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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투표 참관인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길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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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변이 재회나 만남을 더욱 기대했지만 그것은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고 민우는 점심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기회가 있었는데도 민우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찾아왔었는지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가령 화장실에 잠깐 갔다 온 사이나 아니면 이렇게 점심 먹으러 나왔을 때에 그러한 기회가 있었을는지 모른다.
‘이쿠노에서도 투표를 할 수 있었는데 일부러 영사관까지 갔는데 오빠가 없었습니다. 혹시, 점심 먹으러 가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제 낮에 이쿠노에 사는 여동생한테 온 메일이었는데 사실 그 시간에 민우는 점심 먹으러 근처 식당에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운 나쁜 타이밍 속에 극적인 그 기회는 있었을는지 모른다고 여러 해석을 놓고 스스로 자문자답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 5시가 되면 투표 기간은 끝이었다.
“이번 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에서 재외국민 대통령 선거 투표가 있는데 알고 있지? 내가 알고 있는 여당 인사로부터 추천 의뢰가 왔는데 그때에 민우를 여당 투표 참관인으로 추천하고 싶은데 맡아 주게.”
민우가 부배승 동포 선배로부터 10일 전에 받은 전화였다. 민우는 깜짝 놀랐다. 투표하는 것만도 긴장되는데 참관인으로 참가하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정당을 대표한 투표 참관이라니 더욱 그랬다.
“선배님께서 저를 인정해 주셔서 이렇게 고국의 대통령을 뽑는 엄숙한 선거 투표소에 참관인으로 추천해 주신 것은 고맙습니다. 그런데 투표할 때도 긴장되는데 참관인은 어렵습니다. 그것도 여당을 대표하는 참관인이라니. 여당이 싫어서가 아니고 그렇다고 대대적으로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데 제가 나라를 위해 무슨 큰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 싫습니다.”
민우는 약간의 과장 속에 말했다. 부배승 선배는 이쿠노에 살면서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3년 선배로서 이쿠노에서 부배승 내과전문의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쓰루하시에서 한복 전문점을 크게 하는 민우 아버지와 신발제조회사를 경영하는 부배승 선배 아버지 역시 친한 친구로서 친구 대물림 사이였다. 지금도 서로 이쿠노에 살면서 시간 있을 때마다 만났다. 그리고 동포 이야기로부터 한일 양국의 정치 화제로 비약하고, 개인적인 골프 이야기 등, 화제는 흐르는 샘물처럼 끊이지 않았고,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는지 몰랐다. 이러한 화제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빌미로 종종 2차까지 가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이런 화제들 속에서도 서로 확고히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부모가 조총련에 전혀 물들지 않았다는 고마운 사실이었다.
서로 바쁜 일 관계로 적극적으로 민족 단체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이웃이나 아는 사람들의 조총련 가족들이 북송 이야기를 들으면 해결책이 없는 연민의 정으로 자신들이 블랙홀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수 여당 투표 참관인으로 총영사관 투표소에 참가해 달라는 부 선배의 갑작스런 제안에 민우는 당혹스러웠다.
“경험했던 사람이 말하던데 누구나 할 수 있다고. 그래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고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네. 내가 하고 싶지만 일주일 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자네한테 부탁하고 있네. 가서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네.”
“네? 일주일이나 합니까? 저도 시간이 없어서 못하겠습니다.” 
“그게 좀 걸림돌이지만 이건 우리 동포들에게는 아주 드문 경험의 대상이네. 내가 개인 의원의 의사가 아니었다면 한번 맡고 싶네. 솔직히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쉽네. 자네에게 떠맡기기 위한 얘기가 아닐세. 비약적인 생각일는지 모르지만 이건 우리 재일 동포로서는 돈 주고도 경험 못할 일이네. 자네는 시간에 그런대로 여유가 있으니까 한국에 업무차 출장 간 셈 치고 꼭 맡아 주게. 시간이 있다면 오래간만에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하세.”
그래서 그날 저녁 부배승 선배의 끈질긴 설득과 강한 추천에 민우는 아내와 의논 끝에 맡기로 했는데 아내의 간단한 결론은 의외였다.
“당신은 부 선배님 말이라면 꼼짝 못하지만 이번 참관인 건은 저도 대찬성이에요. 한국의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 투표권밖에 없는 동포인데 부 선배님 말대로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제가 그 대신 바빠지겠지만.”
