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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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를 잡고 집 밖으로 나갔다. 사고가 난 지 8개월 만이다.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사고가 난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작년 초여름 세상이 온통 연초록으로 물들고 있을 때였다. 시립도서관에서 열린 척수협회 행사에 참석했다. 행사가 끝나고 사진을 찍기 위해 걸음을 떼놓은 순간이었다. 행사 도중 노래를 부를 때 비눗방울을 날렸다. 분위기를 더 띄우기 위함이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비눗방울이 떨어진 바닥은 미끄러웠다. 청소를 하기는 했지만 미끄러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상태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오른쪽 발을 내딛는 순간 미끄러지고 말았다. 왼쪽 허벅지뼈가 부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어이없는 사고였다.
인공 고관절 수술을 하고 병원에서 지낸 약 4개월 동안 내 왼쪽 다리의 힘은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퇴원할 당시 상태는 심각했다. 차에 혼자 올라탈 수조차 없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아침마다 워커 잡고 거실을 걸어 다녔다. 처음에는 손이 걸었는지 발이 걸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손목이 너무 아팠다. 손목의 힘을 최대한 빼고 발로 걸어야 하는데, 다리 힘이 약하니 손목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보이지 않는 힘이 아주 조금씩 생겼다. 집 밖으로 나가 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우리 아파트 주차장은 1자 모양으로 길게 생겼다. 첫날은 주차장 끝에 있는 쉼터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막상 밖에 나가니 거실과는 달랐다. 시멘트 바닥이라 딱딱했다. 조금 걸었는데도 땀은 비 오듯이 흘렀고 다리는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쉬었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허공을 더듬고 있는 호박손을 보았다. 호박손을 본다는 핑곗거리로 울타리 난간에 걸터앉았다.
호박손은 우리 아파트와 맞닿아 있는 연립주택 사람들 텃밭에 심어진 것이다. 그것은 뿌리만 남겨두고 철조망을 타고 넘어와 우리 아파트 안에 더 많이 자리 잡고 있었다. 뭐라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호박손이 생긴 줄기에 포도알만 한 연둣빛 호박이 달려 있고, 호박 꽃망울이 입을 뾰족이 내밀고 있다.
또 다른 호박손은 자신의 몸을 배배 꼬아 스프링 모양으로 만들어 죽은 백일홍 나뭇가지를 꽉 움켜잡고 있다. 나는 살짝 잡아당겨 보았다. 스프링처럼 출렁 늘어났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보기는 실처럼 가는데 어쩜 그리도 탄탄할까. 무엇이라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아기호박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서. 비바람이 몰아쳐도 죽을힘을 다해 붙잡고 있겠지. 내 마음이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두 번째 날은 허공을 더듬던 호박손이 버팀목을 잡았을까. 궁금한 마음에 더 빨리 걸어갔다. 아직도 호박손은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백일홍 나뭇가지에 호박손을 감아 주고 싶었으나 참았다. 언제인가 스스로 백일홍 나뭇가지를 잡고 말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내가 두 발로 걷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연결되었다. 호박손과 내 손이 서로 믿음의 손을 맞잡았다. 목표는 다르지만 희망을 이룬다는 것에서는 같은 것이다.
세 번째 날 나는 드디어 호박손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호박손이 백일홍 나뭇가지를 꽉 붙잡고 있었다. 눈도 없는 호박손이 어떻게 나뭇가지를 잡았을까 신기하다. 마음의 눈으로 보았겠지. 손에 느껴지는 촉감 그 느낌으로 알았을 수도 있겠지.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더듬 더듬어 보았다. 철조망의 차가운 촉감, 호박잎의 까슬까슬함이 전해졌다. 호박손도 이런 느낌으로 백일홍 나뭇가지를 붙잡았겠지. 나뭇가지를 꽉 잡은 호박손의 모습을 본 순간 내 몸속에서도 힘이 솟아나고 있었다. 시금치 먹고 힘이 불끈 솟아오르는 뽀빠이처럼. 호박손의 기운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호박손은 아기 호박을 지키고 키워야 하는 엄마니까, 실 같은 가는 손으로 그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나도 그래야 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나 자신을 지키고 키워야 한다. 나무작대기처럼 가는 다리로 걸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힘을 키워야 한다.
호박손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쉼터를 지나 도로 건너편에 있는 카페까지 갔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마음은 새처럼 가벼웠다. 누구에게라도 커피를 선물하고 싶었다. 내 다리에 힘이 생기고 있는 기쁨을 같이 누리고 싶었다.
오는 길에 보았던 경비 아저씨가 떠올랐다. 출근하는 차들이 뒤엉키지 않게 수신호를 해 주고 있었다. 경비실에 근무하는 분들과 청소하는 여사님까지 합쳐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 여섯 잔을 샀다. 워커를 잡은 채 한쪽 손에 세 잔씩 넣은 봉지를 들고 걸어갔다. 영문도 모르고 시원한 아침을 선물 받은 경비 아저씨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며칠이 지나고 여느 날처럼 워커를 잡고 주차장을 걸어 호박손이 있는 곳까지 갔다. 호박손은 여전히 백일홍 나뭇가지를 꽉 잡고 있었다. 포도알만 하던 아기호박은 자두만큼 커졌다. 웃음이 절로 피어난다. 왠지 아기호박이 큰 만큼 내 왼쪽 다리에 힘도 생긴 것 같다. 자신감이 불끈 솟았다.
쉼터를 지나 큰 도로로 나섰다. 횡단보도를 건너 북천 둑길로 들어섰다. 벚나무 터널이 길게 이어졌다. 걸어가는 사람, 뛰어가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워커를 잡고 걸어간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문득 북천 둑길이 인생길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내 다리는 후들거리고 이마로 흘러내린 땀으로 눈이 따가웠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실처럼 가는 호박손이 백일홍 나뭇가지를 꽉 잡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힘이 난다. 좀 더 가 보자.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