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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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 나팔꽃을 보았다. 올림픽공원 철제 울타리에 처연하게 축 늘어져 있었다, 붉은 자줏빛 꽃잎이 물먹은 휴지처럼 파란 잎에 매달려 있다니. 잎사귀 겨드랑이에 조롱조롱 매달린 반쯤 핀 봉오리가 기다리고 있지만, 오늘 꽃을 피우지 못하면 그대로 시들어 버리게 된다. 애타게 기다리던 하루가 빗물에 녹아 버린다.
나팔꽃은 저녁에 오므려졌다가 다음 날 다시 피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송이의 나팔꽃은 하루살이꽃이라 한다. 시든 꽃이 다음 날 다시 피지는 않는다. 나팔꽃 덩굴에 여러 개의 꽃봉오리가 줄지어 생기기 때문에, 매일 아침 같은 꽃이 피는 것처럼 보인단다.
그곳은 여름만 되면 붉은 자줏빛 나팔꽃이 만발하는 곳이다. 다시 찾은 공원 둘레길, 수백 송이의 붉은 꽃이 눈부시다. 아침 햇살이 울타리를 쓰다듬으면, 어디선가 소리 없이 열리는 마음이 있다. 그건 어제 핀 것과 닮았어도, 오늘의 새로운 숨을 쉬는 꽃이다. 하루라는 시간을 위해 밤새 조용히 준비해 온 꽃봉오리였다. 하루치의 해맑은 숨으로.
들릴 듯 말 듯 서로 경쟁하며 하늘을 휘어잡는 덩굴손. 푸르른 숨결을 터뜨리고, 뜨거운 햇살 아래 연약한 꽃잎은 발갛게 타버린다. 그리고는 말없이 스러진다. 다시 피지 못하는 오늘을 더없이 순하게, 더없이 아름답게. 마치 어제가 살아 돌아온 듯, 매일 아침을 처음처럼 열고, 매일 저녁은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그 자리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바람은 조용히 꽃잎을 덮고, 한낮에 태양이 뜨거워 오므라진 나팔꽃 하나가 조용히 땅으로 사라지면, 나팔꽃 떨어진 자리에 둥근 삭과(果), 사랑의 열매 하나 깃든다. 그 자리를 바라보며 문득, 누군가 떠난 자리가 이토록 고요할지 생각해 보았다. 활짝 피다가 오그라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본 것처럼.
나팔꽃 한 줄기엔 일 년 동안 백 송이의 꽃이 핀단다. 한 송이의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에는 여러 개의 씨앗이 들어 있으니, 씨앗은 수백 개가 될 것이다. 그 꽃이 진 자리마다 가을이 되면 작은 생명들이 땅 위에 누워 다시 봄을 기다리겠지. 오늘 피어난 한 송이의 짧은 순간들이 내일의 들판을 물들일지도 몰라.
나팔꽃이 진 자리에, 떨어진 씨앗이 모두가 뿌리내리는 건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은 새의 아침 식사가 되고, 또는 개미나 작은 벌레들의 삶이 되거나, 바람에 실려 먼 들녘에 닿기도 하겠지. 그 모든 흐름도 결국, 나팔꽃이 세상에 뿌리는 다른 방식의 사랑일지 모른다. 꽃은 피고 지지만 씨앗은 어느 외딴곳의 하루를 채운 뒤. 또 다른 생으로 이어지듯.
나팔꽃이 화려하게 느껴지는 것은 피었다는 걸 알리기도 전에, 한낮의 빛 속으로 스러지려는 마음 때문이다. 순간을 위해 온밤을 준비한 듯 고요한 기다림이다. 그 뜨겁고 덧없는 시간이 오히려 더 눈부시게 다가온다. 무성한 잎 사이로 줄기줄기 타고 오르다가, 해를 마주 본 순간 피어나는 그 순수. 그게 아마 나팔꽃이 가진 화려함이 아닐까. 색깔뿐이 아니다. 그 모습은 애틋하게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임을.
나팔꽃은 아침 햇살에 맞춰 가장 먼저 피어난다. 푸른 줄기를 타고 오르며 준비한 찰나의 시간. 공원 울타리 사이로 백 송이 넘는 꽃들이 차례차례 피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고요한 화려함이다. 하지만 그 화려함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벌이나 나비가 찾아들기도 전에, 조용히 바람결에 수분을 마치기도 한다. 그 순간, 나팔꽃은 스스로 꽃잎을 말아 닫아 버린다. 더 이상 꽃잎으로 누구를 유혹할 이유가 없어진 것일까.
그 찬란함은 오직 생명을 잇기 위한 자기희생으로, 오늘의 꽃은 기꺼이 내일의 꽃을 위해 물러선다. 스스로 꽃잎을 오므리며 미련 없이 스르르 사라진다. 아직 피지 않은 자에게 자신의 숨결을 나누어 주는 듯. 그리하여 나팔꽃은 매일 새롭게 피고 지지만, 그 뒤에는 늘 어제의 꽃이 남긴 조용한 헌신이 있었다. 화려함은 짧았고, 그 짧음은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은,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생명의 위대한 몸짓이었기에.
때가 되면 나팔꽃은 스스로 지우며 새로운 사랑을 피워 올린다. 아직 피지 못한 봉오리들을 위해서. 그 찰나를 위해 자신의 짧은 시간을 다 쓴 채, 빛나는 한순간의 씨앗만 남긴다. 그게 나팔꽃의 꿈일지도 모른다. 잠시 피는 것. 짧은 하루지만, 끝이 아닌 시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