민우는 패션 디자이너인 아내와 오사카 미나미센바에서 외국에서 수입한 의류 도매업과 의상실을 경영하고 있는데, 아내까지 깜짝 놀랄 대찬성이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제21대 대통령 재외선거 투표기간이지만 사전 준비를 위해 민우는 전날인 21일 오전 9시 오사카 난바에 있는 한국 총영사관에 갔다. 선거관리위원, 정당 참관인, 컴퓨터 담당자들과 서로 첫인사를 마치고, 투표 기간 중의 역할에 대해서 담당 책임자인 한영재 영사로부터 설명을 듣고 1층에 투표소 설치하는 것을 도왔다.
다음 날 21일 오전 7시 반에 모두 집합을 하고 아침 조회를 시작했다. 선서식 후에, 선거인 명부가 입력된 컴퓨터 4대에 부착한 밀봉 테이프를 떼고 4개 투표소와 투표함을 확인하고 투표함에는 개봉 못하도록 정당 대표 참관인 서명의 테이프를 부착했다. 오전 8시가 되자 밖에서 줄지어서 투표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선거 안내원들의 안내로 투표소로 들어섰다. 민우는 또 한 사람의 여당 참관인과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참관인 두 사람과 나란히 앉았다. 다른 정당 참관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투표자들은 외국 재류 허가에 필요한 양국 정부가 발행한 사진이 들어 있는 증명서를 제출하고 투표 용지를 받았다. 얼굴 확인을 위해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에게는 모두 마스크를 벗고 나서 확인 후에 투표용지를 건넸다. 줄을 서고 기다리던 30여 명의 사람들이 투표를 마치고 나니 장내가 한 순간 갑자기 조용하다가 다시 릴레이처럼 이어졌다.
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의 관할 지역인 간사이는 오사카부, 교토부, 나라현, 와카야마현, 시가현이었다. 관할 지역은 넓었지만 선거 투표소는 총영사관, 재일 동포 최대 밀집지인 이쿠노의 민단 이쿠노남지부, 교토와 와카야마 민단 본부, 모두 4개소에 설치되었는데 투표하기 위해서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곳도 있었다. 이쿠노에 살면서 10여 분도 채 안 걸리는 투표소에 가면서 투덜거렸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 먼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그 사람들만이 아니고 민우는 투표를 마치고 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투표하러 온 사람 중에는 증명서를 깜짝 잊고 온 사람들도 있어서 되돌아가거나 가족에게 연락을 하여 증명서를 갖고 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선거인 명부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외국에 사는 영주자와 한국 국내에 주민등록을 만든 사람들의 선거인 등록 방법, 신분 확인서는 물론 특별영주자 증명서와 재류 카드 등도 달랐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국외 부재자와 재외 선거인 등록 변경 신청 기간을 2025년 4월 4일부터 24일까지 재확인 홍보를 영사관과 민단 등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러한 것이 국내에서 실시하는 투표와 약간 다른 방법이지만, 이 등록 변경을 몰라서 안 했기 때문에 투표할 수 없는 허탈감 속에 돌아가는 사람들도 꽤 많아 안쓰럽게 했다. 민우는 그 사람들에게는 더욱 정중히 인사를 했다. 모든 일상을 뒤로 미루고 대통령 선거를 위해 이국에서 모국의 영사관까지 일부러 찾아왔던 유권자들이었다. 그들과 우리 대통령을 남의 나라에서 뽑는다는 뿌듯한 공유감의 이반이 가슴 아팠다.
이 땅은 언제나 남의 나라라는 인식이 무의식 속에서도 옹이처럼 박혀 있어서 열외자로 느껴왔던 소외감이 점점 희석되고 있었다. 영사관 입구에 게양된 대형 태극기와 1층 입구에 들어서면 1면 가득히 써 있는 훈민정음의 구조물 안에서 실시되고 있는 대통령 선거 투표는 바로 우리나라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치외법권의 울타리라는 물리적인 측면에서 주는 감정의 변화가 아니었다.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두 시간 이상 걸리면서 그들은 이곳에 무엇을 위해서 왔는가를 무언 속에 보여 주고 있었다. 외국 생활 속에서 국적이 한국이라는 것 하나 때문이었다. 이게 한국 국내에 있으면 체험할 수 없는 혈연, 학연, 지연을 초월 한국연(國緣)이었다.
