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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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공기 속에서 계절도 옷을 갈아입는다. 흰빛과 분홍빛이 어우러진 호접란 한 송이, 햇빛을 머금은 그 자태는 마치 한 마리 나비가 조용히 내려앉은 듯, 고요 속에 생명을 품고 있었다.
호접란을 선물 받던 날이 떠오른다. ‘행복이 오래 머무는 꽃’이라는 꽃말과 함께 건네받았던 화분. 그때는 몰랐다. 마지막까지 그 자리를 지켜준 ‘의지의 꽃대’가 내 마음을 이렇게 따스하게 해 줄 것을.
호접란 화분은 길게는 다섯 달까지도 꽃을 볼 수 있다. 잘 관리하면 꽃이 핀 후 몇 주는 거뜬히 견디는 꽃이다. 꽃대 하나에 열 개 이상의 꽃봉오리가 차례로 맺고, 질서를 지켜 꽃을 피운다. 꽃을 맺은 꽃봉오리는 하나도 실패 없이 모두 피우는 별난 꽃이기도 하다. 호접란의 끈기는 이길 수가 없다. 조금도 변하지 않고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내려앉는 가을에 밀려 그 많던 꽃 중의 마지막 꽃이 두꺼운 잎 위에 힘없이 떨어져 누워 이별을 고하니 안타까움이 클 수밖에.
세월이 흘러 그 많던 가족을 다 잃고 혼자 남아 당당히 서 있던 하나의 그 꽃대 모습이 경이로웠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버티는 모습이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차가움이 다가오며 가을이 햇볕을 줄일 때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였다.
호접란은 행복이 오래 머무는 꽃, 사랑과 행복, 우아함과 번영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꽃이다. 나비가 날아가는 듯한 꽃의 형태에서 이름이 유래되었고,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색상도 노란색 보라색, 붉은색 등 화려하고 다양하다. 정말 고운 색깔로 나비의 날갯짓처럼.
호접란은 공기를 정화하여 실내 환경을 쾌적하게 만들어 준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 시간이 되면 앞쪽의 호접란과 눈을 맞춘다. 한결같이 밝은 모습으로 반겨주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꽃이 떨어지고 난 후 꽃대는 어깨가 구부정하여 볼품없는 나목(裸木)이 됐다. 산불에 타고 줄기만 덩그러니 서 있는 나무 모습이 됐으니까.
호접란은 꽃이 피는 순서대로 조금씩 생기를 잃다가 서서히 시들어 몸체와 분리되어 내려앉는다. 결코 품위를 잃지 않고 살며시 제 잎 위에. 대부분 꽃이 피어 열흘을 못 넘기는 게 꽃이라고 하는데, 이 꽃은 한번 피면 한동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필 때의 색깔과 모습으로 주인을 섬긴다.
하루의 끝이 돌아와 밝은 불빛 아래서 호접란을 바라보며, 세상의 복잡한 소리 위에 잠시 머문다. 물을 많이 주어도, 너무 적게도 안 되고. 마치 사람의 마음을 다루듯, 적당한 거리와 관심이 필요한 친구다. 오늘도 그에게 난 많은 것을 배운다. 그 섬세한 균형을 배우며 내 마음을 다스리기도 하였으니까.
가끔은 그 꽃잎 사이에 잊고 있던 나의 시간을 찾아본다. 이런 아침에도, 지쳐버린 날에도, 호접란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킨다. 꽃잎이 떨어질 때도 고요하게 품위를 지키며 침묵의 언어를 숙성시키고 있다. 마치 인생의 아름다움이란 피어남보다도 머무름과 견디는 과정에 있다고 알려 주는 듯하다. 마지막 남은 하나의 꽃을 위해 오래오래 버티던 꽃대, 호접란의 두껍고 넓은 잎에 떨어져 시들어진 꽃송이를 보며, 구부러진 어깨를 더 굽혀 송별 인사를 한다. 내년 봄에 다시 만나자는 눈인사로.
이따금 창문을 열면 바람에 흔들리는 꽃대가 살짝 나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이 꼭 나비가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호접란 앞에 앉으면 계절을 잊은 채 마음 한편으로부터 잔잔한 희망이 일어남을 느낀다. 언젠가 다시 날아오를 듯 용기를 주는 조용한 위로의 숨결처럼. 다시 다짐한다. 혹한의 겨울을 보내고 돌아오는 봄날에 상봉의 꿈을 함께 꾸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