리 흘러가곤 하였으니까.
“이번엔 어떤 결정을 한 거니?”
엄마는 다시 격려와 재촉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창문을 통해 전해지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며 영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엄마! 부탁이야.”
잠꼬대 같은 넋두리가 영지의 입 안에 맴돌고 있는 듯. 더 넓은 세상을 만나야지 바다로 나아가야지. 젊은 날의 패기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혼란의 시기를 벗어나 한 걸음만 걸어가 주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그 순간,
“엄마! 나 여기에서 잘 해보려고.”
말끝이 부드럽다. 본인이 선호하던 자리는 아니었지만 국가에서 뽑은 공무직이 틀림없었다. 주변의 환경이 빠르게, 인간적인 행운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뒤에서 계속해서 들리는 환희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영지의 마음이 흐르는 동안 건널목 하나 얼마간 세워져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