민우는 갑자기 가슴이 울컥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의 변화였다. 여권 신청이나 다른 업무로 영사관을 방문할 때는 까닭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었다. 일본 관공서에 갔을 때보다 더욱 긴장되었다. 특히, 투표를 하러 왔을 때는 더욱 그랬다. 10여 명 이상이 둘러앉은 공간에 들어섰을 때, 어쩌면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강박감의 긴장감은 투표를 마치고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나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와는 정반대의 측면에서 그 장면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당시 모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강박감과 긴장감은 자신만이 느꼈던 감정이었다.
외국 땅에서 지극히 보편적인 일상의 흐름처럼 모국의 대통령을 뽑는 투표가 실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한 순간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보는 자신이 도저히 믿기지 못할 정도였다.
오전에 총영사가 투표를 마치고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는 모습을 한국에서 온 매스컴이 보도 자료로 촬영이 있었고, 선거관리관리위원 책임자에 대한 인터뷰가 있었다. 오후에는 민단을 비롯한 각종 단체 임원들이 홍보 차원에서 같이 모여서 투표를 하는 등, 마감 5시까지 투표소는 북적거렸다.
정확히 5시가 되자 투표소 입구문을 차단하고 선거인 명부가 들어 있는 4개의 컴퓨터를 끄고 정당 참관인들이 서명한 테이프로 봉인을 하고 투표함을 열었다. 참관인 테이블을 마주 붙여서 투표함에 들어 있는 투표용지를 모두 꺼내서 20장씩 고무로 묶어서 세기 시작했다. 4개의 컴퓨터에서 인출한 투표용지와 투표 수가 일치한 것을 확인하여 규정 자루에 넣고 일자와 매수를 기입하고 다시 정당 참관인의 서명을 했다. 민우는 그 사이 이러한 과정을 스마트폰으로 전부 찍었다. 투표용지를 담은 자루를 갖고 담당 영사와 참관인들은 영사 사무실이 있는 5층으로 이동을 했다. 이곳에서 투표용지를 보관하기 위해 새로 만든 보관함에 넣고 다시 서명을 한 테이프를 부착하고 자물쇠를 채우고 잠갔다.
“여러분, 이것으로 오늘 하루의 업무가 모두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 5일간도 이러한 순서로 시작되고 마치게 됩니다. 잘 부탁하겠습니다.”
한영재 영사가 문밖까지 배웅하면서 인사를 했다.
다음 날도 오전 7시 반에 조례를 마치고, 봉인했던 컴퓨터를 확인하고 투표함에는 새로운 봉인 테이프를 부착하고 8시부터 투표가 시작되었다. 첫 경험이었던 어제, 민우는 종일 긴장감의 연속이었지만 이틀째인 오늘은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정당 참관인으로서 투표가 원만히 잘 진행되고 있는가를 주시하는 역할이어서 따로 할 일이 없었다. 하루 종일 투표하러 온 유권자들을 바라보며 투표 과정에서 이상 여부를 시선으로 확인하는 것뿐이어서 어떤 무료함을 느끼기도 했다. 아는 사람이 투표하러 와도 사어가 금지되어서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이고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잠시 투표소 밖에 나가서 말을 나눴다. 이러한 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민우는 의외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몇 십 년 만나지 못했던 학교 동창들도 연륜만큼이나 변했지만, 서로가 변하지 않는 눈빛 속에 투영된 기억의 잔상은 모닥불처럼 되살아났다‘출세했네’라는 가벼운 농담 곁들여 나누는 힘찬 악수 속에 교환하는 명함과 전화번호가 있는가 하면 다시라는 말 한마디로 헤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만남 속에 특이한 만남은 아직도 조총련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으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투표장에 찾아왔을 때였다. 평소에는 이쿠노에서 지나치며 낯익은 얼굴이지만 서로 빤히 쳐다보면서 인사도 나누지 않았던 조총련 활동가들이었다. 그러나 투표소에서의 만남은 자신들도 모르게 어! 하는 어정쩡한 감탄사 속에 반갑습니다와 고맙습니다 하면서 나눈 악수는 그 어떤 악수보다 힘이 있었다. 언제부터 한국 국적으로 바꿨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참관인으로서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선배님도 참, 그냥 가까운 이쿠노에서 투표를 해도 되는데 일부러 영사관까지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점심을 먹고 투표소에 돌아와서 얼마 없을 때 부배승 선배가 투표하러 왔다. 민우는 부배승 선배와 함께 투표소를 잠깐 나왔다.
