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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일까 지옥일까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운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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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영원한 명제,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사는가에 관심이 집중되는 시절이다. 잘 먹고 잘 사는 논제가 어디 이즈음만의 일이랴. 한때는 더 크고 때깔 좋은 과실을 선호했지만 현실은 유기농식단 참살이 식품으로 전환되고 있다. 풍족하지 않았어도 내 손으로 푸성귀를 가꾸던 지난시절이 어쩌면 더 이상적이었는지 모른다.

몇 해 전 일이다. 불과 초등 2년생 나이에 난데없이 이차성징이 나타나 제 어미를 혼비백산 놀라게 했다는 이웃 이야기다. 어리광이나 부릴 나이에 가슴에 멍울이 생기는 조짐만으로 그 어미는 패닉 상태였던가 보다. 놀란 어미가 딸을 데리고 병원을 찾아 상담을 하니 해답이 가히 충격적이다. 당장 플라스틱이나 일회용 용기를 버리고 콩나물 두부 계란같은 유전자변형 식자재와 간편식 레토르트 제품을 끊거나 줄이라는 강력한 경고가 있었단다. 일 가진 엄마가 거의 그렇듯 반 조리 상태 간편식을 선호한 안일했던 식습관이 어디 그녀만의 일이었을까. 유전자조작 유전자변형 성장촉진영양제 등 매체를 통해 막연하게 들어왔던 용어들이 비수처럼 공격을 해 온 격이었으리라.

작은 피아노교습소를 운영하다 접고 학원피아노 강사, 유치원 보조 교사, 안정되지 않은 일들을 전전하다보니 아이들의 음식은 간편식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놀란 가슴으로 다른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니 한걸음에 달려와 집안에 있던 일회용 용기를 다 치우고 기피해야할 식단들을 정리해주고 돌아갔단다. 물론 그녀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워킹맘’들이 온전하게 겪는 고민이 아니었을까. 우리 몸에 안 좋은 영향을 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간의 암묵적인 양해였다고 그녀는 믿었는지도 모른다. 바쁜 일상에 치여 찾았던 조리식품과 완전식품이라 여겨왔던 두부 계란조차 비정상적 성장을 초래한다니 적잖은 충격이었다.

급격한 발전을 거치면서 우리환경은 점점 나빠져만 갔다. 삶이 풍요롭고 윤택해질수록 알지 못하던 질병과도 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연시하고 터부시했던 자연환경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는 정의는 어긋나지 않았다. 빠른 발전이 가져다 준 생활변화는 달콤한 꿀이었던가. 그 달콤함에 입맛을 다시다가 달려드는 벌떼를 피하지 못해 상처투성이가 된 꼴이다. 한때는 가족들 먹거리를 위해 농산물 확대생산을 위해 농약살포와 화학비료를 죄의식 없이 사용했다. 더 많은 생산량은 농가의 소득과도 직결되었다. 불과 한세대 전일이었고 화학비료는 신의 선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세월 따라 변화된 현실은 생산자이름표를 붙인 친환경 유기농상품을 찾기에 이르렀다.

나의 많지 않은 여행경험에 유독 뉴질랜드가 기억에 남는다. 자연친화적인 그들의 삶과 친환경 농법에 일차적으로 놀랐다. 가는 식당마다 어린아이 조막만한 사과를 씻어 음식들과 나란히 비치해 둔다. 보잘 것 없이 작은 사과지만 한 알씩 집어 들고 후식으로 껍질째 먹었던 기억이다. 그들은 백화점이나 일류호텔에 쓰일 과일이라고 더 크고 좋은 것을 생산해 내려고 하지 않았다. 신이 허락하고 자연이 내어주는 만큼만 취하고 만족할 줄 아는 민족성은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고급 소비자를 위해 더 크고 더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 화학비료며 농약이며 최상품을 생산하려 애써왔을 것이다. 농업혁신은 배고픈 시절의 당근이었고, 그 시간이 지나니 유기농 식재료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현지 가이드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초청정국가라고 내내 침이 마르게 자랑했다. 호주로 이동하면서 내려다 본 뉴질랜드의 맑은 상공은 이즈음 국내 상황을 견줘 봐도 부러운 그림일 수밖에 없다. 거기다 얕은 울타리로 구획을 나눈 목초지를 소떼 양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다. 가이드북이나 그림엽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목가적 풍경은 상상 속에 그림이 아니었다. 좁은 우리도 없고 좋은 환경에서 사철 푸른 목초를 먹고 자라니 성장 불균형도 없을 터이다. 먹이경쟁도 좁은 우리로 인한 스트레스도 없는 녀석들은 최적의 환경에서 자라게 되니 최상의 육질을 자랑할 밖에. 최적의 환경에서 먹이활동을 하고 생산 활동을 하는 그 모든 시스템이 부럽기만 하다.

뉴질랜드는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대초원이 펼쳐졌다. 목초지마다 농부는 거의 볼 수 없고 점점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떼가 보일뿐이다. 때때로 만나던 긴 소떼행렬은 유액이 차오른 녀석들이 착유장소로 향하는 자연스런 풍경이란다. 한 구획의 풀을 다 먹고 나면 녀석들은 다른 구획으로 옮겨간다. 그 빈 밭을 농부는 다시 갈아엎고 목초 씨를 뿌리고 나면 그 다음 생장은 자연의 몫이다. 가이드 설명을 따라 트랙터가 지나는 곳으로 눈길을 옮기니 새떼가 트랙터를 따른다. 청정지역

의 일등공신 토양지킴이 지렁이를 먹겠다고 덤벼드는 광경이라니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육류 육가공품 유제품의 가격안정을 위해 적정개체수를 농림 부서에서 조절한다니 가격 폭등도 폭락도 없을 터이다.

우리 농가들은 어떤가. 구제역으로 많은 수의 가축들이 살 처분 당하던 때가 있었다. 말 못하는 미물이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던 안타까운 뉴스는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아픈 그림이다. 당시 구제역 수습단계에서 일역을 담당했던 관계자의 말이 뼈아프다. 극비였지만 구제역과 맞물린 생산자와 수급자의 불균형으로 가져온 개체수 초과로 말미암은 살처분이었다는 슬픈 뒷얘기였다. 그야말로 소름 돋는 이야기가 아닌가. 일정한 생산수를 조절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을 인간의 욕심이 부른 개

체수 조절실패와 행정미흡으로 생긴 참화가 분명하지 않은가. 문득 그들 국가의 실세부처는 농림부라는 말이 부러워진다.

가이드가 농담처럼 건네던 ‘뉴질랜드는 지루한 천국이요 한국은 화려한 지옥’이라는 강렬한 비유가 좀체 잊히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은 천국일까 지옥일까. 우리는 넘치는 것을 좋아했다. 보릿고개를 겪어온 세대였으니 당연하게 여겼다. 뉴질랜드에서 배우고 넘쳐나는 것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자. 자연을 과신하거나 거스르지도 말고 작은 것에 만족하고 부족한 듯 살아보자. 과유불급이라 하듯 다소 부족한 시절이 낙원이었는지도 모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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