“아니지, 좀 더 일찍 와야 했지만 자네 아는 것처럼 자리를 비울 수 없었네. 그래서 오늘 일요일이니까 겨우 올 수 있었는데 정말 수고하네.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어떤가. 아주 자연스럽게 보이던데.”
영사관은 주차장이 없기 때문에 자동차로 오는 것은 불편하여 지하철로 왔다고 했다. 그 사이 전화로 몇 차례 여러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래도 일부러 이렇게 와 주니 고마웠다. 지하철을 이쿠노 쓰루하시역에서 타면 넷째 정거장인 난바에서 내려야 했다. 이렇게 이쿠노에서 오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전화로도 말했지만 참관인 일 이외의 예로서 극적인 만남은 없었지만 예상 못했던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그런 만남이 좋은 만남인지 나쁜 만남인지 모르겠지만 그건 흥미 있는 일이네. 언제 자세히 들려주게. 어떻든 투표를 마치고 이렇게 자네 모습을 보고 나니 짐 내려놓은 것처럼 무척 마음이 가볍네. 그럼 들어가게.”
계속 투표소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부 선배가 민우 등을 밀었다.
“네. 선배님 잘 가십시오. 정말 고맙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오후 두 시를 넘고 있었다. 가족과 친구들끼리 온 사람들이 영사관 앞, 선거와 투표를 알리는 간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은 첫날과 다름없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쳐다보면서 영사관 앞을 지났다. 이제 세 시간 정도 지나면 6일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꼼짝 못했던 참관인 역할도 끝이 난다. 어떤 아쉬움이 실안개처럼 마음 한 구석에 피어나고 있었다. 짧은 6일이었지만 외국에서 투표 업무를 같이 했던 사람들과 기약 없이 헤어진다는 것 또한 그 아쉬움을 짙게 했다.
민우가 감상적인 여운에 잠깐 빠져 있을 때, 밖이 술렁거렸다. 한국에서 온 젊은 청년 4∼5명이 들어왔다. 신원 확인 속에 선거인 명부를 조사하니 그중 두 사람이 빠졌었다. 사전 확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가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투표 첫날부터 그러한 사람이 많아서 첫날 오후부터 민우는 한 자바를 정(正)자로 체크했는데 투표자의 1할에 가까운 숫자여서 깜짝 놀랐다. 그들이 낭패감에서 위축돼 나가는 모습에 자신의 비슷한 경험이 6일째인 오늘 선명히 떠올랐다.

 

헌혈 때였다. 민우는 30년 전 1990년 1월 15일 일요일, 성인의 날 기념으로 식을 마치고 성인식 기념 헌혈 캠페인을 벌이는 버스에서 헌혈을 했다. 이렇게 30년이 지나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이틀 후인 1월 17일 새벽 5시에 미증유의 고베 대지진(정확한 명칭은 ‘한신·아와지 대진재’이다)이 일어났었다. 민우는 일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어학 연수 일 년을 마치고 서울 K대학 경영학과 1학년 재학 중이었다. 겨울방학이어서 귀가하여 한국 민단 오사카본부가 주최하는 재일 동포 성인식에 참가했다가 친구 6명과 처음으로 헌혈을 했다. 여자 친구도 3명이 같이 했었다. 한국인의 피가 재일 동포에게 수혈될 확률은 제로에 가까운 일이지만 한국인 피가 일본인 피에 섞인다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그들과 헌혈을 했다. 그 후부터 민우는 지금까지 15회나 했다. 더 하고 싶었지만 민우의 실핏줄 같은 혈관은 언제부터인가 팔뚝 깊숙이 들어가 버려서 혈관 찾기가 무척 어려웠다. 큰 역마다 설치된 일본 적십자 헌혈센터의 베테랑 간호사들도 몇 차례 혈관 찾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따뜻한 가제를 덮고서 재도전해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사람이 헌혈을 위해 대기하는 가운데 마이크로 “김상, 김민우 상, 3번 창구로 오시기 바랍니다.” 하는 헌혈센터 담당 의사가 질의 문답, 혈압 측정 등 기본 체크를 할 때부터 마이크로 호명이 있었고 그때마다 당사자는 담당 창구에 갔다. 최종적으로 헌혈 채혈 창구에 갔을 때, 마지막으로 채혈을 위해 주사침으로 혈관을 찾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혈관이 제대로 안 나오니 다음 기회에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손등에 있는 혈관으로 해주십시오.”
뚜렷하게 나온 손등의 혈관을 보이면서 민우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규칙상 헌혈 채혈은 팔뚝에서만 가능합니다. 모처럼 오셨는데 정말로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걷어 올렸던 팔뚝의 옷을 내리고 그 자리를 나와야 했다. 영문을 모르는 대기자들은 모두 힐끔힐끔 민우를 쳐다보았다. 마지막 채혈 단계에서 그만두다니 민우의 피가 헌혈 대상에서 큰 결점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민우는 이러한 곁눈질이 참을 수 없었다. 민우는 일본명(통명)을 사용하지 않고 김민우라는 본명을 언제나 사용하고 있었다. 김상, 혹은 김민우라고 마이크로 불렸으니 모두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외국인이 헌혈을 한다니 고마운 인식의 호기심으로 보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채혈 단계에서 거부당하니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헌혈의 피에 결점이 있다고 모든 사람들은 인식했을 것이다. 이것은 존경의 시선을 보내던 일본인들에게 부정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빌미를 새롭게 제공한 것과 다름없었다. 민우의 선의적인 행위가 역효과를 가져온 견디기 어려운 상황 속의 시간이었다.
민우는 참담한 심정으로 헌혈 센터를 나오고 다시 다른 헌혈 센터에 가도 마찬가지 결과였다. 그것이 민우에게는 치명적인 트라우마가 되어 헌혈을 체념했으나, 가끔 TV 방송에서 헌혈 부족을 전하는 뉴스를 듣고는 다시 헌혈센터를 찾았다. 몇 차례 주사바늘을 여기저기 혈관을 찾아 헤매다가 채혈을 할 수 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채혈을 못 하고 되돌아올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부정적인 모든 시선을 느껴야 했다. 지금은 마이크 호명이 아니고 팔찌와 같은 밴드를 끼고 있으면 개별로 신호음이 와서 차례를 알리지만 수축된 혈관은 그대로였다.
그때 자신의 트라우마 심리 상태가 투표를 못 하고 주눅이 들어 되돌아가는 그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깨끗하고 신성한 한 표를 이국에서 행사하려고 일부러 영사관까지 당당하게 왔던 사람들이다. 민우는 자신의 탓이 아니지만 “죄송합니다”라고 더욱 머리를 숙였다.
세 시가 가까울 무렵 투표소 밖이 약간 소란스러웠다. 민단 나라현본부가 투표자들을 인솔하고 왔다. 15여 명이 줄을 서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먼저 안으로 모셨으나 뒤로 물러서면서 먼저 하라고 권했다. 신청 수속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뒤에서 따라하겠다는 것이다.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은 모두 벗고 증명서와 함께 본인을 확인하고 있었다. 민우는 맞은편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40대 여성이 투표 용지를 받고 홱 돌아서서 기표소로 걸어갔다. 한 순간이었지만 민우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누구일까. 순간적이어서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여성이 기표를 마치고 천천히 투표함으로 다가왔다. 민우와의 거리는 3미터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도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출구 옆에 앉아 있는 민우 앞을 지나면서 한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다.
앗! 둘이는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윤정애 씨?”
민우가 떨리면서 말했다.
“네, 민우 씨.”
윤정애 씨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민우는 옆에 앉은 참관인에게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하고 나서 윤정애 씨와 밖으로 나왔다.
“무슨 말을 먼저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건강하신 모습으로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무엇보다도 반갑습니다.”
민우의 몸은 전신이 후들거리고 목소리는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민우는 이곳이 투표소가 아니라면 꼭 껴안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참고 손을 내밀었다.
“저도 설마 여기서 민우 씨를 만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습니다.”
윤정애 씨도 놀란 표정을 거두지 못한 채 손을 내밀고 악수를 했다.
“얼마나 정애 씨를 찾았는지 모릅니다.”
민우가 겨우 안정감을 되찾으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윤정애 씨가 머리를 깊게 숙였다.
“어떻든 반갑습니다. 나라현에 사시는 분들과 같이 오셨는데 지금 나라에 살고 계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재회의 기쁨과 반가움에서 우러나올 환희와 미소가 결여된 두 사람 사이의 예기치 않았던 이 만남에, 다른 감정의 개입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놀랐다는 여운 속에 자신들도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몰랐다. 둘이서 얘기를 나누는 동안 투표를 마친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주위가 술렁거렸다.
“저는 오늘 5시까지 투표를 마감하고 모든 마무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립니다. 그 후라도 괜찮다면 얘기 나누고 싶습니다.”
민우가 말했다.
“저는 같이 온 일행과 돌아가야 합니다.”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내일은 어떻습니까? 어디라도 가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후 두 시에 다시 여기 영사관 앞으로 오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의 명함 드리겠습니다.”
민우는 말을 마치고 명함을 꺼내서 윤정애 씨에게 주었다.
“저는 명함을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윤정애 씨가 명함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럼 여기에다 정애 씨 전화번호를 적어 주십시오.”
민우는 다시 자기 명함을 꺼내서 윤정애 씨에게 볼펜과 같이 주었다. 윤정애 씨는 그것을 받고 전화번호를 적어서 민우에게 주었다.
“자, 다들 투표가 끝났으면 가실까요.”
같이 온 인솔 책임자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을 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정말 놀랐고 반갑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멀리서 투표하러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민우가 다시 손을 내밀고 윤정애 씨와 악수를 하면서 나라에서 온 일행에게도 인사를 했다.
민우는 가슴 뛰는 흥분을 억제하면서 5시에 투표를 마감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최종 점검을 마치고서, 컴퓨터와 기표소 등을 같이 철수 정리를 했다. 그리고 정당 참관인들은 영사실에 보관한 투표용지를 모두 모아서 외교행낭에 넣고서 정당 참관인 서명 용지를 부착했다. 이로써 6일간의 재외국민선거 투표 행사를 무사히 마친 서로의 수고를 위로하면서 제각기 헤어졌다.

 

민우가 윤정애 씨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은 것은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일주일 후였다. 1995년 1월 15일 민단 오사카본부 성인식을 마치고 민우가 헌혈을 할 때에 윤정애도 같이 했었다. 그날 저녁 그들은 민단 청년회 축하회에 참석하고 헤어졌다. 윤정애는 당시 오사카 요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16일 낮과 밤도 요리학교 기숙생들과 축하회를 열고 17일 오전에 부모가 살고 있는 고베 나가다구에 귀가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귀가할 17일 새벽 5시에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다. 효고현의 고베로 가는 모든 교통이 차단되고 전화 역시 모두 끊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나가다에는 여기저기 화재가 발생했다. 모든 TV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대지진을 보도하고 있었다.
민우는 깜짝 놀라서 요리학교 기숙사에 전화했더니 윤정애는 걸어서라도 부모가 있는 나가다까지 가야 한다고 해서 나갔다고 했다. 민우는 초조했지만 윤정애와 연락할 방법은 하나도 없었다. 휴대폰이 나오기 전이어서 일반 전화만이 통신 수단이었는데 그것이 끊겼으니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6일이 지나도 윤정애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여진의 위험성이 있고 혼잡하니 지역 주민이 아니면 지진 현장의 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호소 방송이 계속 되풀이되었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고베 나가다구로 향했다. 부모에게는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사는 친구 집에서 1박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 고베시 나가다구는 오사카시와 반대편에 있어서 효고현의 여러 시를 지나야 했다. 쓰러진 가옥들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어서 나가다에 도착했을 때에는 오후 두 시를 넘고 있었다. 민우는 갖고 간 나가다구의 지도를 보면서 집을 찾았다. 그 부근에는 출입금지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고 화재로 타다 남은 기둥과 벽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었는데 로프까지 쳐져 있었다.
민우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디로 가서 정애를 찾아야 할지 아득했다. 지나가는 50대 남성에게 사정을 말하고 물었더니 재일동포였다. 이 부근에는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니까 민단에 가서 알아보라고 나가다 민단 지부에 가는 길까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민우는 고맙다면서 민단에 갔다. 민단 나가다지부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으며 사무실 앞에는 다키다시(재해 시 피해자들에게 식사, 일용품 등을 무료로 제공하는 활동)를 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는 그들 중에 배식을 돕고 있는 정애를 발견했다. 정애야! 민우는 뛰어가면서 정애를 불렀다. 정애가 깜짝 놀라면서 자기를 부르는 곳을 쳐다보았다. 민우야! 정애도 민우를 부르면서 서로 껴안고 엉엉 울었다. 주위도 놀라지 않고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지진 피해로 여기저기서 일어난 현상의 하나였고 모두 경험자들이었다.
“연락을 못 해서 미안하다. 도저히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어.”
“괜찮아. 나는 정애네 집에 갔다가 바로 여기로 왔어. 그런데 부모님들은?”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어.”
정애가 더욱 민우를 껴안으면서 엉엉 울었다. 정애야! 민우는 정애 등을 쓰다듬으면서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일주일 전 지진이 일어났던 날, 걸어서 저녁에 도착한 집은 화재로 출입금지였고 부모님은 화재가 나기 전에 집이 무너져서 숨져 있었고 화재는 그 후에 일어났다고 했다. 부모님 유해는 화장을 못 하고 임시 유해 안치소에 있으며, 자기는 중학교 체육관 피난민 대피소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낮에는 이곳에 와서 식사 배급 등을 도우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민우는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다. 정애는 여진으로 위험한 이곳에 일부러 와 주었다고 다시 껴안고 엉엉 울었다.
그날 밤, 민우는 정애가 머무는 피난소에 머물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왔다. 정애는 부모님 장례식과 재해 신청 등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장례식은 모든 피해자와 합동으로 공공기관이 모두 주선하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참가만 한다고 했다.
민우는 정애와 헤어지고 마음에 걸리면서도 2월에 서울에서 한국어 단기 집중 강습이 있어서 바로 서울로 떠났다.
민우가 정애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민단이 주최하는 동포 고등학생 3박 4일 본국 연수에 참가했을 때였다.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이쿠노여서 금방 친해졌다. 그 후에도 종종 만났다. 그런데 정애 아버지가 샌들 디자이너였는데 동포가 많이 살고 주요 산업이 샌들의 본거지인 나가다로 이사를 갔다. 그래도 둘이는 편지를 주고받고 가끔 만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정애는 조그마한 요리집 가게를 갖는 것이 꿈이라면서 요리 전문학교를 택했고, 민우는 동포로서 하나는 특출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한 희망에 찬성을 하고 한국어도 배우고 공부를 위해서 한국 유학을 했다.
서로 멀리 떨어졌지만 편지 왕래는 계속되었고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만난 성인식이었다. 민단 주최 성인식도 정애는 효고현이어서 그곳에서 해야 했지만 친구들 많은 오사카에 참가하고 싶다고 해서 특별히 신청했었고 성인식 기념으로 헌혈도 같이 했었다. 그 후 정애는 임시 피난지에 살면서 나가다 피해자를 돕는 센터에서 2년간 봉사활동을 했다. 한순간에 부모를 잃게 한 나가다는 그녀에게 악몽의 지역이었으나 도망치듯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정면으로 부딪히고 지역 동포와 일본인들과 슬픔과 고통을 공유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3년째를 맞이한 정애는 그동안 휴학했던 요리학교 2학년으로 복학하고 아르바이트를 위해 이쿠노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한국 식당에서 일하다가 단골손님들인 스낵바 마마들이 사정을 알고 수입이 많은 스낵바에서 일하기를 권해서 그곳으로 옮겼다. 서울 유학 중인 민우는 편지로나 방학 때 오사카에 와서 반대했지만 나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민우와 함께 나가다 피해지에 단기간 자원봉사자가 되어 방학을 보내곤 했었다.
민우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서울에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2년간의 대학원을 졸업하고 오사카에 왔을 때 갑자기 정애가 사라졌었다. 어떤 사전 예고나 그러한 낌새도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어떤 사건이나 사고에 휘말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도 했지만 의도적으로 민우 앞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부모를 잃고 친족이 전혀 없어서 민우를 더욱 믿는다고 오히려 민우가 자기 곁을 떠나버릴까 걱정했던 정애였다. 일본 무역회사에 입사해서도 미친 듯이 정애를 찾았지만 친구들도 몰랐다.
그 후, 민우는 오사카 본사 근무 2년 후에 한국지사로 파견되었다. 민우는 그때 서울에서 재일교포인 패션 디자이너 아내 정연아를 만났다.

 

다음 날, 민우는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의 기복 속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1시 40분에 영사관 앞에 갔는데 정애 씨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도 지금 왔습니다.”
정애 씨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 부근에는 조용한 카페가 없으니 약간 걸어서 닛코 호텔 카페가 좋을 것 같습니다.”
민우는 인사를 하고 걸었다. 정애 씨가 말없이 뒤를 따라서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으로 붐비는 호텔이었지만 오후 두 시의 카페는 한산했다. 구석의 조용한 자리에 앉고 둘은 커피를 주문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민우 씨께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정애 씨는 머리를 깊게 숙였다.
“괜찮습니다라면 저 자신까지 속이는 위선이 되겠지만 정애 씨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민우가 긴장된 어조로 말을 했다.
“네, 제가 일했던 스낵바에 언제나 두 분이 같이 오시는 손님이 계셨습니다. 두 분은 친구 사이였는데 무척 점잖으시고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약 일 년이 지나서 알았는데 두 분은 민우 씨 아버님과 부배승 의사의 아버님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뭐라고요! 저의 아버지가 정애 씨 가게 손님이었다고요?”
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큰 목소리에 놀라면서 주위를 살폈지만 괜찮았다.
주문한 커피를 갖고 왔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
“부배승 의사가 결혼하던 날 피로연을 마치고 민우 씨 아버님이 다른 친구 세 분을 데리고 가게에 왔었습니다. 그때 우리 아들도 결혼을 해야 하는데 하면서 민우 씨 얘기를 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말은 그날 처음 들었습니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일 년 동안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민우 씨 아버님과 술잔을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민우 씨. 어떻게 이런 말을 민우 씨한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정애 씨는 눈에서 손수건을 떼지 않았다.
“정애 씨…. 그게….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민우도 두부 자르듯 명백히 말을 잇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교양이 넘치고 존경하는 분들이지만 때로는 아름답지 못한 불륜과 외설을 안주 삼아 비아냥거려도 면책되는 술집에서 저는 민우 씨 아버님들과 일 년 간 조심스럽게 주의하면서도 맞술을 나눴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정애 씨는 그날 이후, 부모님 살던 나가다에 간다면서 민우 씨 아버님들은 물론 아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와는 정반대인 나라현으로 떠났다고 했다.
“민우 씨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저로 인해서 민우 씨 가정에 어떤 갈등이 생기는 것보다 제가 민우 씨와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을 하고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끊고 싶어서 어떤 인연도 없는 나라시에 있는 호텔에서 조리사 보조로 7년간 억척스럽게 일했습니다.” 
그녀는 찬물을 단숨에 들이키고 다시 말했다.
“호텔 사장님이 지진으로 부모 잃은 저의 사정을 알고 네 꿈대로 독립해서 요리 가게를 차리라면서 후계가 끊어져 문 닫은 조그만 우동집 가게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일본 요리보다 한국 요리에 더 마음이 끌린다니까 그래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7년 전에 그 가게에서 한국 이자카야(선술집)를 개업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민우 씨가 결혼했다는 사실 등을 단편적으로 들으면서 안심했습니다. 저의 가게에는 동포와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도 찾아왔습니다. 민우 씨가 결혼 후, 저도 나라시에 사는 동포와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민단 나라 부인회에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투표하러 갔을 때 민우 씨를 만났습니다. 저의 가게 명함을 드리겠습니다.”
정애 씨는 말을 마치고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다가 다른 카드 하나를 떨어뜨렸다.
“아, 이 카드는 헌혈 카드입니다. 기억 나십니까? 우리가 성인식 때, 민우 씨가 성인 기념으로 헌혈을 하자고 해서 했습니다, 그 후에 고베 지진이 일어난 날과 저의 생일날은 18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헌혈을 하고 있습니다.”
정애 씨가 말을 마치고 카드를 핸드백에 챙겨 넣고 명함을 꺼냈다.
“가게 이름은 민우 씨의 우자와 제 이름 정자를 따서 제가 우정이라고 정했습니다.”
정애 씨가 명함을 내밀면서 살짝 스치는 미소를 지었다. 짧은 미소였지만 어제 만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민우는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가게 이름은 한글과 한자로 우정(友情)이라고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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